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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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중앙회(이하 중앙회)가 개발연대의 틀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 그리고 공경(恭敬)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담은 운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1970년 4월 출범한 중앙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낙후된 한국 사회에 ‘잘살아 보자’는 희망을 설파해왔다. 2013년에는 ‘한강의 기적’을 일군 공동체 운동으로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2000년대 들어 중앙회의 존재감은 크게 위축됐다.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안주하는 바람에 시민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졌다는 평을 받았다. 요즘 2040세대는 중앙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중앙회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지난 3월 19일 취임한 정성헌(73)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 있다. ‘6·3세대’인 정 회장은 진보 진영에서 ‘원로’로 평가받는 인물. 1970년대부터 농민운동을 해왔고, 최근까지 강원도 인제의 DMZ평화생명동산을 가꾸며 평화생명운동에 앞장서왔다. 이런 진보 인사가 ‘보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조직을 이끌게 된 것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

지난 4월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소재 중앙회 집무실에서 만난 정 회장은 중앙회가 나아갈 새로운 지향점부터 강조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사라지고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 지엽말단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대대적인 생명 살리기 운동에 나설 것을 제안한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나누는 데 중앙회가 앞장선다면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시대에 가장 근본적이고 절실한 것을 해결하려는 게 바로 운동”이라면서 “근본은 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생태계 파괴를 막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된다”고 말했다. “스티븐 호킹은 죽기 전 ‘2세기 뒤 지구 온도가 460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2030년대에 한반도 중북부는 사막화가 시작된다. 통일을 해도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된다면 과연 지금의 통일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명운동이 기본이 되어야 통일운동도 성공할 수 있다.”

정 회장은 사안별로 대응하는 운동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방향성을 제시하는 운동 방식도 주창했다. “인권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포함한 모든 운동이 대척점이나 모순구조 속에서 제대로 사회를 개선해내지 못한다. 나는 공경이라는 한 차원 높은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비로소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학생이 선생을 공경하고 선생 또한 학생들을 공경으로 대하면 학생인권이나 교사인권 논란이 벌어질 이유가 없다.”

그는 한국의 운동단체나 운동가들이 가진 한계도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시민사회운동은 대국적으로 착안은 하지만 구체적 실천은 별로 없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면서 전기를 아껴 쓰자는 얘기를 하지 않고 운동가들도 절전을 실천하지 않는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정 회장은 오히려 묵묵히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진정한 운동가라고 평가했다.

정 회장은 1964년 춘천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한 그해 한·일 정상회담과 이듬해 체결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 ‘6·3세대’다. 1970년대 들어서는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이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등의 단체에서 활동한 운동권 원로다. 하지만 그는 “운동권이 사회 변화에 치중하는 바람에 민주시민 교육에 소홀했던 과거를 후회한다”고 토로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선배 운동가 중에 민주시민 교육을 소홀히 한 걸 후회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여럿 계셨다. 나 또한 전적으로 공감하는 대목이다. 사회운동 하면서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세상을 빨리 바꾸려고만 했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만 늘었다. 이들은 사회 변화에만 관심을 가졌지, 자기 변화와 자연 파괴 등의 문제를 등한시했다. 오늘날 시민사회단체는 2만개가 넘는다지만 영향력은 오히려 후퇴했다. 운동이 아닌 고소고발이 주된 업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좀 특이한 낙하산”

정 회장은 자신이 새마을운동 조직을 맡게 된 것이 정부의 이른바 낙하산 인사가 아니냐는 지적을 부인하지 않았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과거 운동권 후배들이 그에게 새마을운동중앙회의 변화를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해온 것 또한 사실이라고 했다. “주변에서 ‘좋은 일 좀 하시라’며 내게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을 권유했다. 위암 수술도 받았고 이제 나이도 많아 건강을 염려하는 가족의 반대가 있었다. 나 또한 평화생명통일운동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처지에 이렇게 큰 조직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런데 무슨 팔자 소관인지, 결국 (회장으로) 오게 됐다. 그러나 나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무 관계도 없고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벼슬을 추구한 적도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낙하산치곤 좀 특이한 낙하산이다.”

정 회장은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중앙회를 분권화할 방침이다. “방만하고 중앙집권적이며 타성에 젖은 중앙회를 유능한 조직으로 바꾸기 위해 교육혁신 방안을 마련 중이다. 중앙회장과 사무총장이 가진 권한을 분산하고 자율적 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생각이다. 또 경영난 해소를 위해 운동 정신에 맞는 수익사업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연간 100억원 남짓의 예산을 쓰는 중앙회는 지난해 20억원의 적자를 냈는데 적자의 주요 원인은 중앙회와 전국 조직을 책임지는 400여명의 직원 인건비였다고 한다.

정 회장은 회장 취임 후 특권부터 내려놓았다. 취임식도 하기 전에 회장에게 제공됐던 차량을 반납했다. 기존 회장이 새마을중앙연수원장을 겸직하며 받아온 활동비도 거의 안 받기로 했다. 한때 2500여명의 직원을 이끌었던 ‘제왕적’ 중앙회장이 사실상 무보수 상근 봉사직으로 바뀌었다. 정 회장은 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 취임했을 때도 자신에게 제공된 차량을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한 바 있다.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묵직한 선언처럼 들리는 것은 이처럼 실천적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정 회장은 여전히 재생지를 활용한 명함을 사용하고 있었다. 재생지 사용은 그의 오랜 버릇이다. 그는 낮에는 전등을 켜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창가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도 업무 보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강원도 인제의 DMZ평화생명동산은 그가 이사장을 맡은 후 전기 사용량을 40% 가까이 줄였다.

“내가 차를 사용하지 않으면 기사 인건비를 포함해 연간 5000만원 이상 절약할 수 있다. 지하철, 버스, 택시 등을 타고 사무실에 오면 된다. 외부에 나갈 땐 직원 차를 얻어타기도 한다. 한 3개월 정도 해보면 내게 필요한 최소비용이 얼마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연간 교통비는 30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허허허”

정 회장은 중앙회의 수익사업도 앞으로 운동단체의 특성을 고려해 추진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수익사업은 필요하다. 하지만 운동의 정신에 부합하는 사업을 통해 수익을 거둬야 한다. 요즘 협동조합들은 흑자 내서 출자 배당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럼 일반 기업과 다를 게 없다. 우리는 공동체가 잘되게 하는 게 운동의 핵심인 이상 가급적 시장을 성화(聖化)시킬 수 있는 사업을 하고자 한다. 음식물 찌꺼기로 지렁이 퇴비를 만들어 도시농가에 판매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33만㎡(10만평)나 되는 넓은 부지가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 회장 취임 이후 보수 진영 일각에서 “진보 인사를 중앙회에 보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지우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제기됐는데 이에 대한 정 회장의 답은 이렇다. “생명의 위기, 사회분열 위기, 정신적 위기 등이 합쳐져 너무나 큰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박정희니 김대중이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문제점이나 한계, 그리고 성과는 빨리 정리하고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대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산업화냐 민주화냐 같은 얘기는 그야말로 한가한 논쟁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190만명의 중앙회 회원 중 상당수는 지역 사회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우수한 인재”라는 평가도 했다. “지역 지도자들은 소외된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가들이다.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그 일을 실천해왔다. 자신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걸 주변에서 인정해주면 그걸로 만족하는 분들이 적어도 20만~30만명은 되는 것 같다. 중앙회가 이분들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 정말 좋은 운동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직원과 회원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간다. 기존 회장들이 제왕적 행태를 보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게 직원들의 평가다. 정 회장은 “일부 시군구 지회 소속 새마을지도자들이 ‘회장님과 편하게 식사할 수 있다는 게 영광’이라고 말해 오히려 내가 놀랐다”고도 했다.

활동비·차량 반납하고 사무실은 소등

정 회장은 취임 후 자신의 철학을 곳곳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일단 회장 사택 주변 3300㎡(1000여평) 규모의 밭에 농사와 태양광발전을 병행토록 지시했다. 중앙회 입구 쪽에는 나눔과수원을 만들어 누구나 이용 가능한 과수원을 만들 계획이다. 그동안 주민과 동떨어진 외딴섬처럼 여겨져왔던 중앙회를 시민 누구나 친근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생각이다. 정 회장은 중앙회 회원업체인 새마을금고도 이자 수익 등에 치중하기보다 제대로 된 신용협동조합이 되도록 개혁방안을 권고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뭘 지시하기보다 직원들이 논의하고 방향성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 중앙회 본부가 있는 33만㎡ 부지는 생명사회를 공부하는 열린 공간으로 바뀔 것이다. 성남시에서는 예산 지원을 하겠다는데, 지금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물론 정 회장이 이끄는 중앙회 내부의 변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이들도 없지 않다. 정 회장은 이들과 대화를 많이 할 생각이라고 했다. “밥 먹으면서 회원들과 대화를 많이 할 것이다. 난 그들을 설득하진 않을 거다. 설득은 이치에 맞을지는 몰라도 상대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자체를 존중하고 얘기를 나누면 결국 마음이 통하게 마련이다.”

그는 스스로를 비관적 낙관론자라고 했다. 진보나 보수와 같은 정파적 이해에 대해 “나는 그 수준은 넘어서 있다”고도 했다. “나는 그저 조금 더 열려 있는 사람이다. 개헌특위 자문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했을 때 노동이사제가 논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나는 경영에 노동자가 참여해야 하는 것에 꼭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비자가 참여해야 하지 않나. 소비자가 참여하면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다. 현대차 이사회에 울산 시민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연장자라서 특별히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늘 소수의견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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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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