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터키 총리 ⓒphoto 연합
에르도안 터키 총리 ⓒphoto 연합

“도둑놈들!” “아버지와 아들은 진실을 말하라!” 성난 터키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피켓을 든 시민들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0·정의개발당)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지난 2월 25일 터키의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 안탈리아 등 터키 10여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하나의 동영상으로부터 촉발됐다.

지난 2월 24일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하람자델레르(Haramzadeler)’란 계정으로 의문의 음성파일이 올라왔다. 하람자델레르는 ‘(종교적 금기를 어긴) 죄인들’ 또는 ‘도둑의 아들’을 의미하는 터키어다. “집안에 둔 돈을 모두 챙겨서 외부의 예정된 곳으로 옮겨라. 삼촌과 고모부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전하고.” 파일은 에르도안 총리와 그의 아들 빌랄 에르도안의 통화를 감청한 것이었다. 통화가 이뤄진 날은 지난해 12월 17일 에르도안 총리의 최측근들을 대상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이 있던 날이었다.

음성파일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유튜브의 하람자델레르 계정엔 수십 건의 도청 파일이 추가로 올라왔다. 그 가운데는 총리가 약속된 금액보다 적은 액수의 뇌물은 받지 말라고 직접 지시하거나, 총리의 아들 빌랄 에르도안이 쿠르트쿄이 지역의 건축 부지를 비싸게 샀다고 불만을 표시하자 총리실 산하 국유재산관리청 고위 관리가 규제를 완화해 건축물의 층고를 높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반정부 성향의 터키 매체 ‘자만’은 빌랄 에르도안이 이사로 있는 청소년교육재단이 뇌물을 수수하는 창구로 활용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파일도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녹취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현직 총리가 자신의 아들에게 사전 정보를 주고 현금 10억달러(약 1조680억원)를 빼돌리려 한 것도 모자라 여러 가지 수상한 루트로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는 얘기다. 에르도안은 터키를 경제적으로 안착시키며 대중적 인기를 누려왔다. 일부에서는 터키의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 이후 최고의 정치지도자라고 평가한다. 터키의 친서방 세속주의자들은 그를 싫어한다. 세속주의국가로 터키를 변신시킨 아타튀르크의 정책을 뒤엎고 이슬람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아랍권 매체인 ‘알자지라’는 이를 두고 “수백만 명이 그를 사랑하지만, 수백만 명 이상이 그를 혐오한다”고 표현한다.

길거리에서 생수를 팔던 소년이었던 에르도안 총리는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하고 3선 총리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스탄불 변두리의 산동네 카심파사의 세미-프로 축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를 지지하는 터키 시민들이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는 것은 경제 성장이다. 에르도안 총리는 2003년 총리 취임 당시 3030억달러였던 터키의 국내총생산(GDP)을 10년 새 8172억달러로 늘렸다. 터키의 EU 가입 협상도 시작했다. 터키 시민들에게 경제강국이라는 꿈을 키워줬다.

가난하고 평범했던 유년 시절과 특유의 카리스마는 그에게 대중적 인기를 안겨줬다. 2009년 다보스포럼 당시 이스라엘 시몬 페레즈 대통령과의 토론 중 “잠깐만(One moment)”이라며 토론시간을 초과해 발언을 계속 이어간 일명 ‘원 모먼트’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패러디를 무수히 양산하며 에르도안 총리를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이슬람 정치인으로 등극시켰다.

지난 2월 25일 에르도안 총리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대에 터키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2월 25일 에르도안 총리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대에 터키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photo 연합

대중의 지지가 강한 만큼 반대 세력도 컸다. 엄격한 수니파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슬람주의자라는 얘기를 일각으로부터 듣는다. 1996~1997년 터키 총리를 지낸 이슬람정당 네크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의 추종자였던 에르도안은 1999년 “이슬람 사원은 우리의 병영이며 신도는 우리의 병사”라는 시를 집회에서 암송해 국민 선동 혐의로 4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총리로 선출된 후에도 여성 히잡 착용,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 및 주류판매 규제 등 강력한 이슬람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일부 시민들의 격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전국적으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그가 재개발이 예정된 이스탄불 게지공원에 오스만제국 당시의 포병부대 및 이슬람사원을 짓겠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이슬람주의를 강화하는 그의 통치 방식은 그에게 ‘독재자’라는 별명을 안겨줬다. 2월 초 인터넷 콘텐츠의 유해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해 접속을 차단할 수 있도록 하는 인터넷 통제 강화법을 억지로 통과시키며 국내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3월 총선을 앞두고 4선을 위해 무리하게 당규를 바꾸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독재 논란에 불을 지폈다.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터진 음성파일 스캔들은 반(反)에르도안 총리 운동에 기름을 끼얹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음성파일이 공개되자마자 총리실을 통해 “통화 내용은 날조된 것”이라며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는 “이번 사건의 배후에 페툴라 귤렌(Fethullah Gulen)이 있다”며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다. 귤렌은 터키 출신 사회운동가로 한때 에르도안의 지지자에서 숙적으로 돌아선 인물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대로 무너질까. 총리의 낙마를 점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단 비리 파문이 생각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피타르 트렘블라이는 “집권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에르도안 총리가 이슬람 공동체를 위해 부유한 기업가로부터 선의의 돈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도둑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녹취록 스캔들을 소극적으로 보도하는 친정부적인 터키 주류 언론들도 여기에 한몫한다.

에르도안 총리와 정의개발당에 대한 지지율은 여전히 높다. 메트로폴 전략 사회 리서치센터가 2월 19~23일 터키인을 상대로 진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3.5%가 총리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2007년의 73.7%에 비하면 많이 하락한 수치지만 같은 조사에서 27.6%에 그친 제2야당 지지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이다. 에르도안 총리에 대한 지지율 하락이 야당 지지율 상승으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이번 일로 집권당의 실각을 예상하긴 어렵다는 게 대체적 전망이다.

에르도안 총리는 오는 8월 대통령으로 말을 갈아탈 예정이었다. 소속 정의개발당의 당헌은 당 대표의 4연임을 금지하고 있다. 현 대통령인 압둘라 귤(64)이 총리가 되고, 에르도안 총리가 대통령이 된다는 구상이었다. 터키는 내각책임제 국가로 총리가 국정운영을 책임진다. 귤 대통령은 에르도안 총리의 정치적 동반자로 2001년 에르도안과 함께 정의개발당을 창당했다. 에르도안은 개헌을 통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물론 이는 음성파일 사건이 터지기 전의 일이다. 정치분석가들은 3월 30일 치르는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어마어마한 차이로 승리하지 않는 이상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되긴 힘들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에르도안이 비리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제3의 인물도 떠오르고 있다. 정치적으로 깨끗한 평판을 유지하고 있는 알리 바바칸 부총리다. 지난해 여름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 당시 경찰을 투입, 진압을 지휘한 그가 유력한 총리 후보로 언급되면서 터키 정계는 급변하고 있다. 영미권의 외교가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김경민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