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경성 돈암리(현 돈암동) 풍경.
02 경성 다동 풍경.
03 중학동에서 바라본 백악산 풍경. 자료: 아난시 시민부 문화진흥과
경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에 담다
   가토 쇼린진 (加藤松林人·1898~1983)
   
   ‘돈암리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수유리를 지나 우이동에 이르는 2리에 가까운 교외는 좌측에 북한산을 바라보고 정면에 도봉산을 보면서 교외 풍경이 이어진다. 봄은 자두, 복숭아나 개나리꽃이 피고 가을은 아주 맑은 대기 속에 선명한 산의 능선이 뚜렷이 하늘을 가르는 풍경이 지금도 뚜렷이 눈에 떠오른다.’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활동했던 화가 가토 쇼린진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 도쿠시마현에서 태어난 가토 쇼린진은 스무 살이던 1918년, 사업하던 부친을 따라 경성에 와서 1945년까지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는 와세다대학 문학부 예과를 마치고 경성에 와서 미술을 처음 배웠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풍경화로 입선, 화가가 됐다. 그는 매년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1937년부터는 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이씨 왕가’의 그림 선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경성에 사는 동안 한반도 전역을 돌며 기행문을 남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광복과 함께 일본으로 급하게 떠나면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오사카 인근에 살면서 ‘경성 30년’의 그리움을 일기와 그림으로 달랬다. 추억 속에서 불러낸 한국의 풍경과 삶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그렇게 남겨진 그림이 350여점이다. 그림은 그의 고향인 일본 도쿠시마현 아난시 향토관에 소장돼 있다.
   
   망우리의 옛 풍경, 칼춤 추는 무희들, 한복 입고 얼어붙은 한강에서 얼음낚시 하는 남자들, 서울 중구 다동으로 보이는 기와촌 등 그의 그림에는 자신을 화가로 만들어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당시의 풍경과 풍속을 컬러로 볼 수 있게 해준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땅을 20년 후인 1964년 밟을 수 있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논의가 시작되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초청된 일본인이었다.
   
   

   숟가락 개수까지… 서민들 삶이 한눈에
   곤 와지로 (今和次郞·1888~1973)
   
‘경기도 연천군에서는 한 방에서 세 명이 자는 것이 보통임. 다섯 명이 자는 경우도 있음. 잠을 잘 때는 나체로 잠. 여자는 저고리라고 하는 조끼 형태의 것만 입고 잠. 훈도시(일본의 속옷)는 보통 착용하지 않음. 침구는 두 겹으로 접은 후 말아서 올려놓음. 온돌 크기는 보통 사방이 8척, 높이는 약 3척.’
   
   와세다대학 건축학과 교수 곤 와지로가 한국 민가를 조사하고 ‘온돌과 수면’이라는 제목으로 남긴 기록이다. 곤 와지로는 일본 고현학(考現學·modernology)과 일본생활학회 창시자이다. 고현학이란 특정 시대의 풍속·세태를 조사, 기록하는 학문이다. 건축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1930년대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로 꼽히는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곤 와지로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곤 와지로는 1918년부터 일본 전역을 돌며 민가 연구를 시작해 고현학자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 대한 연구는 1922년부터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부락조사’를 시작으로 총 네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방문했고 두 차례의 조사를 통해 한반도 전역의 민가와 서민들의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의 통치정책이 문화정책으로 변환한 것과 때를 같이해 조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44년 네 번째 방문은 일본 제철회사 토건협력회의 의뢰로 ‘노무자 주택조사’를 위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주택의 개선방안을 찾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가 평생 남긴 자료는 방대하다. 책으로 남긴 것만 5600권에 이른다. 대부분 일본 도쿄 고가쿠인대학 도서관에 ‘곤 와지로 컬렉션’으로 소장돼 있다. 그는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1923년 조선건축회의 좌담회에 초청돼 “총독부 신청사는 너무 노골적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역사박물관은 1922년, 1924년 남긴 미공개 스케치, 사진들을 묶어 ‘곤 와지로 필드노트’를 펴냈다. 여기 담긴 자료들을 보면 기록의 상세함에 감탄하게 된다. ‘창신동 조병택씨’ 자료에는 방 안의 보료, 담배, 재떨이 위치까지 기록하고 있다. 새망, 도리깨, 술병, 도롱이, 항아리 등 다양한 생활도구들도 형태는 물론 크기, 재질, 작동원리까지 적어놓았다. 그의 자료에는 우리가 찾아야 할 100년 전 기억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 구사카 핫코의 경복궁 내 스케치와 현재 모습. 자료: 도쿠시마 현립근대미술관

   모사의 대가 경성을 베끼다
   구사카 핫코 (日下八光·1899~1996)
   
   한국에는 그동안 구사카 핫코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구사카 핫코는 모사의 대가로 반평생을 고분벽화의 모사에 바쳤다. 그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벽화를 모사하기 위해 1928년 경성에 파견됐다. 총독부 박물관 건물은 경복궁 내에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식민통치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 이때 경복궁 내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전시관을 지었다. 그중 하나인 서양식 2층 건물이 박람회가 끝난 후 총독부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서 1년여 근무하면서 모사작업을 하는 틈틈이 경성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도쿠시마 현립근대미술관에는 그가 남긴 ‘조선 스케치’ 총 96점이 소장돼 있다. 경복궁 내에서 근무를 한 덕분에 경복궁을 담은 그림이 17점이다. 자경전 북쪽 십장생 무늬가 있는 굴뚝(보물 제810호)의 모습 등 그의 스케치는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실제와 똑같다. 그는 경성 외에도 경주, 개성, 평양, 수원을 다니며 곳곳의 명소와 인물들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중 평양에서는 1929년 7월 4~10일까지 있으면서 대동강과 주변 풍경 30점을 남겼다. 그림 뒤에는 날짜, 장소 등 간략한 설명을 적어놓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유물수집가인 평양의 부자 ‘모로오카 에이지’의 그림 뒤에는 ‘신세를 졌다’고 적고, 장춘관이라는 요리점의 기생 이금수홍의 그림 뒤에는 ‘미인을 그리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지요’라고 적어놓았다.
   
   흑백사진밖에 없던 시절, 그가 남긴 모사 작품은 마치 100년 전 컬러사진을 보는 것 같다. 그만큼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01 조선박람회 연예관 풍경을 스케치해간 후 인형으로 만들었다.
02 노구치 산시로의 대표작품인 미요로 인형.
03 노구치 산시로가 조선에서 그려간 스케치들. 자료: 미시마시 향토자료관

   인형에 담은 경성의 추억
   노구치 산시로 (野口三四郎·1901~1937)
   
   일본 시즈오카현 미시마시(市) 지역 관광상품으로는 ‘미요로 인형’이 유명하다. 나무틀에 겹겹이 종이를 발라 전통적인 인형 제작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미요로 인형’은 이곳 출신인 노구치 산시로의 작품이다. 그는 미요로 인형으로 제1회 종합인형예술전시회의 최고상을 수상했다. 그를 인형작가로 만들어준 것은 조선이었다.
   
   전당포집 아들로 당시 ‘금수저’였던 노구치 산시로는 영화, 연극판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미쓰코시백화점의 사진기사가 됐다. 1929년, 그는 백화점 파견사원으로 조선박람회 참가차 경성 땅을 처음 밟았다. 조선박람회는 일제가 식민지배 20년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대규모로 기획한 행사였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흥미로웠다. 박람회가 끝난 후 그는 도쿄로 돌아가지 않고 한 달여 조선을 여행하면서 산촌의 풍경과 서민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렸다. 굴렁쇠 소년, 물을 긷는 여성, 농부의 뒷모습, 노는 아이들, 줄타기와 무희들의 움직임이 사진 렌즈가 아닌 스케치북에 담겼다.
   
   일본에 돌아가는 그의 가방에는 조선의 점토인형이 담겨 있었다. 그 후 그는 사진사를 그만두고 인형작가가 됐다. 그림으로 담아간 조선은 그의 손을 거쳐 ‘관기’ ‘조선의 소몰이’ ‘물을 긷는 반도의 여자’ ‘줄타기’ 등의 인형으로 재탄생했다. 아쉽게도 인형작가로의 삶은 짧게 막을 내린다. 아내와 딸을 잇달아 병으로 잃고 고향인 미시마로 돌아간 그도 얼마 안 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7년, 그의 나이 겨우 35세였다. 20년 후 미시마시의 ‘어머니회’가 복제 미요로 인형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노구치 산시로의 인형은 이곳의 명물이 됐다.
   
   
▲ 경성 전차연도 자료: 교토 부립종합자료관

   제국의 야심을 그리다
   요시다 하쓰사부로 (吉田初三郞·1884~1955)
   
   일제강점기 독특한 형태의 조감도가 만들어졌다. ‘하늘에서 새의 눈으로 바라본 모습’이라는 뜻처럼 조감도는 보통 건축도면으로 활용될 만큼 사실적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감도 작가인 요시다 하쓰사부로의 조감도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그려넣었다. 교토 조감도에 도쿄, 규슈는 물론 조선, 대만, 중국 대륙까지 포함돼 있는 식이다. 측량을 통해 만든 세밀한 지형도를 바탕으로 원근법을 이용해 수백, 수천㎞ 떨어진 곳을 그려넣고 색을 입혔다. 일종의 관광지도 형태다. 실제 관광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요시다 하쓰사부로가 그린 조감도는 통계로 확인된 것만 1600여점이다. 당시 비슷한 방식으로 활동을 한 조감도 작가가 많았지만 ‘하쓰사부로식 조감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의 명성은 독보적이다. 측량을 기반으로 한 지도가 이미 대중화된 시기에 하쓰사부로식 조감도는 왜 유행했을까. 그 이면에는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을 노렸던 일본의 야심이 숨어 있다.
   
   금강산을 보며 일본과 대만을 그리고, 대만을 보며 한반도와 일본을 그리는 조감도에는 그들이 동아시아를 보는 인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1925년 이후 동아시아 전역으로 제국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조감도의 생산이 급증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요시다 하쓰사부로는 중일전쟁에 참전, 전략도를 그렸을 정도로 일본 군부에 적극 협조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의뢰로 1927년 조선 전국 명승지, 1929년 조선대도회를 그린 데 이어 주요 도시의 홍보용 지도를 다양하게 제작했다. 경성전차안내(1929), 금강산명소(1929) 등 그가 남긴 작품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남아 있다. 지난해 국내서는 처음으로 한양대 박물관에서 ‘제국의 야심을 그리다’란 제목으로 요시다 하쓰사부로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 ‘대경성부대관’에서 경성 도심 부분.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80년 전 구글 지도가 있었다
   오노 가즈마사 (小野三正·연대 미상)
   
   1936년 8월 조선신문사는 세로 142㎝, 가로 153㎝에 달하는 대형 조감도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을 발행했다. 경성, 인천, 월미도까지 포함된 한 장의 조감도에는 명승지, 관공서, 학교, 가게 등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서울 도심 부분을 확대해 보면 종로 주변으로 ‘길성지물사’ ‘천풍당’ ‘우미관’ ‘조선극장’ 등이 보이고 현재 YMCA 건물인 ‘기독청년회’도 그려져 있다.
   
   평면지도와 입체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조감도 수법에 의해 제작된 지도는 어찌나 정밀한지 마치 요즘 구글의 항공뷰를 보는 듯하다. 지도 제작을 지휘한 사람은 오노 가즈마사다. 그는 입체화시킨 도시 경관도를 제작하기 위해 블록다이어그램을 응용한 일점투시도법(한 점을 시점으로 한 원근법)을 적용했다.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조감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요시다 하쓰사부로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작업은 수제자인 모리 상조오가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모리 상조오는 한국에 온 적이 없다. 사진만 보고 마치 눈으로 본 듯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는 오사카정판에서 인쇄, 2엔에 시판됐다.
   
   10개월 후 조선신문사는 사진첩 ‘대경성도시대관’을 발간했다. 사진첩에는 경성, 인천의 명승지, 사찰, 학교, 공장, 상점 등 1189건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첩은 진즉 알려졌지만 조감도 ‘대경성부대관’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최근이다. 도미 마사노리 한양대 객원교수는 2011년 도쿄의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경성에서 태어난 한 일본인을 통해 지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도미 마사노리 교수는 연구를 통해 지도에 기록된 장소의 대부분이 사진첩에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경성부대관’과 ‘대경성도시대관’은 자매편이었던 것이다. 도미 마사노리 교수는 연구 결과를 오는 12월 ‘모던 경성’이라는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경성이 속속들이 기록된 지도를 들여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8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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