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간질이라고 불렸던 뇌전증(Epilepsy)은 뇌 신경세포에서 여러 이유로 과도한 전기 방출이 일어나 생기는 질환이다. 대개 뇌전증의 증상으로는 심한 경련과 발작 등 대발작 증상을 떠올리는데 사실 뇌전증의 증상은 다양하다. 손발이 저리거나 몇 초 동안 멍해지는 가벼운 증상에서부터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까지 사람마다 다양한 증상을 겪는다. 희귀한 질환으로 인식되는 뇌전증은 공식 집계된 환자 수만 해도 14만명이 넘는다.

이은정(가명)씨는 그중 한 명이다. 3년 전에 유치원 교사가 된 이씨는 5살 때부터 뇌전증을 앓았다. 20년 넘게 뇌전증 때문에 겪은 일이 많았지만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학교에서 발작했던 날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서 있다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어요.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반 친구들이 저를 둘러싸고 구경하듯이 쳐다보고 있더군요. 체육 선생님이 큰소리로 물었어요. ‘지랄병 있냐’고요. 태어나 처음으로 ‘지랄병’이라는 말을 알게 됐죠. 그날 이후로 어디를 가든 ‘쟤는 지랄병 환자래’라는 수군거림이 들렸어요. 아무도 저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따돌림도 겪었어요.”

이씨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얻고자 했던 데는 어릴 때 겪었던 상처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앞으로 가르칠 아이 중에 몸이 불편한 아이가 있더라도 자신이 겪은 것처럼 마음까지 아파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기도 전에 이씨는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았다.

“꾸준히 약을 먹고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좀처럼 발작하는 일이 없었어요. 취직하기 2년 전부터는 단 한 번도 발작하지 않았죠. 그래서 마음이 풀어졌었는지 선생님들끼리 워크숍을 갔다가 저도 모르게 제 병을 털어놓았죠. 사실은 병을 앓았었는데 거의 완치된 것 같다고. 그리고 얼마 뒤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완곡하게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죠.”

회계사 박대근(가명)씨는 재작년 5년 사귄 여자친구와 양가 부모 상견례 직전에 헤어졌다. 중학생 때부터 뇌전증이 발병한 박씨는 혼절해 발작하는 증상을 겪은 적은 없다. 한쪽 팔과 다리가 굳는 듯한 증상이 아주 짧게 나타날 뿐이다. 여자친구와 5년을 사귀며 반년 넘게 동거했지만 여자친구가 증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다. 다만 약을 먹어도 좀처럼 증상이 완화되지 않아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다.

“뇌전증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고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으니까 여자친구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병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가 이별을 고하더군요.”

헤어지느니 마느니 입씨름을 하던 도중 박씨의 여자친구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뇌전증이 있는 남자와 결혼하기 힘들다”는 말도 했다. 박씨는 “뇌전증은 유전되는 질병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며 씁쓸해했다.

대한뇌전증학회 사회위원장인 이상암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뇌전증 환자는 자신의 병을 숨기고 산다. 이 교수의 조사에서 최소 1년 이상 증상이 없는 환자의 24%만이 자신의 병을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고 응답했다. 친구들이 자신이 뇌전증 환자라는 사실을 안다고 대답한 경우도 7%에 불과했다. 왜 14만명 뇌전증 환자들은 자신의 질병을 감추면서 살까.

뇌전증은 평범한 만성질환

대한뇌전증학회 회장인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무지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뇌에 전류가 잠시 과다하게 흘러 생기는 이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일 년에 한 번 감기에 걸리더라도 며칠을 앓아 눕습니다. 그런데 뇌전증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경우 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시간은 일 년 내내 합쳐서 한 시간도 안 됩니다. 많은 뇌전증 환자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병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는 아주아주 드물죠. 뇌전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홍승봉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뇌전증에 대해 잘 모른다. 이상암 교수에 따르면 영국이나 독일 같은 유럽 국가에서 뇌전증에 대해 평균 이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80%가 넘지만 한국은 겨우 30%를 갓 넘긴 수준이다. 이 교수가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뇌전증이 유전질환’이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33%, ‘정신질환’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24%에 달했다. 각 질문에 대해 ‘모른다’고 답한 교사나 학생이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뇌전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뇌전증은 유전질환이 아니다. 정신질환도 아니고, 전염성 질환도 아니다. 신경의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완치도 가능한 난치병이다. 뇌전증 환자의 70%는 약물로 증상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홍승봉 교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보다 치료 확률이 더 높다”고 말했다. 30%의 환자가 까다로운 축에 속해 현재 개발된 약물로는 증상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 이들을 위해서는 다양한 치료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뇌수술이나 식이요법을 받으면 치료되는 환자가 대다수다.

식이요법 중에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섭취를 억제하고 지방 섭취량을 극대화하는 케톤 식이요법이 있다. 케톤 식이요법은 특히 소아뇌전증 환자에게 효과적이다. 90%의 환자가 완치 혹은 개선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다. 어린 환자들을 위해 케톤 식이요법용 특수 분유도 개발돼 있다. 문제는 이런 분유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유뿐 아니다. 뇌전증은 정부의 지원 체계에서 완전히 비켜나 있다.

정동희(가명)씨의 10살 난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뇌전증을 앓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 “이 약 저 약을 다 써봤지만 효과도 잠시, 아직까지 완전히 증상을 억제할 수 있는 약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뇌수술도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개발되는 신약도 많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치료법을 접하기는 어렵다.

뇌전증 환자들을 위한 뇌수술 중 레이저 열치료 뇌수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수술을 위해 필요한 장비의 가격이 5억원가량인데 한국에는 한 대도 없다. 뇌전증 수술을 위해 필요한 검사 중에는 뇌세포의 자기(磁氣) 변화를 기록하는 뇌자도(MEG) 검사라는 게 있다. 이 검사 장비 역시 일본에서는 50대 이상 가동 중인데 한국에는 한 대도 없어 의사가 환자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검사를 받고 오기도 한다. 홍승봉 교수는 “뇌전증은 뇌졸중과 치매 다음으로 환자 수가 많은 신경계 질환인데도 지원금이 단 한 푼도 없고 지원 정책 역시 전무하다”고 비판했다.

소아뇌전증 전문가이자 한국뇌전증협회 회장인 김흥동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는 뇌전증 환자의 가족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줄곧 목소리를 높여왔다.

“소아뇌전증의 경우 뇌전증 어린이 환자가 있는 가정은 치매 노인을 모시는 가정과 비교해도 경제적·심리적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경제적 지원도 전혀 없어 식이요법 같은 치료를 시도하고 싶어도 못 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치료를 하더라도 중산층이 차상위계층으로 전락하는 정도의 경제적인 부담을 지게 되지요. 그로 인한 우울증, 무력감 같은 심리적인 문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뇌전증 환자들은 질환 자체의 문제보다 뇌전증으로 인한 경제·사회·심리적 부담 때문에 더욱 힘들어한다. 최경애 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 협회장은 “암이나 고혈압 환자보다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병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편견 때문에 뇌전증 환자들의 심리적 문제가 더 크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지원센터 한 곳이 가져올 변화

만약 뇌전증 환자를 위한 지원체계가 마련된다면 어떻게 변할까. 뇌전증 환자를 위한 지원센터가 한 곳 생긴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뇌전증 환자를 위한 심리적 지원이 가능해진다. 외부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환자 스스로 질환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면 14만명 환자들이 건강하게 사회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원센터에서 뇌전증에 대한 맞춤 정보가 제공된다면 환자의 삶은 한층 변화할 수 있다. 뇌전증은 다른 신경계 질환에 비해서도 더 다층적인 지원이 필요한 질환이다. 다양한 증상 때문에 일률적인 정보 제공이 힘든 만큼 다양한 맞춤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박대근씨는 처음 증상이 나타난 중학생 때부터 5년 넘게 자신의 병명을 모르고 살았다. 증상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다 보니 병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만 여러 번 받았다. 그러다 한 의사로부터 뇌전증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종합병원을 찾아간 끝에 비로소 뇌전증 확진 판정을 받았다.

“뇌전증은 그저 거품 물고 쓰러지는 병으로만 알고 있다가 제가 뇌전증이라고 하니까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병이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닌지, 저 같은 사람은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나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외국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찾고 책을 읽어가며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보통 중증질환이나 치매, 알코올중독같이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질환은 각종 센터나 지역사회 복지기관에서 상담을 해주거나 지원 체계를 안내해주는 등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복지기관에서도 뇌전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홍승봉 교수는 “뇌전증을 앓는 장애인이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한 번 발작했다가 다른 시설로 옮기라고 종용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사회복지 체계 내에서도 또 사각지대에 서 있는 것이 뇌전증 환자”라고 말했다.

키워드

#의료
김효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