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신세계그룹은 육군 39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부근의 3만3000㎡(1만평) 규모의 부지를 약 750억원에 사들였다. 대형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창원’을 건립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신세계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업 허가 신청서조차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건설 인허가권을 쥔 창원시가 지역 상인단체와 소상공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건립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필드 사업 담당 계열사인 ‘신세계 프라퍼티’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시에서 공론화위원회 판단을 기다리기 때문에 우리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스타필드 창원’ 건립이 미뤄지자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은 지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청 온라인 게시판에 ‘스타필드 유치를 바란다’는 글 수천 건을 올렸고, 시청에는 민원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허성무 창원시장은 어석홍 창원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스타필드 창원 건립 허가 판단을 맡겼다. 경남도 건설소방위원장인 강민국 경남도의원은 전화통화에서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기 어려워하는 시장이 난제를 공론화위원회에 떠넘겼다”고 말했다. 스타필드 문제 해결을 위한 창원시 공론화위원회는 지난 8월 꾸려졌지만 아직 구체적인 의제 설정도 못한 상태다.

비슷한 상황은 중앙정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부의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사례다. 교육부는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출범한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를 통해 김영란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입제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판단을 맡겼다. 하지만 지난 8월 공론화위는 10개월간의 조사 끝에 “시민참여단의 의제별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오차범위 내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공론화위가 제출한 의제 1안은 정시를 45% 이상으로 확대하되 수능 상대평가를 유지하는 내용을 담았고, 의제 2안은 수시·정시 비율을 대학 자율에 맡기되 수능을 전 과목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내용이었다.

20억원을 쏟아부은 공론조사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자 보수·진보를 막론한 11개 교육 시민단체는 교육부가 추진하는 각종 정책 관련 공청회에 모두 불참하겠다며 반발했다. 교육부는 대입제도 외에도 고교학점제, 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교육, 학생부 학교폭력 기재방안까지 일일이 시민 결정에 따른다고 발표하면서 정책 결정을 ‘공론화’라는 이름 아래 미룬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결국 8월 말 김상곤 당시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가 경질됐고, 유은혜 의원이 새로운 사회부총리로 임명됐다.

공론화위에 문제 해결 떠넘기기

지난해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중단 여부를 결정할 때 사용된 공론조사가 최근 남발되면서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공론화위원회를 정책적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기 어려워하는 선출직 지도자들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론화위원회를 설립하고 문제 해결을 떠넘긴다는 설명이다.

현재 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공론조사는 가히 ‘열풍’ 수준이다. 전국 광역지자체들 중에는 공론조사를 하는 곳보다 한 번도 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지난 6월 지방선거 때 간선급행버스(BRT) 재검토를 공약한 오거돈 부산시장은 당선 뒤 BRT 공사 재개 건에 대한 판단을 13명으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에 맡겼다. 광주광역시도 마찬가지. 이용섭 광주시장으로부터 광주 지하철 2호선의 건설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을 넘겨받은 ‘광주도시철도 2호선 공론화위원회’는 최근 2호선 건설에 찬성한다는 결론을 냈고, 이용섭 시장은 “공론화위의 판단에 따라 지하철 2호선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경남 김해시 역시 쓰레기소각장을 증설하는 문제에 공론조사를 도입했다.

아예 공론화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제도화하려는 지자체도 있다. 인천시다. 인천시는 12월 중 시의회에 ‘인천시 공론화위원회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상정한다. 공론화위원회는 시장 직속으로 운영되며 상설기구로 운영된다. 상설 공론화 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은 인천시가 전국 17개 광역지자체 중 최초다.

국회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10월 29일 여·야 국회의원 23명은 ‘군 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수원, 대구, 광주를 포함한 전국의 군 공항 이전 문제를 결정하는 데 ‘주민참여형 공론조사’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김진표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법안에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 등 야권 의원들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앞서 지난해 2월 국방부는 수원 군 공항 이전 예비후보지로 화성시 화옹지구를 선정해 발표했다. 국내 최북단 군 공항인 수원 전투비행단이 도심과 가까이 있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반면 예비후보지로 선정된 화성시는 총력을 다해 법안 상정을 막아낸다는 입장이다. 화성시는 11월 15일 시의회 결의안 발표를 시작으로, 19일에는 주민들로 결성된 시민단체가 국회 앞에서 군 공항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시장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군 공항 이전을 막기 위해 사력을 기울이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공론화위에서 과반수가 찬성할 경우 지자체장은 14개월 내에 공론화위의 권고사항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되어 있다. 화성시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겉으로 볼 때는 공론화위원회 설치니 블록체인이니 하면서 선의로 포장돼 있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법률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주민투표에서 찬성이 나와도 시장이 유치신청을 안 하면 막을 수 있었는데 공론화위에서는 과반수가 찬성하면 반드시 이행하도록 돼 있다”며 “오히려 시의 재량권을 뺏는 법안”이라고 말했다.

공론화위원회 상설화 움직임

지자체장이 정책 결정을 공론화위원회에 떠넘기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지자체는 제주도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2015년 보건복지부로부터 허가받은 국내 첫 투자개방형(영리)병원 건립을 지난 6월 제주도 공론화위원회에 맡겼다. 하지만 공론화위 결론이 ‘개설 불허’로 나왔고, 정부 승인을 믿고 병원 건물을 짓고 직원을 고용한 투자자인 중국의 뤼디그룹은 제주도를 상대로 1000억원대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1988년 미국 스탠퍼드대의 제임스 S.피시킨 교수가 개발한 공론조사는 주로 찬반이 갈리는 갈등 사안에 대해 양측에 정보를 제공하고 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양측의 의견 변화를 측정하는 조사 기법이다. 숙의 과정에는 심층토론, 전문가 설명, 조별토론 등이 포함된다. 일반적인 여론조사가 일회성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공론조사는 다양한 정보와 토론, 전문가 설명을 접하는 숙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보다 심층적이고 대표성을 띠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론조사 과정의 핵심인 합숙토론에 수차례 참석한 여론조사업체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공론조사 합숙토론을 현장에서 보면 감동적이다. 60대 남성이 20대 여성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서로의 일리 있는 의견을 듣고 설득되어가는 과정이 눈앞에서 보인다. 일반 여론조사를 하면 여론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은데 공론조사는 그렇지 않다. 성향이 유사한 사람들이 뽑히면 조사의 공정성에 손상이 가겠지만 표본을 제대로 선발한다면 분명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공론조사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지난해 정부가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중단 재개 여부를 공론화위원회에 맡기면서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론화위원회’를 꾸렸고, 350명의 시민참여단이 선정돼 3개월간의 숙의 과정을 거쳐 최종 판단을 했다. 참여단의 판단은 ‘건설 재개’로 나왔고, 문재인 정부는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5·6호기 건설을 재개했다.

하지만 공론조사가 무분별하게 남발될 경우 선출직 지자체장들이 난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공론조사 결과는 참고 사항 정도로 활용해야지 공론화위가 아예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이 되면 정치인들의 책임성이 약화된다는 설명이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의 지적이다.

“공론조사는 절대적 평가기준이 아니다. 공론조사 결과는 참고자료로 써야지 모든 결과를 여기다 맡겨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은 뭐가 필요하고 지자체장은 뭐가 필요한가. 대중 의견을 소중히 여긴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공론조사를 했으니 다 괜찮다’는 식의 접근은 책임 정치를 와해할 소지가 있다. 특히 요즘은 SNS가 발달하면서 자칫 중우정치로 빠질 수 있다.”

다른 전문가들 역시 공론화위원회의 역할이 권고·자문에 그쳐야지 정책 결정권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제기한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입소스코리아의 이상일 본부장은 전화통화에서 “공론조사가 분명 좋은 도구인 건 맞지만 주민 의견 뒤에 숨어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은 업계에서도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업체 간부 역시 “공론조사 결과는 참조만 하고 이걸 감안해 결정권자들이 정책 결정을 해야 하는데 의사결정을 여기 맡겨버리니까 문제가 생긴다”며 “공론화에 참여한 시민들이 책임을 질 것도 아니고, 선출직들의 책임회피 수단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9~10일 광주 도시철도 2호선 건설 공론조사를 앞두고 광주시에 붙은 건설 찬반 현수막. 공론화위의 결론은 ‘건설 허가’로 났고, 이용섭 광주시장은 공론화위의 권고안을 받아들였다.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9~10일 광주 도시철도 2호선 건설 공론조사를 앞두고 광주시에 붙은 건설 찬반 현수막. 공론화위의 결론은 ‘건설 허가’로 났고, 이용섭 광주시장은 공론화위의 권고안을 받아들였다. ⓒphoto 뉴시스

국내 공론조사는 변형된 공론조사

제대로 된 공론조사를 하려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여론조사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대입제도 개편 공론조사는 각각 20억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공론조사를 마친 제주와 광주 역시 총 비용이 각각 4억~5억원 정도 든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세 수입이 많지 않은 지자체의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비용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꾸리고 결과에 승복한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이 나쁜 선례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공론화위원회가 최고기구처럼 기능하고 결정권자가 공론화위의 권고사항을 충실히 따르면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 광주에서도 이번 2호선 건설 재개를 두고 구성된 공론화위원회가 법적 근거 없이 최고기구처럼 활용됐고, 시의회에서 이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자체 입장에서는 공론화위원회를 꾸리고 판단을 구했을 경우 공론화위원회의 결론을 따르지 않기도 모호하다. 위원회를 꾸리고 조사용역업체를 선정하는 등 공론조사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공들인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결론을 따르지 않는다면 ‘시간과 예산을 낭비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신고리 5·6호기의 경우 ‘공사 중단’을 주장한 이들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이기 때문에 ‘재개’로 나왔을 때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것이지 반대로 나왔으면 소송이 빗발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공론조사를 변형해 활용하면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는 공론조사의 경우 정부나 지자체가 공론조사위원회를 꾸리고 위원회가 조사용역업체를 선정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반면 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미국 스탠퍼드대 숙의민주주의센터(CDD)를 비롯한 공론조사 전문센터와 협약을 맺고 센터가 조사용역업체를 선정하는 등 조사 전반의 사항을 관할한다. 가까운 예로 중국·일본의 경우도 자국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CDD에 프로젝트 해결을 의뢰한 적이 있다.

하지만 국내 공론조사는 대부분 정부나 지자체가 만든 위원회가 공론조사를 주도하는 시스템이다. 이 경우 조사 주체가 중립성을 인정받기가 외국 센터에 맡길 때보다 어렵다. 지자체가 꾸리는 위원회가 전반적 사항을 모두 관할하기 때문에 위원회를 어떻게 꾸리고 조사용역업체를 어디로 선정하느냐가 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좌우한다.

조사의 전문성 측면에서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론조사 창시자인 피시킨 스탠퍼드대 교수가 이끄는 CDD의 경우 지난해까지 27개국 107개 프로젝트에 대한 공론조사를 진행해왔다. 하지만 국내에서 공론조사를 할 경우에는 실질적 조사를 조사용역업체가 하게 된다. 위원회의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행정적인 운영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중립성·공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생긴다. 국내에서 공론조사 전문가로 손꼽히는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정부가 위원회를 만들어서 공론조사를 하면 조사용역업체가 조사 전반의 사항을 관할하는데, 조사용역업체는 정부나 지자체 의지에 반해 설문에 대한 이의제기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며 “전문가도 위원회가 고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중립성·공정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광주 도시철도 2호선 건설에 반대해온 시민단체들은 시에서 선정한 위원회 구성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었다.

제주 녹지국제병원의 모습. 본래 지난해 9월 개원 예정이었지만 공론화 결과 ‘개원 불허’ 권고안이 나오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photo 김형호 조선일보 객원기자
제주 녹지국제병원의 모습. 본래 지난해 9월 개원 예정이었지만 공론화 결과 ‘개원 불허’ 권고안이 나오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photo 김형호 조선일보 객원기자

대의제 보완 가능할까

공론조사는 깊게 보면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간의 충돌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회가 복잡화되고 다양화되면서, 국민의 대리자인 정당이 국민의 요구에 섬세하게 답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를 공론조사가 파고들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대규모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경험하면서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 여러 정치학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공론조사 창시자인 피시킨 교수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숙의민주주의는 대의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입장을 수차례 피력해왔다. 공론조사 자체가 대의제를 보완하기 위한 조사기법이라는 설명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김지형 전 대법관 역시 지난해 신고리원전 공론조사가 끝난 10월 말 언론 인터뷰에서 “공론조사는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며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굳이 공론조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피시킨 교수 본인은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피시킨 교수는 지난 11월 13일 기자와 주고받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문제는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했는지보다는 오히려 시민들과 대표성 있고 사려 깊은 방법(representative and thoughtful way)으로 대화했는지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선정과 자료의 균형성, 문항 설정에 있어서의 공정성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한규섭 교수 역시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이 공론조사에 맡긴다는 것 자체도 정치적 결정”이라며 “결정권자가 문제 해결을 공론조사에 맡긴다는 것 자체가 대의민주주의를 반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어떤 사안들은 다수가 찬성하는 게 아니더라도 위정자가 리더십을 발휘해 결단을 내리고 반대파를 설득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공론조사를 남용해 여론으로 압박을 하는 것은 자칫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공론조사를 정교하게 설계하고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조사 기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이미 결정된 정책사항에는 적용하지 않는 식으로 가이드라인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준 교수는 “제대로 된 공론조사는 고도의 정확성을 요구하고 여러 작업조건이 필요하다”며 “공론조사를 어설프게 밀어붙이기식으로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업체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여론조사업체는 특성상 위원회로부터 용역을 발주받은 업체이기 때문에 문항 설정, 전문가 선정 등에 한계가 있다. 한규섭 교수는 “여론조사업체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전문성과 객관성을 지닌 제3의 업체, 이를테면 KDI나 대학 연구소 같은 곳에 공론조사 용역을 맡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공론조사 열풍이 불면서 지난 6월에는 공론조사 창시자 피시킨 교수가 방한해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MOU를 맺기도 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사회학과 교수)은 “숙의민주주의의 학문적 논의와 협력을 위해 피시킨 교수가 운영하는 CDD와 협약을 맺었다”며 “공론조사가 분명 좋은 도구인 건 맞지만 최종 결정은 행정 책임자가 지도록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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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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