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충(忠)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다.”

12월 15일(음력 11월 19일)은 이순신 장군의 기일(忌日)이다. 장군은 421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민간에서는 아직도 이런저런 낭설이 떠돌고 있다. 다행히 우리는 이 시대의 걸출한 소설 덕분에 장군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진실을 직접 듣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김훈의 ‘칼의 노래’(2001)다.

“나는 정유년(1597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소설은 ‘난중일기’에서 장군이 백의종군에 나서는 대목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장군은 가끔은 과거를 오가며, 이듬해 노량해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응어리진 내면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장군은 한시도 나라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며, “몸속 깊은 곳에서 칼이 징징징 운다”고 절규한다.

그해 초봄, 전쟁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귀환하는 장군을 뭍에서 기다린 것은 의금부 도사였다. 얼마 전 조정은 어느 첩자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장군에게 먼 바다로 나가 적장을 사로잡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정보를 신뢰하지 않은 장군은 섣불리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조정은 격노하면서, 무려 5년 전 전과(戰果) 보고의 사소한 수치 착오까지 뒤늦게 문제 삼았다. 결국 그에게는 대역죄에 기만죄가 더해졌다.

임금(선조)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적장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군대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임금으로서 자신의 체통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처럼 임금·조정·종묘와 국가·백성·군대가 분리될 때 충직한 사령관은 극한적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다. 그런 비극이 장군의 몸을 포승줄로 칭칭 감은 것이다.

“의금부 도사는 심하게 길 재촉을 했고, 함거는 밤에도 이동했다. 조정은 시급히 나의 죽음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포승줄에 묶인 채 함거 위에서 흔들렸다.… 나의 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생애에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명한 끝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귀 기울이면, 사각 사각 사각,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내 적들이 노 저어 다가오는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장군은 아득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전장을 잊지 못했다.

장군은 한 차례 고문까지 받은 끝에 겨우 방면되었다. 곧바로 남해의 전선으로 내려가, 무관(無冠)의 신분으로 전황을 관찰했다. “연안은 텅 비었다. 산하뿐이었다.” 그해 여름,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괴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머지않아 조정의 선전관이 임금의 교서를 가지고 왔다. 그가 교서를 내밀 때, 장군은 그가 사약을 들고 온 의금부 도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교서는 장군을 다시 삼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못대가리 하나 건질 것 없는 텅 빈 바다와 목 잘린 시체가 썩어가는 연안을 생각했다.”

늦가을에 장군은 교서를 받들고 전장에 부임했다. 남은 배는 고작 12척이었다. 장군은 전선을 수습해 나가면서도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누명에 몸서리쳤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忠)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바랐다.”

장군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차츰 전세를 회복해 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울분과 회한으로 괴로워했다. “임진년에… (목을 벤)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보낸 것이 5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하여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장군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며 연전연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장군에게 면사첩(免死帖)을 내렸다. ‘면사’라는 두 글자와 새빨간 옥쇄 도장이 전부였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임금은 멀리서 말하고 있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그것은 오히려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전장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임에도 조정은 전선에 군수물자를 대주기는커녕 오히려 총, 종이 등 물품을 요구했다. 적에게서 노획한 총 중에 쓸 만한 것을 골라 보냈다. 또한 군사를 동원해 닥나무를 베고 종이를 만들어 보냈다. 군량미와 대나무 화살도 함께 보냈다.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명의 수군 함대 500척은 정유년 겨울이 다 가도록 강화도에 처박혀 있었다. 임금은 고관대작을 보내 명 수군 지휘부의 주색과 풍류를 뒷바라지했다. 이때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명의 육군도 일본군을 바짝 추격했으나, 일본군의 남해안 기지를 타격하지 않고 그저 대치만 하고 있었다.

마침내 명 수군 사령관 진린(陳璘)의 연락관이 도착하여 명 수군의 남하를 알렸다. 돌연 남해 전선으로 내려오는 이유를 묻자,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했다. 사연인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난 달에 죽어서 일본군이 총퇴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싸우러 오는 것이 아니라 철수하는 적의 배후에서 이익이나 챙기러 오겠다는 뜻이다.

전선에 당도한 진린은 공공연히 일본군과 내통했다. 그는 조선 수군으로부터 수급(首級)을 받았고 또한 일본군으로부터도 수급을 얻었다. 그 수급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수급으로 자신의 전공을 부풀리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다.

일본군은 철수 준비로 부산했다. 그러나 퇴각하는 적을 순순히 돌려보내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장군은 최후의 일전을 각오했다. “적은 귀로의 바다 위에서 죽음을 통과해야만 돌아갈 것이었고, 그 바다에서 적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또 한 번 뒤엉킬 것이다.… 그날 저녁에, 내 숙사 토방에 걸려 있던 면사첩을 끌어내려 불 아궁이에 던졌다.”

드디어 장군의 함대는 노량 앞바다로 향했다. 거기서 돌아가려는 적을 가로막고 맹렬히 싸웠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장군이 이렇게 돌아가시면서 소설은 황망하게 막을 내린다. 얄궂게도 바로 그날, 또 다른 전쟁영웅이자 장군의 든든한 후견인인 유성룡도 조정에서 파직된다. 전쟁이 끝나자, 어김없이 고약한 정치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칼의 노래’는 작가의 상상력이 역사적 편린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은 걸작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장군의 생생한 육성을 들으며 그의 삶은 물론, 임종까지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장군은 전선의 차가운 바다 위에서 죽기를 각오했다. 아니, 원했다. 장군은 원(願)을 이루셨건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하다. 삼가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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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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