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지난해 12월 1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서울 □□초등학교 학교폭력 진상조사 촉구”라는 청원글이 게재됐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6학년 남학생이 유서 같은 편지를 품고 아파트 8층에서 투신한 서울 성동구 □□초등학교 사건에 관련한 글이었다. 커뮤니티 등을 통해 피해학생의 부모가 쓴 장문의 글을 읽은 학부모들은 “남 일 같지 않다”며 분노했고, 청원글로 몰려가 대거 서명했다.

그러나 다음 날 해당 글이 삭제됐다. 12월 20일 “□□초 투신 청원 글 삭제” “아까 글이 삭제돼서 재청원합니다” 등 비슷한 글이 줄지어 올라왔지만 전부 삭제됐다. 이 사안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다 12월 29일 “□□초등학교 투신 진실을 밝혀주세요”가 올라왔지만 열흘이 지난 청원 글은 힘을 잃었다. 1월 3일 현재 서명 수는 단 5명. 삭제된 최초의 청원 글의 청원인원이 1만여명이 넘은 것과 대조적이다. 학부모들은 분노했다. 성동구에 사는 학부모 임모씨는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동의 댓글이 많은 원글은 지우지 않는 것이 관례다. 임의로 삭제했다면 삭제의 이유라도 명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관리 규정이 허술해 운영 역량 개발이 절실해 보인다.”

국민청원 열풍이 불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신설된 ‘국민청원 및 제안’ 코너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해 8월 17일 신설됐다. 1월 3일 현재까지 올라온 청원글은 총 7만4647개. 하루 평균 537개, 시간당 22개의 글이 올라온 셈이다. 이제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려!”라는 반응이 흔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청와대에 직접 호소를 할 수 있고, 누구나 그 글을 읽고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국민 신문고 시대’라 할 만하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이 코너의 기치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동의한 청원 글에 대해서는 정부가 직접 답을 한다는 원칙이다. 이제까지 소년법 개정, 낙태죄 폐지, 조두순 출소 반대, 주취감형 폐지 등 4건에 대해 청와대가 답을 내놨고, 이국종 아주대 교수로 인해 알려진 권역외상센터 지원, 전안법(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 폐지요구 등 2건은 답변 대기 상태다.

국민청원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인 미디어 시대,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실”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같은 기준으로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위배된다”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국회 홈페이지와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 등에 엇비슷한 코너가 마련돼 있지만, 청와대 국민청원 신설 이후 기존 게시판의 존재감이 약해지면서 ‘기승전청(와대)’이라는 말도 공공연하다.

현실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청원자와 서명자 모두의 익명이 보장되고, 중복 동의가 가능하며, 필터링 기능이 없고, 엇비슷한 청원 글이 반복적으로 올라와도 묶음 기능이 없으며, 청원 글 삭제 원칙의 모호함 등 미숙한 운영으로 인해 도입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국민적 관심과 영향력에 비해 게시판 운영에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청와대 게시판인지, 일반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청원글 중에도 게시판 운영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꽤 보인다. 중복 동의 문제, 필터링 문제를 개선해달라는 제안이 가장 많다. 청원 실명제 내지 청원자 성별 공개를 요청하는 글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개정 부탁드립니다”라는 국민청원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 게시판의 허점을 악용해 악의적인 청원 글이 난무하고 왜곡된 여론몰이를 합니다. 청원 인원이 중복으로 포장되면서 청원 게시판의 의미와 본질이 점점 흔들리고 있습니다.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이 많지만 일부의 악의적 조작으로 인해 본 의미가 퇴색하고 있습니다.”

중복 동의 금지, 삭제 기준 분명히 해야

중간 심의 없는 게시판은 양면성을 지녔다. 직접 소통의 장으로서 영향력이 크지만, 이를 악용하는 이들로 인한 혼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국민청원 기준에 맞지 않는 별별 청원글이 난무한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김정숙 여사, 서훈 국정원장, 강호동, 임종석, 노무현, 홍준표의 혀 내미는 사진을 보세요”라는 글이 버젓이 ‘청원진행 중’인가 하면, 걸그룹 아이오아이의 재결합, ‘MAMA(엠넷아시안뮤직어워드)’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도 있다. 아이돌그룹 관련 청원 글에는 외국인들의 서명이 다수 눈에 띄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국민청원’이라는 취지가 무색하다. 거스 히딩크 감독을 국가대표 축구감독으로 선임해달라는 청원글, 데이트 비용을 지원해달라는 글, 대통령이 예쁜 여성 연예인과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는 글도 있다.

‘군대 내 위안부 재창설’을 요구하는 어이없는 청원글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16일 “군인이 거의 무보수로 2년의 의무를 이행하니 군인을 달래주고자 군내 위안부를 도입하자”는 글이 올라온 것. 이 글로 인해 청원게시판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서명란은 여혐 대 남혐이 대립하면서 성별 전쟁터로 변질됐다. 이 글을 청원한 자를 찾아내 처벌해달라는 청원도 올라왔다. “청와대에 성매매 포주가 되어달라는 것과 다름없고 생존해계신 위안부 할머님들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해당 청원자를 처벌해달라는 청원글에 무려 7만여명이 청원했다. 이 청원은 또 다른 문제를 부각시켰다. 서명란은 동의파와 반대파의 격전지가 됐지만, 이 두 목소리 모두 ‘동의 수’에 포함됐다. ‘반대합니다’ 서명란이 별도로 없는 탓이다. 이에 동의란에 ‘동의’뿐 아니라 ‘반대’ 서명도 나란히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음은 삭제 기준에 대한 문제다. 기사 상단에서 언급한 사례로 돌아가 보자. □□초등학교 학교폭력 관련 글은 도대체 왜 줄줄이 삭제된 것일까? ‘군대 내 위안부 재창설’ 요구 글은 버젓이 살려뒀으면서(문제가 커지자 한참 후에야 삭제했다) 학교폭력 가해자를 엄벌해달라는 청원글은 왜 죄다 즉각적으로 삭제했을까? 청원 요건에 위배된 것일까?

청와대 게시판에 적시된 ‘국민청원 요건’은 다음과 같다. △욕설 및 비속어를 사용한 청원은 삭제될 수 있음 △폭력적 선정적인 내용은 삭제될 수 있음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을 담은 청원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음 △동일 이용자에 의해 동일한 내용으로 중복 게시된 청원은 최초 1개 청원만 남기고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음 △한 번 작성된 청원은 삭제 불가능 △허위사실이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포함된 청원은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음.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지난해 12월 6일 조두순 출소 반대 국민청원에 공식 답변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지난해 12월 6일 조두순 출소 반대 국민청원에 공식 답변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똑같은 청원글 150여개

□□초 청원글은 어느 요건에 위배됐을까? 삭제된 청원 글의 내용을 조목조목 살펴봐도 크게 문제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학교 관련 정보가 구체적이어서 이 부분이 ‘허위사실이나 타인의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만약 그런 문제로 삭제됐다면 ‘박□□ 삼성병원 특혜 검사해주세요’ ‘인천 □□□마리나호텔 비리’ 등 사안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적용했어야 했다. ‘탄저균 백신 청원’ 글도 삭제 이슈로 한동안 떠들썩했다. 청와대가 대비용 탄저균 백신을 구입했다는 보도 이후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50여개의 관련 글이 올라왔다. 탄저균 백신 구입 이유를 해명하고 5000만 국민에게도 해당 백신을 보급하라는 내용이 대부분. 하지만 청와대 측은 뚜렷한 해명 없이 관련 글 다수를 삭제했고, 지금까지 이렇다 할 답변이 없는 상태다.

엇비슷한 내용의 청원글이 중구난방으로 게시되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11월 24일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교원성과급 폐지를 강력히 요청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는 공감대가 넓은 사안이라 불과 6일 만에 5만여명이 서명하는 등 호응이 대단했다. 그러나 20만명의 벽은 넘지 못했다. 최종 서명인 수는 13만4637명.

그러나 눈을 크게 뜨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엇비슷한 청원글이 무려 150여개나 올라와 있다. ‘교원성과급 폐지’ ‘교원성과급제 폐지를 요구합니다’ ‘교원성과급제도 폐지’ ‘교원성과급제 폐지’ 등 토씨만 조금씩 다를 뿐 청원 내용은 같다. 교육의 본질을 흐리고 교사의 교육관을 흔들리게 하는 교원성과급제를 폐지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하루에 수백 개의 청원글이 쏟아지다 보니 불과 몇 분 만에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이내 묻혀버리고 만다. 자신과 똑같은 청원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청원자들은 앵무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다. 목소리가 흩어지고 힘이 분산돼버린다. “같은 내용의 청원글이 있습니다”란 알림 기능, 혹은 묶음 기능이 있다면 어땠을까? ‘교원성과급제 폐지’ 목소리는 하나로 힘을 모았을 테고,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례는 수두룩하다. 지난 1월 1일에는 ‘빠른 연생’ 관련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빠른 연생 제도’ ‘빠른 연생 법적 성인 대우’ ‘빠른 연생 폐지에 대하여’ ‘빠른 연생 개정법’ ‘빠른 연생 죄목 없는 죄인’ 등 표현만 다를 뿐 비슷한 내용의 글이 수십 개에 달한다. 비슷한 글의 존재 유무를 검색하지 않고 올린 이도 문제지만, 동의하는 입장에서도 문제다. 도대체 어느 글에 동의를 해야 할지 난감하다. 고교 졸업을 앞둔 김모군의 말이다. “내 친구들은 스무 살이라 법적으로 성인인데, 나는 빠른 연생이라 법적 성인이 아니다. 조금 더 학교를 일찍 입학했다고 이런저런 제약을 받아야 하는 게 억울하고 서럽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리려다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의 글이 있더라. 그런데 글이 너무 많아서 난감했다. 찾아다니면서 다 동의했는데, 거의 매일 똑같은 글이 올라온다. 있는지 모르고 계속 올리는 것 같다. 찾아다니면서 동의하기 지쳤다.”

중복 동의가 가능한 시스템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다. 상식적으로는 1인 1동의가 원칙이지만 네이버,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계정을 통해 동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한 사람이 네 번까지 동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쿠키를 삭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계정을 바꾸면 각 플랫폼마다 중복 동의가 가능하다. 한 커뮤니티에는 낙태죄 폐지서명 당시 서명을 종용하면서 중복동의 방법을 화면 캡처 사진과 함께 친절하게 안내하기도 했다. 해당 사이트 사용자 중에는 “9번 서명했음. 부모님 계정으로도 해야지”라고 버젓이 자랑한 이도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20만명 서명을 ‘국민 20만명의 동의’라고 볼 수 없다. 15만명 동의인지, 10만명 동의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적은 인원의 동의인지 알 길이 없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의견이 과도하게 반영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하는 부분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백악관의 ‘위더피플(We the people)’을 벤치마킹해서 탄생했다. 둘은 비슷한 듯 다른 점이 많다. 20만명의 동의를 얻어야 공식 답변을 내놓는 청와대와 달리, 백악관은 10만명 이상이 기준이다. 겉으로 보기에 백악관의 문턱이 낮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백악관의 경우 홈페이지에 가입해야 청원과 동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1인 1동의 원칙이 지켜진다. 홈페이지 가입 없이 누구나 청원글을 익명으로 올릴 수도 있고,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과 다르다. 국민청원의 용이한 접근성은 말하자면 양날의 칼이다. ‘누구나 쉽게’ 터놓고 말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무나 쉽게’ 익명성 뒤에 숨어서 함부로 말할 수도 있다.

일부 의견 과도하게 반영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운영 4개월여, 명과 암이 공존한다.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는 존중되어야 하고, 국민 다수의 목소리는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 맞다. 원칙과 방향성 면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아름다운 제도가 빛을 발하려면 제대로 운영돼야 한다. 그러나 운영상의 문제로 애초의 취지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취지에 맞지 않는 글이 난무하고, 뚜렷한 이유 없이 삭제되는 글이 속출하며, 일부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반영되면서 왜곡되고 있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커뮤니티 자유게시판과 달라야 한다. 취향이나 성향, 이념 공동체인 커뮤니티와는 달리 서로 다른 목소리를 지닌 이들이 한곳에 모이는 광장이다. 광장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납득할 만한 규율이 있어야 한다. 효율성과 공정성이 절실하다. 엇비슷한 글들이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하고, 1인 1동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국민의 목소리가 치우침 없이 존중될 수 있는 시스템 정비가 우선이다.

김민희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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