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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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다는 보도가 나온 지난 3월 2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남북하나재단을 찾았다. 5층 입구에 들어서자 보이는 책꽂이 맨 위에는 두툼한 책 두 권이 전시돼 있었다. 최근 재단이 출간한 ‘2017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 정착실태조사’와 ‘2017 탈북민 사회통합조사’였다. 같은 층 이사장실에서 고경빈(61)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고 이사장은 1979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해 2009년까지 통일부에서 일했다. 정책홍보본부 본부장을 끝으로 통일부에서 나온 그는 이후 평화재단 이사, 사단법인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 등을 지낸 뒤 지난해 11월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으로도 불리는 하나재단은 탈북민들이 성공적으로 국내에 정착하도록 경제적·정신적으로 돕는 것이 주 업무다.

올 4월 말 열릴 남북정상회담, 5월 이후로 예정된 미·북정상회담 등 중대 현안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2017년 탈북민 정착실태조사’를 발표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이사장은 “발표 시점이 원래 정해져 있는, 매년 하는 조사”라고 답했다. 남북하나재단은 매년 2월에 계획을 수립하고 3월 조사 준비 기간과 4월 조사원 교육 기간을 거쳐 5월경부터 약 3개월간 탈북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이후 분석·정리 과정을 거쳐 이듬해 2월이나 3월에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탈북민 정착실태조사’는 남북하나재단이 2011년부터 매년 해온 조사지만 이번 조사는 조금 특별하다. 남북하나재단이 국가 통계작성 지정기관으로 공식 지정된 뒤 처음 공표하는 통계이기 때문이다. 남북하나재단의 탈북민 정착실태 관련 통계가 국가 통계로 정식 인정받게 된 만큼 통계의 대표성과 정확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것이 고 이사장의 설명이다.

두 권으로 묶인 이번 실태조사 중 정착실태조사는 쉽게 말해 탈북민의 자립, 자활과 관련된 물리적 정착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고용률, 임금수준, 실업률 등이 이 조사를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주요 통계다. 반면 탈북민 사회통합조사는 탈북민들의 사회적 관계, 사회적 참여, 교육, 복지 등 삶의 가치와 인식을 살펴보는 문항으로 구성된다. 이번 조사를 총괄한 장인숙 선임연구원(북한학 박사)은 “최근에는 탈북민의 사회통합적 측면을 좀 더 중시하게 되면서 사회통합과 관련된 부분을 더욱 심도 있게 측정할 수 있는 문항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하나재단의 탈북민 정착실태조사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조사 중 신뢰성·타당성·대표성 측면에서 첫손에 꼽힌다. 탈북민 조사의 경우 탈북민의 신상정보 공개가 제한돼 있어 민간의 접근이 어렵다. 이 때문에 대학이나 연구소 등 민간기관에서 탈북민 관련 통계를 작성할 경우 표본 추출 과정에서 연령대·지역·성별 등 주요 특성이 고르게 분포되지 않아 특정 집단을 과도하게 대표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결과가 나오기 쉽다. 반면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의 경우 통일부를 통해 전달받은 탈북민들의 정보 중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해 조사를 하기 때문에 전체 모집단을 고르게 반영한다. 이번 조사는 전국 20여곳의 하나센터에 소속된 탈북민 전문 상담사들이 지난해 6월부터 두 달간 전국에 있는 탈북민 약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탈북민 출신 장교 1호 곧 탄생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은 총 3만1339명이다. 이 중 여성이 2만2345명으로 71%를 차지한다. 고 이사장은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탈북민 중 남성의 비중이 높았지만 이후에는 꾸준히 여성 탈북민의 비중이 높다”고 말했다.

한때 연 3000명에 육박했던 탈북민 숫자는 현재 1000여명대로 줄어든 추세다. 지난해에는 1127명이 탈북했다. 2000년대 중반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숫자다. 대량 탈북이 시작되면서 한때는 갓 탈북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하나원이 비좁고 열악할 때도 있었지만 탈북민이 줄어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고 이사장의 설명이다. 매년 늘어나던 탈북민 증가 추세가 꺾인 데에는 김정은 집권 이후 국경 검문을 강화하고 탈북을 엄하게 단속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나원에 있는 탈북민들은 이번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2017 탈북민 정착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난 탈북민들의 외형적 자립지표는 “느리긴 하지만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고 이사장의 설명이다. “대표적으로 기초생활수급률 같은 경우 10년 전에는 60%에 육박했지만 지금 24%로 떨어졌다. 고용률은 국민 평균에 근접하고 있고, 여성만 따져보면 탈북민이 오히려 높은 경우도 있다. 실업률도 아직 국민 일반 평균의 두 배지만 그래도 많이 개선됐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외형적 지표는 개선되고 있는데 내형적으로는 미흡한 점이 많다.”

실제로 ‘2017 탈북민 정착실태조사’를 보면 고용률, 임금수준 등 탈북민의 외형적 자립지표는 대부분의 측면에서 2016년에 비해 개선됐다. 경제활동 참가율은 2016년 57.9%에서 2017년 61.2%로, 고용률은 55.0%에서 56.9%로 증가했다. 근속기간 역시 2016년 23.0개월에서 25.2개월로, 월 평균 임금은 162.9만원에서 178.7만원으로 증가했다. 반면 실업률은 2016년 5.1%에서 2017년 7.0%로 증가했다. 실업률과 고용률이 동시에 상승했다는 것은 아예 취업을 포기한 비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면서 탈북민들이 취업을 위해 뛰어드는 추세가 강해졌다는 의미다. 2017년 전체 국민의 평균 실업률은 3.6%다.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최근의 특이점 중 하나는 탈북민 중 임금근로자의 비중이 줄어들고 비임금근로자의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점이다. ‘2017 탈북민 정착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민 중 비임금근로자의 비중은 2016년 12.0%에서 14.2%로 증가했다. 비임금근로자는 임금 등으로 일한 대가를 지급받는 임금근로자와 달리 자신 또는 가족의 수익을 위해 일하는 자영업자, 무급가족종사자 형태의 근로자를 말한다. 장인숙 선임연구원은 “비임금근로자가 증가한 이유를 보니 자영업자가 많아진 것이 요인이었다”며 “지난해부터 그런 추세가 보여 올해는 ‘어떻게 자영업을 하게 됐는지’ ‘준비기간은 얼마인지’ ‘얼마를 투자했는지’ 등을 묻는 자영업 관련 설문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고 이사장은 탈북민들의 자영업 증가 관련 동향에 대해 “이번에 신설된 문항이라 비교 연도가 없어 자세한 추세를 파악할 수는 없다”며 “내년 조사결과가 나와 봐야 탈북민이 자영업을 정말 선호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긴 건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영업자 증가 추세

사회통합조사에서도 새롭게 60세 이상 고령층에 대한 조사문항을 추가했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의 과반수 이상은 아직까지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준비 여부를 묻는 문항에서 조사 결과 ‘준비하지 않음’이 56.3%로 43.7%인 ‘준비함’에 비해 훨씬 높았다. 장 선임연구원은 “일반 국민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라며 “일반 국민들은 노후대책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들이 있는데 탈북민들은 아직 우리 사회에 적응하는 데도 바쁘기 때문에 노후까지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조사 결과에 드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고 이사장의 말이다.

“탈북민들이 취업하는 직종은 비숙련 노동자도 취업이 가능한 단순노무나 서비스산업 등의 분야가 많습니다. 우리 경제 전체로 봐도 서비스업이나 제조업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탈북민들도 똑같이 영향을 받는다고 보면 됩니다. 탈북민 중에서도 우리 사회에 잘 적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의사도 나오고, 변호사 준비하는 분도 있고, 심지어 군 장교도 있죠. 그야말로 하기 나름입니다.” 개인정보 문제로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육군 ROTC 출신으로 내년 봄 임관을 앞둔 탈북민이 장교가 되면 ‘탈북민 출신 1호 장교’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전언이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 고 이사장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탈북민들이 토로하는 고충 중 가족, 동창 등 사회적인 지지망 부족이 첫 번째다. “저희가 매년 조사하는 ‘삶의 만족도’ 설문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 불만족한다’는 탈북민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첫손에 꼽는 것이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일반인들은 힘들 때면 가족, 친구, 동창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민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혼자 외롭게 있으니까 따듯한 가족이 그리운 거죠. 어떤 경제적 어려움보다도 이런 정서적인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무연고자가 많다는 것도 탈북민의 특징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북민 가구 중 절반 정도가 1인 가구다. 나름대로 탈북민들끼리의 공동체를 만들고 소속감을 느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민이 대부분이다 보니 북한에 돈을 송금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례도 종종 있다. 현재 140명가량인 전체 재소자 중 3분의 1 정도가 대북 송금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수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3명 중 1명 “건강 나쁘다”

건강 측면에서도 어려움을 호소하는 탈북민의 비율이 상당하다. 탈북 과정에서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 보니 건강 상태가 나쁘다고 인식하는 비율이 30.7%다. 고 이사장은 “건강에 대한 주관적인 염려뿐 아니라 실제 질병, 그리고 탈북민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 그리고 편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주관적 생각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탈북 과정에서 거치는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난 자녀의 경우 국적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제3국에서 출생한 자녀의 경우 해당국의 추적을 피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국적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성인이 되면 한국에 들어올 수 없다. 이 경우 탈북민 여성이 중국인과 만나 자식을 낳으면 중국 국적이 된다. 성인이 되기 전 중국인 아버지와 떨어져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고 이사장은 “초·중·고 재학 중인 탈북민 학생 약 3000명 중 절반이 제3국 출생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고 이사장은 탈북민 관련 통계를 다루고 이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담당하는 기관장이지만 탈북민들을 하나의 범주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자신이 탈북민 관련 일을 하며 “항상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며 이런 말을 했다.

“탈북민 3만명의 삶에는 3만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몇 개의 범주로 묶어서 뭉뚱그리는 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어요. 통계를 제공하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럽긴 한데, 다행히 통계 결과가 일단 외형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탈북민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저희 조사 결과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북민의 경제활동 비율을 보면 그들이 가진 삶에 대한 의지가 보입니다. 실업률이 높은 것도 탈북민들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다른 체제에서 살다가 들어온 데서 발생하는 차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그걸 얼마나 스스로 의지를 갖고 극복하느냐의 차이겠죠. 저희의 정착실태조사는 탈북민들의 정착실태가 느리지만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 데이터로 증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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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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