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 백하 김대락의 옛 집 ‘백하구려’에서 내앞마을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시중씨. 김씨는 김대락의 종증손자로 백하구려를 지키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1977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충남 서산에서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아배(‘아버지’의 경상도 방언)가 서산에 오신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이 어떻게 사나 보러 온 줄 알았는데 아배가 꺼낸 이야기는 무겁고 중요한 얘기였다. 나는 녹음기를 꺼내 녹음했다.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아배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아배 연세가 환갑을 바라보던 시점이었다.”
   
   경북 안동 임하면 오대리에서 태어난 김시명(71)은 5남매의 맏이였다. 집 한 칸 없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겨우 세끼 밥 챙겨 먹을 정도로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그간 어렴풋이 전해듣기는 했었다. 가난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증조부의 ‘독립운동’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고 왜 그게 자식 세대의 가난으로 이어졌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은 가족에게 ‘독립운동’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 면사무소에서 미제 분유 두 통을 들고 와서 ‘여기 독립운동 했던 할배가 살던 곳이 아니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내 할머니, 그러니까 ‘독립운동 했다던’ 할배의 며느리가 거의 발작하듯이 ‘그런 사람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쫓아냈다. 할머니에게 ‘독립운동’은 공포의 단어였다.”
   
   김시명의 첫째 여동생 김갑진(67)이 떠올린 이야기다. 김시명네 집에서 독립운동 했다는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었다.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김필락(金珌洛·1919년 작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원래는 의성김씨 집성촌인 안동 임하면 천전리, 속칭 ‘내앞마을’에 적(籍)을 두고 있었지만 1910년대 내앞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만주로 이주하던 시기에 인근 오대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원래는 다른 집안 사람들과 같이 만주로 이주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할배의 어머니가 무척 몸이 안 좋으셔서 어머니를 남겨두고 갈 수도, 모시고 갈 수도 없어서 잠시 다른 마을로 집을 옮겨 머무른다는 것이 아예 (오대마을에) 터를 잡게 됐다.”
   
   내앞마을에 살던 의성김씨 일가는 만주로 떠날 때 자신들이 가진 땅이며 재산을 모두 처분했었다. 김필락 일가도 마찬가지였다.
   
   “아배는 종종 내앞마을에 와서 ‘저기서 저기까지가 우리 땅이었다’고 알려주곤 했다. 그걸 필락 할배가 다 팔고 만주로 떠난 일가들에게 돈을 쥐여준 것이다.”
   
   다른 일가 친척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난 사이 김필락 역시 안동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1919년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안동에서도 여기저기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7일 안동 예안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장날에 맞춰 안동면, 임하면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김필락은 3월 21일 임하면 길안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자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집집마다 돌렸다.
   
   3000명의 군중이 모였다. 독립만세를 목놓아 부르던 군중들이 지금의 경찰 지구대 역할을 하던 주재소를 점거하고, 면사무소의 기물을 파손했다. 안동 곳곳에서 그와 같은 만세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주동자를 잡으려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3월 26일, 일본 경찰이 김필락의 오대마을 집을 찾았다. 김필락의 28살 아들 김병덕과 그의 가족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경찰은 김필락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
   
   “자신의 아버지,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가족들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 순사들은 일제 강점기 내내 가족들을 감시했다. 아들은 주재소에 끌려다니고 취조받느라 오래살지 못했다. 김필락의 집에는 김필락의 부인, 어린 며느리, 손자 두 명만 남았다.”
   
   그 손자들이 결혼해 낳은 사람이 김시명과 형제들이다. 자산을 만주로 실어 보내고 경제생활을 영위할 가장을 모두 잃은 가족들이 제대로 된 가계를 꾸릴 리가 없었다. 김시명 형제들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하필 6·25전쟁으로 집이 모두 불탄 터라 남의 집 담벼락에 얼기설기 지은 방 두 칸에서 철이 들 때까지 살았다.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은 적도 수없이 많았다.
   
   “뒤늦게서야 우리가 왜 가난해졌는지를 알게 됐던 거다.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독립운동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로 ‘독립운동’이라는 말조차 못 꺼내게 했었다. 그나마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아배가 숨겨진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나는 잊어버린 우리 할배를 기리기 위해서 한동안 할배의 흔적을 찾아헤맸다. 겨우 찾아낸 글 한 줄 ‘일경(日警)의 수색으로 자택에서 사살돼 순국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당시 원호처(지금의 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다.”
   
   김시명의 노력으로 김필락은 197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가 1991년 건국훈장 등급이 개정되고 나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김필락 할배의 독립운동은 할배 혼자 동떨어져 행한 것이 아니었다. 왜 할배가 내앞마을에서 오대마을로 이사 왔을까를 되짚어봤다. 내앞마을에 아무도 남지 않아서였다. 내앞마을의 모든 일가가 독립운동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잊힌 독립운동의 성지
   
   보훈처에 따르면 지금까지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5180명에 달한다. 이 중 경상북도 출신은 2216명이다. 그중에서도 안동 출신 독립유공자는 941명이다. 단일 지역으로 따지면 전국에서도 경상북도, 그중에서도 안동 출신 독립유공자가 제일 많다.
   
   누가 그렇게 독립운동에 열심히 나섰을까. 예로부터 집성촌(集姓村)으로 이뤄져 있던 안동 지역의 특성을 감안해 성씨별로 서훈 받은 독립유공자의 수를 헤아려봤다. 김시명에 따르면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낳은 성씨는 진성이씨로 52명이다. 의성김씨는 두 번째다. 한 가문에서 47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의성김씨 집성촌 중에서도 내앞마을이라 불리는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난 독립유공자의 수는 눈에 띌 정도로 많다. 내앞마을에 자리 잡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집계로는 내앞마을 출신 독립유공자는 20명이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조금 더 포괄적으로 집계한다. “내앞마을에 있다가 흩어진 일가 친척들까지 합하면 33명 정도 될 것”이라는 게 문중의 설명이다.
   
   20명이든 33명이든 단일 마을에서 나온 독립운동가 수로는 유독 많은 수다. 서훈 신청을 해 훈장 수여가 예정된 인물, 사상과 기록 미비의 문제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운동가의 수를 따지자면 더 많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내적으로 보자면 내앞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원인이다. 앞에 나서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가풍(家風)이 한몫을 했다. 김시명은 부친이 오랜 시간 할아버지의 공적을 알리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직접 말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배는 할아버지의 공적을 언젠가는 남들이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만히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는 사이, 독립운동가는 빠르게 사회에서 잊히고 공적을 기억하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더 큰 이유는 독립유공자 자손이라면 생존하는 일조차 어려웠다는 데 있다. 수십 명의 독립유공자를 낸 내앞마을의 자손들은 광복 후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로도 벅찬 생활을 했다. 아예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서 거지 꼴을 하며 빌어먹고 사는 자손도 있었다. 돌아왔다 하더라도 집 하나 덜렁 남아 농사지을 땅도 없는 곳에서 자손들은 생계를 해결하는 일에 몰두했다. 할아버지의 업적을 알리기는커녕 기억하기도 힘든 삶을 살았다.
   

   모든 것 버리고 義를 따른 사람들
   
   내앞마을의 독립운동을 이끈 백하 김대락(金大洛·건국훈장 애족장)이 일가 친척 15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 하러 떠났을 때부터 자손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안동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김대락의 집은 ‘삼천석 집’이라고 불리었다. 사람이 천석, 글이 천석, 땅이 천석 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만큼 안동 유림(儒林)의 존경을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0년 백하 김대락과 일가 친척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만주 서간도로 떠나기로 했다. 독립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하고 땅이며 재산을 모두 팔아치운 뒤였다. 김대락의 땅 천석뿐만이 아니다. 일가 친척들도 십시일반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다. 정확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 추산하기는 힘들지만 내앞마을 사람들의 고증에 따르면 현재 가치로 당시 처분한 재산은 수백억원에 달한다.
   
   웬만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족 전부가 고향을 등지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난다는 것,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인지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으로 계급도 재산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했다.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 안동 유림의 분위기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사(史)에서 유림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잊혔던 만주 서간도 지방의 독립운동이 발굴되기 시작했고, 서간도 지방 독립운동을 거의 이끌었던 유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알려지면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변했다.
   
   안동 유림들의 활동은 1890년대 의병활동부터 시작했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독립운동가들의 출발점에는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은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군대에 맞서봤자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었겠냐만은 의병활동에 나선 유림들은 ‘나서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정(正)’이고 ‘의(義)’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내앞마을에서 왜 그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내앞마을의 의성김씨들은 조선 후기부터 관직에 나가는 대신 안동 지방에 눌러앉아 학문을 양성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권력에서 밀려난 백면서생들이 들고일어나 나라를 되찾으려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선비들의 ‘의(義)’에 대한 가치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강윤정 부장은 “다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가치지향적 자세는 이후 독립운동에 걸쳐 내내 드러난다”고 말했다.
   
▲ 만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국경에서 검색받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소장 사진으로, 사진 속 인물들이 내앞마을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다.

   양반들의 변화, 독립운동의 시작
   
   1900년 이전의 의병 활동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그러나 남긴 유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안동 유림들은 실패한 의병 활동에서 교훈을 얻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07년 내앞마을에 협동학교라는 신학교가 들어섰다. 교사와 학생들은 짧게 머리를 깎아 변발(辯髮)을 했다. 학교에서는 서양 학문인 수학과 물리, 상업까지도 가르쳤다. 초대 교장은 ‘큰 종가’라고 불리는 내앞마을의 청계 종가의 종손 김병식(金秉植·건국훈장 애족장)이 맡았다. 앞장서서 학교를 세운 인물 중에는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된 일송 김동삼(金東三·건국훈장 대통령장)도 있었다.
   
   “가장 보수적인 곳에서 혁신적인 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급변하는 위기의 시기에 지식인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유림이 조선 왕조를 멸망시킨 장본인처럼 여기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일부, 그것도 서울 중심으로만 관찰한 결과일 뿐이다. 지방 유림들은 스스로 길을 열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두고 안동에서 ‘혁신유림’이 나타났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특이할 만한 것은 혁신유림에는 이전에 보수적인 유림의 대표 인물이었던 석주 이상룡(李相龍·건국훈장 독립장), 김대락 같은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처음부터 김대락과 뜻을 함께한 인물이다.
   
   안동에는 한일병합 이후 24일간 단식하다 순국한 향산 이만도(李晩燾·건국훈장 독립장)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뜻을 표한 선비들도 있었다. 반면 김대락과 이상룡은 일찍부터 무장투쟁론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일제에 제대로 맞서기 위해서는 일제의 영향이 없는 곳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훈련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들로서는 변화한 시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만주 서간도 지역은 독립운동 초기 신민회를 비롯한 많은 조직과 단체들이 눈여겨보던 곳이었다. 육로로 닿을 수 있지만 국경에서 멀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내앞마을 사람들은 서간도 지역이 한민족이 발흥한 옛 고구려 땅이라는 점도 함께 고려했다.
   
▲ 내앞마을 협동학교 교직원

   건국훈장 받은 김대락의 7남매와 자손들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김대락의 옛 집은 현재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백하 김대락의 옛 집, 즉 백하구려(白下舊廬)라는 이름이 붙은 이 집에는 지금 김대락의 종증손자인 김시중이 살고 있다. 마당에 접해 있는 낡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을 둘러가며 붙어 있는 훈장들이 보인다. 김대락부터 김대락의 7남매와 그 자손들이 받은 건국훈장이다.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 김락(金洛·건국훈장 애족장), 김대락의 조카 김만식(金萬植·건국훈장 애족장), 김정식(金政植·건국훈장 애족장), 김규식(金圭植·건국훈장 애국장), 종손자 김성로(金成魯·건국훈장 애국장)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김시중의 집에는 요즘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각 방송사며 신문사에서 앞다퉈 그에게서 조상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려 오기 때문이다. 25년 전부터 묻혀 있던 조상들의 업적을 발굴해내고 손수 서훈 신청을 했던 그로서는 만감이 교차할 만하다.
   
   “어릴 적에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독립운동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시내에서 얻어온 술지게미에다가 사카린을 섞어 먹고는 온 가족이 취해 있었던 일도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김만식은 큰아버지인 김대락을 따라 만주에 가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김만식의 활동 범위는 매우 넓었다. 서간도와 안동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0년 겨울 모두가 서간도로 떠나기 전 김만식 할아버지와 일송 김동삼 할아버지가 사전 답사를 했다고 한다. 그곳으로 가려면 어떤 길을 통해서 어디에서 며칠 머물러야 하는지, 서간도 어디가 살 만한 땅인지 보는 것도 모두 할아버지들의 몫이었다. 서간도로 이주한 이후에도 만식 할아버지는 안동을 오가며 연락책·모금책 노릇을 했다. 볍씨를 가져와 서간도에서 논농사가 가능하게 한 것도 만식 할아버지의 역할이었다. 안동에 남은 일가들의 도움을 받아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내앞마을 사람들이 서간도로 이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러 자료에 비춰봤을 때 150명 이상, 내앞마을 대부분의 인구가 3차례에 걸쳐 떠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겨울 발을 떼기도 힘든 추위 속으로 떠난 일행 중에는 만삭의 산모도 있었다.
   
   “가족들의 동행은, 흔히 생각하기 쉽듯 비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두 사람의 리더십만으로 이주를 했다면 그 많은 일가친척이 다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을 남긴 독립운동가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만주로의 망명이 ‘옳은 일을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강윤정 학예연구부장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가 ‘위모사’라는 가사다. 김대락의 조카며느리뻘인 이호성이라는 여성이 쓴 ‘위모사’는 서간도로 이주하던 무렵 어머니가 자신에게 걱정과 격려가 담긴 글 ‘송교행’을 지어준 데에 대한 답가다. 150명 일가 중 한 명이었을 뿐인 그의 가사에도 독립운동의 비장함이 묻어나 있다.
   
   이호성은 서간도로 이주하는 이유에 대해 “불쌍하다 우리 동포 살아날 길 전혀 없고” “하물며 서간도로 단군이 기거하신/우리나라 옛터이라”라고 읊었다. 이주하는 길에 본 비참한 일제강점기 풍경에 대해 “굶는 것은 우리 백성 죽는 것은 우리 동포”라고 고발했고 결국에는 “멀리 있는 친구들아/내 입만 쳐다보소 독립연회 개설해서/일장연설 하오리라”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 김형식(가운데) 회갑기념

   일상적으로 이뤄진 독립운동
   
   서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실패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문제는 이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김대락은 서간도로 이주하면서부터 3년간의 일을 날짜별로 소상히 기록한 ‘백하일기’를 남겼다. ‘백하일기’는 독립운동 초창기의 거의 유일한 일기체 기록이다. ‘백하일기’에 보면 서간도에 정착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먹을 것이 없었다.
   
   “대체로 늙어 쓸모없는 사람이 식욕은 극심하다더니 밉살맞다. 낮에 또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 왔다.”(1912년 5월 10일)
   
   늪지대로 이뤄진 서간도에서는 도무지 논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기록에 따르면 3년 동안이나 논농사에 실패했다가 겨우 성공했다고 한다. 그 사이 내앞마을 사람들은 물론 서간도에 모여든 나라 잃은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다. 실제로 아사(餓死)한 인구가 무척 많았고 모여 살기를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된 사람도 더러 있었다.
   
   만주인들의 텃세도 문제였다. 갑자기 몰려든 한인들로 서간도가 붐비자 만주인들은 집값을 올려 받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땅 천석을 팔아 떠났다던 김대락마저도 방 한 칸 얻지 못할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여러 사람들이 방을 얻지 못하여 그대로 묵고… 어떤 집에 나누어 자고 어떤 이는 빈터에서 노숙을 하니….”(1912년 3월 12일)
   
   서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을 보면 실제로 독립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서울의 3·1운동 영향을 받은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나 1920년 북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청산리·봉오동 전투 같은 무장투쟁은 끊임없이 진행된 ‘독립운동’의 결과물들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처음 김동삼이 참여하고, 1923년 임시정부의 뒤를 이으려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김동삼이 의장을 맡고 김대락의 차남 김형식이 참여했던 것 역시 수많은 활동의 산물이다.
   
   독립운동은 더 일상적이고 근본적으로 이뤄졌다. 배우고 훈련하려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실질적인 저항 활동만큼이나 신경을 썼던 부분이 터를 잡는 것이었다. 그들은 몇 년에 걸친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논농사를 성공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흩어졌던 한인들이 논농사의 성공으로 인해 모여살게 되자 행정조직도 구성될 수 있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1919년 세워진 ‘한족회’는 한인 자치조직이었다. 인구를 관리하고 세금을 거둬 실질적인 활동을 돕는 역할을 했다. ‘서로군정서’는 앞장서 일제에 항거하는 군 조직 역할을 했다. 서간도로 이주하고 나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세워진 학교인 ‘신흥강습소’는 내앞마을 협동학교를 서간도에 옮겨 놓은 형태였다. 내앞마을 사람과 함께 이주한 이상룡이 교장을 맡았고, 김대락의 둘째 아들 김형식이 실질적으로 학교를 이끌었다.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 신흥중학교를 거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데, 이 졸업생들이 독립군으로 자라나 1920년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빛을 볼 것 같았던 독립운동은 곧 참변에 휩싸여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만주에서 저지른 1920년 경신참변은 한인들이 거주지를 서간도에서 북간도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일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점점 더 숨어들면서 한인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모든 만주의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서는 수탈이 심해 먹고살기가 힘드니 만주로 건너온 생계형 이민자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각자의 차원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수확한 곡식과 벌어들인 돈, 거둔 세금과 지어낸 옷감이 모두 독립운동가의 외부 활동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의 말처럼 독립운동은 어느 한 사람의 의거(義擧)와 특정 인물들의 조직생활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한인들이 촘촘하게 이뤄낸 일상적인 역사 위에서 의지를 가지고 뜻을 꺾지 않은 사람들의 끈질김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데 서간도로 이주한 내앞마을 사람들의 발자취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0명 안팎의 내앞마을 독립유공자는 처음에는 150명, 이후에는 수백 명으로 늘어난 내앞마을 출신 망명 자손들의 삶을 대표한다.
   
▲ 내앞마을에 있는 일송 김동삼 생가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실패와 좌절의 독립운동사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은 내앞마을 출신으로 손꼽히는 독립운동가다. 김동삼의 업적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10월 김동삼이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소속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때의 언론보도만 봐도 그가 독립운동가 집단에 매우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조선 독립운동의 거두(巨頭)로 수십 년간 남북만(南北滿) 각지에서 활동하던 김동삼씨는 본월 12일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엄중한 취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고 쓰여 있다.
   
   김동삼이 독립운동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끝까지 독립운동 조직의 통합을 열망했다는 점이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은 김동삼이 계속해서 기득권을 버리고 주류집단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통합 조직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독립운동가 고 이강훈(2003년 작고) 역시 “만주 한인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로 비난받지 않는 지도자가 드문데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뜻을 같이하고 김동삼의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김형식은 김동삼이 바라던 조국에서 살지 못했다. 그는 김대락의 둘째 아들로 초창기에는 상하이와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후반기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북간도에 개척한 취원창 마을에서 김형식은 민족학교를 열고 조선의용군으로 알려진 독립동맹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비관적인 미래를 그린 것과는 별개로 독립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광복 직후 독립운동가들은 서둘러 만주생활을 접고 귀국길에 올랐다. 김형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장면인데 월송(김형식)의 아들 이름이 진로였다. 나와 한 살 차이가 났는데 광복 후에 진로와 진로 어매(어머니의 경상도 방언)가 먼저 내앞으로 왔었다. 하루는 진로와 어울려 놀고 있는데 집안 어른들이 불러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이 진로더러 옷 갖춰 입고 아버지 계신 곳으로 가라 해서 진로와 진로 어매를 멀리 보냈었다. 그리고 그게 그들을 본 마지막이었다.”
   
   김형식의 종손자인 김시중의 말에 따르면 김형식은 광복 후 가족들을 먼저 내앞마을에 귀국시켜 놓고 신의주에서 서울 가는 기차표를 끊고 귀성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장차 북한의 초대 국가수반으로 추대되는 김두봉의 초청으로 평양에 잠시 내렸고 이후 평양에 정착했다. 김형식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연석회의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평양에 정착할 모양이었으면 가족을 먼저 안동으로 내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김시중의 설명이다.
   
   김형식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될 무렵 금강산에 있었는데 전쟁에 비관하여 비룡폭포에 투신해 숨졌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다. 왜 투신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시중의 강력한 증언이 있다.
   
   “6·25전쟁 전에 김일성이 7~8명의 핵심 인물들을 모아놓고 남침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는데 월송 혼자서 반대했다고 들었다. ‘이러려고 독립운동 했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에 김일성의 노여움을 사서 금강산으로 유배되다시피 쫓겨났다는 얘기다. 그러다 김일성이 월송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월송은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 곧바로 비룡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다만 김형식의 셋째 사위인 이태형이 쓴 ‘김형식 약전’에 따르면 김형식은 퇴직 이후에 금강산에서 살다가 전쟁의 화마 속에서 미군으로부터 화를 입을까봐 자진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김형식은 김동삼과 함께 꿈꿨던 온전히 독립한 조국을 목격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의 자손들은 조상들의 독립운동을 미처 다 기리지도 못하고 잊어버린 채로 살게 됐다.
   
   
   할아버지가 되찾아 할머니가 지킨 땅
   
   독립유공자 자손의 어려운 삶은 잘 알려져 있는 바다. 김대락의 막내 조카인 김규식과 아들 김성로는 부자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김성로는 청산리대첩에서 목숨을 잃었고 김규식은 194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실종됐다.
   
   “두 분 다 1990년대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는데 막상 훈장을 받을 직계 자손이 없었다. 알음알음 겨우 찾아낸 김규식·김성로 부자의 자손은 말 그대로 만주에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 거지였다.”
   
   대개 남성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서 목숨을 잃곤 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집안을 지탱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김시명의 증조부 김필락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증조모, 조모 모두에게 독립운동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트라우마였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총탄에 스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 이후로도 집요한 괴롭힘을 당했는데 어떻게 독립운동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김시명의 집안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김필락의 손자며느리, 김시명의 모친인 류점칠이었다. 그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서 생계를 이어갈 어른 남자 하나 없는 집안을 건사했다.
   
   “당시만 해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성이 드물었는데 어매는 특별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어매는 평생을 오로지 자식들의 교육에 매달렸다. 다섯 남매 중 네 명을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셋을 대학에 보냈다. 밥 한끼 먹기 힘들었던 집에서 좀처럼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류점칠은 자식들을 먹여살리려 자갈밭을 손수 매 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뙤약볕에만 나가 있어 피부는 늘 까무잡잡했다. 김갑진은 “나중에야 어매 원래 피부색이 하얗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잠 한숨 편히 못 자고 밥 한끼 마음 놓고 먹지 못하며 삼십 년을 고생한 끝에 남의 집 담벼락에서 시작한 흙집은 직접 나무를 베어 지은 세 칸짜리 그럴듯한 집으로 커졌다. 다섯 남매는 모두 가정을 이뤄 독립했다. 모두 둘 이상 자식을 낳아 류점칠의 곁을 북적거리게 만들었다. 더러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손들은 이름 석 자만 겨우 남기고 독립운동에 몸 바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공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1873년 경북 안동 내앞마을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오대마을에서 일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은 김필락은 나의 고조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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