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일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안정게이트 앞.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이들이 붙인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2월 1일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안정게이트 앞.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이들이 붙인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북침전쟁 연습중단 미군 철거!”

“북·미 평화협정 체결 이행하라!”

지난 2월 1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있는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스(K-6) 기지의 안정게이트. 기지로 들어가는 차량이 출입하는 정문 오른쪽에 검은색 롱패딩 점퍼를 입은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팻말에는 “미군 철거, 모든 미군 철거!” 등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팻말 아래쪽에는 ‘민중민주당’이라는 글귀도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차로 옆에 선 그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덮어쓰고 있었다.

기자가 다가가 취재를 요청하자 팻말을 든 남성은 “인터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그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 왔냐”고 묻자 그는 “주변 지역에서 왔다”고 답했다. 그는 길 건너편에 있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 시위할 때는 없었는데 우리가 시작하니까 나중에 왔다”고 말했다. 그를 포함한 민중민주당 관계자들은 지난 1월 1일부터 이곳에 몰려들어 ‘싱가포르 선언 이행’ ‘미군기지 철거’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가리킨 도로 건너편에는 60대 안팎으로 보이는 남성 2명이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붙어 있는 깃발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깃발에 달린 태극기는 성조기의 4분의 1 정도 크기로 작았다. 이 중 자신을 교육자라고 밝힌 김모씨는 “미국은 우리랑 항상 환상의 팀워크를 맞춰온 나라”라며 “역사를 보면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 특히 중국은 우리를 항상 침략하고 호시탐탐 노려왔다”고 말했다. 선글라스를 쓴 옆의 남성은 “미국이 전쟁도 도와주고 경제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도 공산주의에 편입돼서 지금쯤 쥐를 잡아먹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뒤 전봇대에는 검은색과 흰색 현수막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영어로 글귀가 쓰인 현수막은 ‘한국은 미군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시위대 앞으로는 의경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수시로 앞을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따금 차량을 타고 미군기지로 들어가는 미군 관계자들이 클랙슨을 울리고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김씨는 도로 건너편에서 팻말을 들고 있는 민중민주당 관계자를 가리키며 “오늘은 시위대가 한 명밖에 없지만 주말에는 10명까지 늘어나곤 한다”며 “그럴 때면 우리도 많은 인원을 데려온다”고 말했다.

새로운 주한미군의 심장

세계 최대 미 해외 군기지인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가 주한미군의 심장부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갈등이 생기고 있다. 주한미군에 적대적인 일부 세력이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치러진 미·북 정상회담 결과를 내세우며 미군 철수를 압박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맞불 집회를 하면서 갈등이 더해지는 양상이다. 지역 상인들은 이들의 갈등으로 인해 “미군에 부지를 내주고서도 아무런 반대급부를 얻지 못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캠프 험프리스는 지난해 말 대부분의 기지가 완공됐다. 지난해 6월 주한미군의 심장부인 미8군사령부가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했고, 이후 용산과 동두천의 주한미군이 순차적으로 집결했다. 기지 서쪽에는 경기 의정부에 있었던 미2사단사령부도 자리 잡고 있다. 주한미군은 이 기지를 해외 파병기지를 뜻하는 기존의 캠프(camp)에서 개리슨(garrison) 험프리스로 바꿔 소개하고 있다. 개리슨은 단순한 해외 파병기지보다 규모가 큰 대규모 군사기지를 뜻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캠프 험프리스는 미군의 해외 단일기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육군 기지이지만 군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가 있고, 기갑부대 훈련장, 차량기지 등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안정게이트를 포함해 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5곳의 게이트가 있다. 용산·동두천 기지가 평택으로 옮겨오면서 기존 약 496만㎡(150만평) 규모의 부지가 1455만㎡(440만평·여의도 5배 규모)가 넘는 크기로 확대됐고, 게이트도 기존 2곳에서 5곳으로 늘었다. 안정게이트에는 캠프 험프리스에 있는 게이트 중 유일하게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가 함께 있다.

캠프 험프리스는 군사기지이지만 철조망이 높지 않다. 차량을 타고 기지 외곽을 둘러보니 기지 안쪽으로 ‘가족 주택(family housing)’들이 보였다. 캠프 험프리스는 기지 내부에 장병들의 공간을 최대한 마련한 신도시급으로 꾸며졌다. 기지 내에 군인과 군무원들의 자녀가 다닐 수 있는 어린이집과 초·중·고등학교가 있고, 규모는 작지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워터파크도 있다.

국방부와 군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주한미군은 2만8500명 선이다. 여기에 군장병 가족까지 합치면 캠프 험프리스에 주둔할 수 있는 미군 장병과 가족을 포함한 인원은 총 4만5000여명이다. 평택은 수도권과 가깝고 지형이 평탄한 데다 항만(평택항)과 공항(오산공군기지) 시설이 인근에 갖춰져 있다. 여기에 삼남 지방으로 가기에도 편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 때문에 기존에도 미군의 중요한 전략 자산은 평택을 통해 배치돼왔다. 오산공군기지 역시 이름은 오산이지만 실제 위치는 평택 송탄동이다. 미군이 영어 발음이 어려운 평택(Pyeongtaek) 대신 오산(Osan)을 기지 이름으로 선호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텍사스주 포트블리스에 있던 미군 제1기갑사단 소속 제3전투기갑여단(일명 ‘불독’ 부대)이 평택에 있던 제3보병사단 제1기갑여단과 교체돼 순환배치됐다. 주한미군은 육군 주력으로 기갑부대를 배치하고, 포병과 항공 전력은 이 기갑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부대가 육군 주력이다. 오는 7월 순환배치되기 위해 한국을 떠날 것으로 흔히 알려진 2사단 1전투여단이 사실은 제3전투기갑여단이라는 것이 주한미군 측의 설명이다.

기존에 있던 제1기갑여단은 통상 장비를 두고 인원만 교체하는 미군의 일반적인 순환배치와 달리 지난 10월 장비를 모두 미국으로 가져가면서 주목받았다. 주한미군 측은 순환배치된 제3전투기갑여단이 새로 반입한 장비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밝히지 않았지만 군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미군이 노후된 장비를 본국으로 보내고 최신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대는 9개월 동안 한국에 주둔할 예정이고, 다른 부대와 순환배치되지 않는다면 오는 7월 장비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 흔히 오는 7월 순환배치될 경우 대체 전력이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알려진 부대가 이 부대다. 다만 이에 대해 주한미군 관계자는 “이 부대가 순환배치될 경우 대체 전력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방위비 협상과 관련한 완전한 추측”이라며 “미군은 이와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캠프 험프리스가 완공되기까지 투입된 비용은 총 12조원 안팎이다. 이 중 전체의 92%인 11조원을 한국 정부가 부담했다. 2017년 11월 한국을 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이곳을 둘러보고서는 “굉장히 놀라운 군사시설로 큰 비용이 들었다는 걸 잘 알겠다”고 감탄한 바 있다.

속타는 안정리 상인들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에 기대를 잔뜩 품었던 평택 시민들은 난데없이 몰려온 시위대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아, 이념도 좋고 사상도 좋다 이거여. 근데 쟤네가 저러고 있으니까.”

안정게이트 앞에서 만난 김정훈 팽성읍상인회장은 평택시청에서 나온 한·미협력사업단 담당 공무원들과 횡단보도 설치 지점을 의논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으로 옮겨오니까 (시위대가) 여기 와갖고 우리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며 “우리하고 상관도 없는 이념 때문에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 한 번은 저쪽 시위대가 내놓은 화분을 걷어찼다가 경찰서에 가서 조사받았다”며 “지금은 우리도 여기에 텐트 치고 ‘민중민주당 철수하라’는 집회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정게이트 차량용 게이트 오른쪽에 있는 워킹게이트로는 출입하는 미군 장병들이 끊이질 않았다.

김 회장과 안정리 상인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요즘 캠프 험프리스 측은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부대 장병들에게 안정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나갈 것을 권한다고 한다. 반미 시위를 하는 이들과의 충돌 우려 때문이다. 김 회장은 “부대에서 미군들에게 수원이나 서울로 아예 나가서 놀고 오라고 하면 우리는 기지만 주고 상권은 슬럼화되는 꼴”이라며 “친미가 문제가 아니다. 돈이 있어야 먹고사는데 시위대가 10명 오면 전경은 500명씩 온다”고 말했다. 안정리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김양규씨는 “시위 때문인지 최근에는 미군들의 발길이 줄어들어 서울 등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명소가 되도록 다른 홍보 방안을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평택시청 한·미협력사업단 한준희 주무관은 “아직은 지역 경기가 많이 침체돼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평택시는 캠프 험프리스가 완공되고 기지 내 인원이 4만명 이상으로 증가한 만큼 유일한 워킹게이트인 안정게이트 일대 상권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주민들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안정리에서 만난 평택시 한·미협력사업단 관계자는 “국방부가 있는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참고하고 있다”며 “여기에서는 시에서 건물주들에게 상가 리모델링을 지원해줄 테니 2년 동안은 임대료를 올리지 않도록 정책을 입안·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택시는 대규모 미군기지를 적극 활용해 평택을 ‘안보시’로 홍보하고 그로 인한 이익을 지역 개발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캠프 험프리스와 오산공군기지(명칭은 오산이지만 실제로는 평택에 있다) 두 곳의 면적을 합치면 총 2909만㎡(880만평)에 달하는데 이 부지의 세수가 결과적으로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A씨에 따르면, 주한미군들은 평택에서 신도시로 꼽히는 영신·동작지구에 있는 부동산을 현금으로 3억~4억원씩 일시불로 결제할 정도의 큰손이라고 한다.

평택시 관계자는 “옛날에는 미군기지가 있으면 사람들이 안 온다고 했지만 그건 옛말”이라며 “여기 근무하는 미군들에 따르면 미군들은 세계 미군기지 중에 캠프 험프리스를 최고로 친다고 한다”고 전했다. 캠프 험프리스는 야구장, 식당 등 내부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해외 파병 근무지로 미군들이 이곳을 가장 선호한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의정부와 동두천 일대에 아직 이전하지 않은 미군 기지가 여러 곳 남아 있지만 캠프 험프리스 기지 내부 시설은 거의 완공된 상태다. 기지 주변 땅값도 이미 2년 전부터 들썩였다는 것이 이 지역 공인중개사들의 설명이다. 안정리에서 약 10㎞ 떨어진 현덕면의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만난 김은숙 대표는 “미군기지 근처의 경우 2년 전 정권이 바뀔 즈음부터 해서 손바뀜이 엄청 일어났다”며 “지금은 거래가 이미 다 끝난 상황”이라고 했다. 실제로 안정리 일대에는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수십 곳 보였지만 대부분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고 ‘임대’ 글자가 붙은 사무소도 여럿이었다. 캠프 험프리스와 평택항을 잇는 새 도로가 지나는 평택국제대교는 당초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완공됐어야 했지만 지난해 여름 건립 과정에서 교각 상판이 무너지면서 개통이 연기됐다.

미·북 회담 협상대 오르나

평택 기지의 앞날에 드리운 또 다른 변수는 오는 2월 27일과 28일 베트남에서 열릴 2차 미·북 정상회담이다. 여기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주한미군 문제를 협상 카드로 쓸지 모른다는 전망이 대두되면서다. 이와 관련 지난 2월 5일 미국 CNN방송은 두 명의 국무부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이 주한미군 유지 분담금을 10억달러(약 1조1200억원) 가까운 규모로 확대하기로 하는 새로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협정(SMA)’ 협상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그러면서 “유효기간은 1년이며, 1년 더 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미국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 원하는 방위비를 받아낼 수 있는 새 협상안을 우리 정부에 압박해왔다. 미국은 지난해 9602억원이었던 한국의 분담금 액수를 크게 올리고 유효기간도 지금의 5년에서 1년으로 줄이자고 했다. 그간 국내에서는 ‘10억달러’를 주장하는 미국 측 협상안과 ‘1조원 이상은 안 된다’는 우리 측 협상안을 두고 차액이 비교적 적은 1200억원 규모인 만큼 금액을 미국에 양보하자는 의견과, 주한미군 방위비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기여하는 바가 큰 만큼 우리의 분담금 규모를 늘려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서로 충돌해왔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분담금을 매년 급격히 인상하고 이렇게 협상한 결과를 재집권에 이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트럼프는 대선 때부터 한국을 ‘방위비에 무임 승차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집권하면 “제대로 된 방위비를 받아내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새 협정이 체결되면 올해 우리 측이 부담하는 방위비는 늘어나지만 국내에 주둔하는 미 육군의 규모는 오히려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미 의회에서 제정된 ‘국방수권법’은 주한미군의 숫자를 2만2000명 밑으로는 줄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순환 근무 원칙에 따라 올 7월 한국을 떠날 예정인 제3전투기갑여단(4500명 선)을 대체할 병력이 오지 않더라도 2만2000명 하한선을 지킬 수 있다. 또 미국의 국방수권법은 올 9월에 만료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주한미군을 얼마든지 감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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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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