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현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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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9일 찾아간 양인석(41)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열유체표준센터장의 연구실 책장엔 책 ‘코스모스’가 꽂혀 있었다. ‘코스모스’는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부동의 과학 베스트셀러. 양 박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온도 측정 분야 연구자다. 나는 양 박사의 책꽂이에 ‘그 책’이 있나 휘 둘러보았다.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책은 ‘온도계의 철학’. 장하석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과학사·과학철학)는 이 책에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온도계들이 진짜 온도를 틀리지 않게 말해준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독자에게 던진다. 양인석 박사를 취재하러 가면서도 “온도 기준이 정확지 않더라”는 장하석 교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양 박사에게 장하석 책 이야기를 했더니, “아, 그 책, 가방 안에 있다. 요즘 읽고 있다. 어렵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양 박사는 내년 5월 20일 시행되는 온도 단위 재정의를 위한 마지막 장애물을 2015년 제거한 걸로 유명하다. 해결사로서의 그의 솜씨가 아니었으면 볼츠만 상수 값을 기준으로 켈빈(K) 값을 재정의하려는 국제 도량형 커뮤니티의 일정에 차질을 빚었을 게 분명하다.

“프랑스 LNE와 영국 NPL이 각각 2011년과 2013년에 볼츠만 상수 값을 측정해 내놓았다. 그런데 온도자문위원회(CCT)가 요구한 오차 범위 밖으로 두 기관의 값이 나왔다. 누가 맞고 틀리는지 알 수 없었다. KRISS에 심판이 되어 달라고 요청해왔다.”

양 박사는 카이스트 물리학과(95학번) 출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2005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들어와 온도 표준 유지 분야에서 줄곧 일했다. 양 박사가 그간 온도 분야에서 쌓은 역량과, KRISS가 쌓아온 명성이 국제적으로 민감한 이슈의 심판 역할을 맡는 데 작용했다.

볼츠만 상수 측정 장비로 프랑스와 영국은 모두 음향기체온도계를 썼다. 양 박사는 “온도 측정 방법 중에서 음향기체온도계가 가장 정확하다. 이번 볼츠만 상수를 정확히 얻는 데는 음향기체온도계가 95% 기여했다”고 말했다. 양 박사 사무실 앞 실험실에 음향기체온도계가 있다. 스테인리스강 원통 안에 장비가 들어 있고, 장비 높이는 사람 키 정도다.

“2013년 포르투갈 푼찰섬에서 온도 표준 학회 TEMPMEKO가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볼츠만 상수 값 불일치 얘기가 많이 논의됐다. 볼츠만 상수를 결정하는 관계식에는 기체의 속도와 온도 값, 몰질량 값, 아보가드로수가 들어 있다. 종전까지는 기체 속도와 온도를 정확히 재면 볼츠만 상수 값을 정확도 높게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 그 두 값 측정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연구자가 덜 신경 썼던 기체 몰질량 값에 문제가 있었다.”

사용한 기체 샘플의 몰질량 값을 얻기 위해서 온도 표준 연구는 통상 외부 전문가에게 맡겼다. 그걸 가져다 쓰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양 박사는 프랑스와 영국 표준기관 연구자로부터 2014년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실험에 사용된 아르곤 시료를 받았다.

“영국 표준기관의 아르곤 샘플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로 나왔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 표준기관 관계자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결과의 정확성을 인정받았다.” 양 박사에 따르면, 아르곤은 자연에서 세 가지 동위원소가 발견된다. 아르곤-40, 아르곤-36, 아르곤-38이다. 아르곤은 대기 중 1% 정도 존재하는데, 아르곤-40이 그 대부분이다. 영국의 아르곤 샘플의 경우, 아르곤-36 함유량이 실제보다 더 높게 측정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양 박사는 2015년 6월 독일 엘트빌레에서 열린 기본상수 워크숍에서 이같은 내용의 발표를 했고, 관련 논문은 같은 해 10월 국제측정학 분야 최고 저널인 ‘메트롤로지아’에 실렸다. 양 박사 논문은 ‘메트롤로지아’가 선정한 그해의 논문이 되었다. 양 박사는 메트롤로지아의 편집위원으로 선임되는 명예도 얻었다.

그러면 왜 국제도량형국은 온도 단위를 재정의하는가? 국제도량형국은 그동안 물을 기준으로 온도를 정의해왔다. 물의 삼중점을 켈빈온도 273.16K로 정의한다. 물의 삼중점은 물이 고체·액체·기체 상태로 공존하는 온도.(삼중점보다 0.01K 낮은 273.15K가 섭씨 0도이고 0K가 섭씨 -273.15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상태 중에 물의 삼중점이 가장 정확하고 재현성이 좋다. 한 번 만들면 몇 달이고 0.00001도도 변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다.” 이 삼중점과 켈빈온도 0도를 직선으로 연결하면 다른 온도들이 정의된다. 켈빈온도 0도는 에너지가 없는 상태. 온도는 기체 분자의 운동에너지에서 정의되기 때문에 에너지가 없으면 온도는 제로가 된다.

물의 삼중점 기준은 ‘물’이라는 물질의 특성상 불안정한 부분이 있다. 물에 포함된 원자들의 동위원소 값이 다를 수도 있는 등 정밀도가 때로 흔들렸다. 그래서 볼츠만 상수라는 자연상수를 기준으로 온도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볼츠만 상수는 기체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를 온도로 환산할 경우 나타나는 자연의 값이다.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기존에 물의 삼중점에서 얻어낸 볼츠만 상수 값 정확도 수준으로, 새로 만든 온도계가 볼츠만 상수 값을 얻어낼 수 있느냐였다. 이는 소숫점 아래 6번째 수준의 정확도 문제였다. 이를 위해 음향기체온도계를 만든 영국과 프랑스 표준기관들은, 음향기체 온도계 안에 장착된 공진구(共振球) 속 기체(아르곤) 속도를 정확히 재려 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아르곤 가스 자체에 동위원소 함량이란 불청객 변수가 숨어 있어 국제적으로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 중국이 음향기체온도계로 볼츠만 상수를 측정했다. 독일 PTB는 유전상수기체온도측정 방법으로 측정했다. 중국 NIM은 음향기체온도계 말고, 존슨잡음 온도측정법으로도 측정했다. 그 결과, 지난해 7월 볼츠만 상수 k 값은 1.380649×10-23 JK-1로 확정됐다.”

볼츠만 상수의 정확한 값을 측정해낸 장비들은 이제 온도계로 변신하게 된다. 정확한 온도를 잴 수 있는 ‘절대온도계’가 된다. 볼츠만 상수 측정기도 되고, 절대온도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이 볼츠만 상수 값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음향기체온도계를 2010년부터 개발해왔고, 지금은 측정값 정밀도를 높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갈 길이 멀다. “선진 표준기관 수준으로 절대온도 측정 정밀도를 높여서 결과를 내놓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양 박사는 “경제·무역 수준이 한국이 10등, 11등이라고 한다. 과학자로서 세계 5등 이내에 드는 연구 결과로 뒷받침해서 견인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며 “국제적으로 데이터가 별로 없는 열역학적 온도 구간을 공략해 2020년까지는 성과를 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온도 재정의

현행: “켈빈(k)은 물의 삼중점의 열역학적 온도의 1/273.16이다.”

2019년 5월 20일에 바뀌는 정의: “켈빈은 볼츠만 상수 k의 수치를 kg m2 s-2 K-1과 동일한 JK-1 단위로 나타낼 때, 1.380649×10-23으로 고정함으로써 정의된다.”

※켈빈온도 273.15k는 섭씨 0도이고, 켈빈온도 0K는 섭씨 -273.15도이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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