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붕괴와 북한의 참혹한 실상 접하며 대한민국 폄하하고 사회주의 동경한 내 자신에 분노

필자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386세대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외국잡지를 통해 접하고 피가 거꾸로 솟았던 고교 3학년 시절, 대학 갈 것을 포기할 각오로 고등학생 시위를 기획하고 준비했었다. 그러나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돼 준비했던 ‘거사’는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이후 이듬해인 1981년에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캠퍼스는 청춘과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학내에 사복경찰이 상주하는 등 캠퍼스에는 1980년 광주의 잿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청춘과 낭만을 논하는 자체가 사치라고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재해석하게 하다

이렇듯 기존질서와 지배세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던 필자에게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을 재해석하게 된 ‘시각 교정서’였던 셈이다. 고교 때까지 받아왔던 반공교육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체계적 논리로 ‘승화’시켜주는 결정적 역할을 해 주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리영희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미국의 냉전의식과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보여준다. ‘8억인과의 대화’는 사회주의 대국인 중국에 대해 호감을,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부터 2005년 ‘대화’에 이르기까지 리영희의 저서들은 냉전시대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국전쟁과 분단에 대한 주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당시 운동권 386들은 리영희의 저서를 필독서로 여겼고 이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했다. 그리고 이는 반체제적 학생운동으로 귀결되었다. 필자 역시 그런 젊은이들 중의 하나였고, 적(전두환 정권)의 적(공산주의)은 친구라고 사회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대학을 떠난 후 필자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직업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80년대 후반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 노회찬(전 민노당 국회의원), 조승수(현 국회의원), 송영길(현 인천시장) 등과 함께 지하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사회주의를 지향했으며,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을 생활화하였다.

또한 1990년대 들어서는 노회찬, 조승수, 주대환(현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이용선(현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등과 더불어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는 사회주의혁명의 전위조직(前衛組織)이었고 필자는 울산지역 책임자였다.

사회주의 포기 선언

그러나 언제부턴가 기존의 신념과 믿음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급기야 1992년 사회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사상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소련·동유럽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내 스스로가 세계의 흐름을 역행한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둘째는 한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운동권의 아전인수식 전망이었다. 운동권은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미·일 자본주의 독점자본에 대한 예속·종속이 심화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그러나 울산에서 확인했던 실상들은 정반대였다. 노동자들의 삶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한국 경제는 미·일에 예속되기보다는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셋째는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었다. 물론 필자는 당시 PD(민중민주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계열로 NL(민족해방주의·김일성주체사상)계열, 이른바 주사파에 대해 비판적이긴 했지만,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접하고는 대한민국을 폄하하고 사회주의를 동경했던 자신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담아 필자는 1992년 ‘고백’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을 발표하고 사회주의 포기 선언을 하였다. 당시 운동권으로부터 배신자, 변절자와 같은 비난을 수없이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품 안으로 들어온 그때의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은 필자가 청년 시절 사회주의자로 살아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필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동시대인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군홧발로 짓밟은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기존체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결국 부정하게 되는 리영희의 논리를 여과 없이 쫙쫙 빨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또 다른 편향과 불행을 잉태하였다. 과거 냉전시대의 유물인 지나친 반공주의가 오른쪽 한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면, 리영희의 시각은 왼쪽 한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외눈박이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구는 체제를 초월한다

리영희의 저서들을 보면 사회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미국을 비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예로 중국은 1976년 탕산대지진 당시 도시인구 절반이 죽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이성적으로 질서 있게 행동하는 인간애를 발휘했지만, 몇 달 뒤 미국 뉴욕에서 12시간의 정전사태가 발생하자 약탈과 방화 등으로 도시 전체가 무법천지가 되었다면서, 자본주의 미국에 대한 사회주의 중국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인간의 탐욕과 욕구는 체제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에 근거한 논리전개였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욕구는 체제와 무관하다. 물욕이 제어되는 사회체제의 건설(사유재산에 대한 부정)은 실현 불가능한 허구일 뿐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활동의 중요한 동기로 바라보는 시장경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다.

필자가 사회주의운동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인간의 욕구는 체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욕을 억제하고 혁명적 동지애를 발휘하는 사회주의 인간형이 되자는 굳센 조직적 결의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자기실현 욕구, 경쟁심, 소영웅주의 등으로 조직 구성원들 사이의 불화가 나타나곤 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욕구는 체제를 초월하고 동서고금을 벗어나는 인간의 한 본성일 뿐이다. 리영희 교수도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와 유사한 성찰과 고백을 하였으나, 그의 한반도정치 및 국제정치관은 별로 변화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가 386세대에게 미친 가장 부정적인 영향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출현한 150여 신생국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가장 찬란한 성취를 이룬 대한민국을 부정적 시각으로 깎아내렸다는 점일 것이다.

리영희는 말년에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며 상호 견제를 통한 균형적 세계관을 강조하는 듯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조국에 대해 왼쪽 눈으로만 인식하는 오류와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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