ⓒ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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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를 넘은 ‘뉴트로(Newtro)’가 트렌드 키워드로 떠올랐다. ‘뉴트로’는 New(새로운)에 Retro(복고)를 합친 신조어로 ‘新복고’ 바람을 뜻한다.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영향이 크다. 서울 종로 익선동 근처에 가면 드라마 속 글로리호텔에서 막 문을 열고 나온 듯 화려한 모자에 긴 드레스를 입은 신여성과 깃 넓은 양복에 중절모를 눌러쓴 신사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복 관광’과 함께 ‘모던 걸 모던 보이’ 따라하기다. 종로, 을지로 골목에는 복고풍의 카페들이 경성 시대를 재현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타임캡슐을 열고 ‘경성 시대’를 되살려낸 드라마 밖 ‘미스터 션샤인’이 또 있다. 도미 마사노리(冨井正憲·70) 한양대 건축학부 객원교수이다. 도미 교수는 잠자고 있던 경성 관련 자료들을 찾아내 빛을 보게 하고,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풍경과 지도를 발굴하고 있다. 도미 교수는 이를 위해 2015년부터 4년째 일본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열도를 구석구석 훑고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관련 자료는 전쟁으로 소실된 한국보다 일본에 많다. 지방 대학의 도서관 수장고, 마을 향토관, 개인 수집품 중에는 경성 시대를 보여줄 무궁무진한 자료들이 쌓여 있다. 한국인은 외면하고 일본인은 필요 없다 보니 책장 구석에서, 창고에서 먼지 쌓인 채 잊혀져가고 있던 것들이다. 도미 교수는 그중에서도 그림, 지도, 포스터, 엽서, 사진, 스케치 등 공개되지 않은 비문자 자료 발굴에 나섰다. 당시 경성에서 학교를 나온 일본인 동창회도 경성으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우리가 몰랐던 경성 시대의 역사와 그 시대 인물들이 도미 교수를 통해 세상 빛을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는 1936년에 제작된 오노 가즈마사의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을 찾은 것이다. 입체적이고 컬러로 그려진 경성 조감도 지도이다. 항공뷰의 구글 지도를 보는 것처럼 정밀하고 과학적이다. 지도 속에는 구불구불 골목길, 노면전차길 등 당시의 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경성시청, 조선은행 등 주요 기관은 물론이고 청풍당약국, 카페 왕관, 길성지물사 등 상점까지 표시돼 있다. 그동안 ‘대경성부대관’은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도미 교수는 ‘종로소학교’ 동창회 간사를 맡고 있던 경성 태생의 일본인으로부터 2011년 그 존재를 처음 듣고, 2014년 복사본을 만나게 됐다.

경성에서 살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경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그린 ‘가토 쇼린진’, 1920년대 서민의 삶을 일기처럼 기록한 ‘곤 와지로’, 경성을 베낀 모사의 대가 ‘구사카 핫코’, 인형으로 조선을 추억한 ‘노구치 산시로’, 제국의 야심을 지도에 담은 ‘요시다 하쓰사부로’도 도미 교수가 새롭게 발굴하고 재조명한 인물들이다.<16쪽 기사 참조> 그들이 다양한 형태로 남긴 비(非)문자 자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는 귀중한 단서들이다.

(왼쪽부터) 가토 쇼린진. 곤 와지로. 구사카 핫코. 노구치 산시로. 요시다 하쓰사부로. 오노 가즈마사 부부.
(왼쪽부터) 가토 쇼린진. 곤 와지로. 구사카 핫코. 노구치 산시로. 요시다 하쓰사부로. 오노 가즈마사 부부.

역사의 퍼즐을 찾아라

이다바시 구립향토자료관에 소장된 1910년대 경성 엽서. 위로부터 광화문(1914), 동대문, 동소문.
이다바시 구립향토자료관에 소장된 1910년대 경성 엽서. 위로부터 광화문(1914), 동대문, 동소문.

지난 11월 13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길에 있는 한옥 카페에서 백발의 ‘미스터 션샤인’ 도미 마사노리 교수를 만났다. 도미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이 한옥 카페가 내 아지트”라고 말했다. 2004년 한양대 초빙교수로 한국에 한 발을 걸쳤던 도미 교수는 지금은 한국에 두 발을 딛고 교수로, 건축가로, 연구자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경주 등에는 그가 설계한 목조주택이 여러 채 있다. 처음엔 일본 요코하마시에 있는 가나가와국립대 교수로 있으면서 일주일에 절반씩 한국과 일본을 오갔다. 도미 교수는 “한양대 월급은 전부 비행기 회사에 갖다바쳤다”면서 웃었다. 5년 초빙교수가 끝나고 그는 아예 한양대 교수로 왔다. 당시 가나가와대학 캠퍼스 리모델링을 맡아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한국을 택했다. “열정적인 한국 학생들을 보면서 일본에 유학갈 필요 없이 일본 건축을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 도미 교수의 말이다.

경성 시대에 대한 지난 4년간의 일본 현지조사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진행했다. 조사에는 교토대 박사 출신으로 근대사 연구에 몰두해온 김용하 인천도시연구소장이 함께했다. “일본에 흩어져 있는 한국 자료들이 더 사라지기 전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지금까지 공공기관 차원에서 일본 현지조사를 진행한 것은 1994년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가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처음 시도한 후 지금껏 없었다고 한다. 한국 관련 자료가 많이 보관돼 있는 개인 박물관을 방문했더니 박물관 큐레이터가 그동안 방문한 한국인은 단 1명밖에 없다고 하더란다. 일본 자료에 대해서는 무관심을 넘어 외면을 해온 셈이다.

일본 지방 곳곳에 숨어 있는 자료는 어마어마했다. 경성을 사랑한 화가 가토 쇼린진 등을 조사하기 위해 도쿠시마 현립 근대미술관을 찾았을 때다. 그곳의 학예원이 “이런 자료도 있다”면서 안내를 했다. ‘구사카 핫코’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고분벽화 모사의 대가 구사카 핫코가 경성, 평양, 경주 등의 풍경을 모사한 스케치 96점이 먼지 속에서 드러났다. 1928년부터 1년간 경성에 근무하면서 그린 그림이었다. 모사화가답게 그가 남긴 스케치는 사진을 찍어놓은 것 같았다. 경복궁 내, 대동강변 등 당시 풍경을 ‘컬러사진’으로 보는 셈이다.

도미 교수는 경성에서 학교를 다녔던 일본인 동창회 모임에서 경성 3대 영화관 ‘우미관’의 주인이었던 시바타 미요지(柴田三代治)의 딸 소메야 아사코(染矢朝子)씨도 만났다. 우미관은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본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덕혜옹주가 다녔던 경성 히노데소학교 출신인 소메야 아사코씨로부터 “아버지가 경성에 건물 60곳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수집한 자료는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기고, 매년 조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2015년 ‘대경성부대관’, 2016년 ‘곤 와지로 필드노트-1920년대 조선 민가와 생활에 대한 소묘’, 2017년 ‘1920~1930년대 그림으로 보는 경성과 부산’이 그 성과물이다. ‘대경성부대관’과 지도 속 장소가 담겨 있는 사진첩 ‘대경성도시대관’과의 관계를 밝힌 것도 도미 교수이다. ‘대경성도시대관’의 존재는 진즉 알려져 있었지만 지도와 사진첩이 자매편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해 8월 인천편 지도와 사진첩을 연결해 ‘모던 인천’을 펴냈고 오는 12월 ‘모던 경성’이 나온다. 11월 15일에는 한양대 박물관에서 ‘경성을 스케치한 화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강연한다.

“이 도시 밑에는 여러 층위가 있어요. 고려시대, 삼국시대, 일제강점기 등 한 시대 한 시대가 층을 형성하고 있어요. 그런데 근대 36년간의 층이 비어 있는 겁니다. 단절된 그 시대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 내 몫입니다. 그 재료를 분석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 앞으로 해야죠.”

그동안의 연구가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도미 교수의 답이다. 도미 교수는 일본 자료를 발굴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용하 소장은 “일본은 정보에 대해 폐쇄적이라 공공기관 등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데 도미 교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근대 자료는 모두 도미 교수로 통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자들이 도미 교수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일본에서 최근 비문자 자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밀봉돼 있던 자료들이 더 쏟아져 나올 수 있습니다. 포스터 한 장, 엽서 한 장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도시와 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거죠. 그동안 일본에 대한 연구가 너무 소홀했습니다. 넓게 보면 1880년대 후반부터 광복 때까지 70~80년간 일본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좋든 싫든 연구가 필요합니다.”

김 소장의 말이다. 4년간 조사한 결과는 목록으로 만들어 서울역사박물관에 제공했다. 목록은 지도, 엽서, 사진, 회화 등으로 분류하고 제목, 소장처, 내용을 정리해놓았다. 목록을 보면 어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1936년 제작된 조감도 지도 ‘대경성부대관’.
1936년 제작된 조감도 지도 ‘대경성부대관’.

35년 전의 인연

도미 교수와 한국의 인연은 뿌리가 깊다. 박사 과정에서 처음 주제를 잡은 것이 그리스 주택의 중정(中庭) 연구였다. 5년을 붙잡고 있어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한국의 중정을 보기 위해 1983년 처음 서울을 찾았다. 도미 교수는 “그리스 음식은 입에 안 맞아서 연구도 괴로웠는데 한국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고 말했다. 그 후 방학 때면 한국을 찾았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충무로에 갔는데 아주 낯익은 느낌이었다. 마치 도쿄의 주택가 같았다.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거주지였다. 박사 연구를 ‘식민지 시대 동아시아 국민주택’으로 바꿨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된 청국장, 김치찌개 때문에 박사 논문이 바뀐 셈이다.

한국의 주택을 연구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1987년 서울대학교 연구원으로 왔을 때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민가를 연구한 곤 와지로가 다녔던 곳을 똑같이 따라가봤다. 곤 와지로 연구 이후 40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인천 백마장에 가서 며칠을 기웃거리고 다녔더니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서울대 연구원 신분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3일을 잡혀 있었어요. 처음엔 된장찌개, 짜장면 시켜달라고 여유를 부렸는데 3일째 되니 슬슬 불안해지더라고요.” 도미 교수가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한국을 오가며 한국에 점점 빠져들었다. 이방인 건축가의 눈으로 도시를 들여다봤다. 현재에서 과거를 찾고 과거에서 미래를 연결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실에는 일제강점기 때 종로와 충무로가 재현돼 있다. 종로와 충무로 각각 2㎞를 옮겨놓았다. 이 거리에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 한눈에 보인다. 도미 교수의 작품이다. 고서점에서 당시 전화번호부를 구입해 여기에 기재돼 있는 주소로 종로, 충무로에 있던 가게 이름, 주인을 찾아냈다.

앞으로도 한국의 과거를 찾아주기 위한 그의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도미 교수는 사장돼가는 자료들이 너무 많고, 그 시대의 증언자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도미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곤 와지로 필드노트’를 펴낸 후 한 연극 기획자가 찾아왔다.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한 연극이었는데 무대 연출을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엄청 보람을 느꼈다”면서 “발굴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복식사, 주택, 풍속 등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찾아낸 자료들로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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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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