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에 몰려 있는 병원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에 몰려 있는 병원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사람들이 드나드는 복도 앞 소파에 앉아 기다린 지 1시간이 넘었다. 박윤주씨는 어렵게 받은 평일 휴가를 병원에서 보내고 있었다. 몇 년 사이 나빠진 시력 때문에 시력교정술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변에서 말하길 수술할 거면 최소한 병원 3~4군데는 가 보고 결정하라고 하더군요. 병원 한 군데만 가 보고 수술받았던 선배는 후회한다고 했고, 여러 병원을 가 볼수록 아는 것도 많아진다고 했어요.”

박씨의 손에는 표가 그려진 수첩이 들려 있었다. ‘웨이브스캔’ ‘각막만곡도’ 같은 전문 용어가 표에 적혀 있었다. 박씨에 따르면 병원마다 안검사 기계가 다르고 측정 방법이 달라 매번 다른 수치가 나온다고 한다. 그에 따라 수술 방법이나 비용도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시력도 좋지 않고 망막 상태도 좋지 않아서 어떤 곳에서는 아예 라식·라섹 수술을 못 한다고 하더군요. 세 번째로 간 병원에서는 렌즈삽입술을 권했어요.”

벌써 네 번째 병원에 왔지만 박씨는 시력교정술을 받을지, 받는다면 어떤 수술을 받을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같은 질병을 가지고 두 군데 이상 병원을 돌아다니는 ‘의료쇼핑’은 드문 일이 아니다. 병원 간 경쟁이 치열하다고 인식되는 안과, 치과, 피부과, 성형외과는 물론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대학병원까지 환자들의 의료쇼핑은 일상적인 일이다. 만약 병원을 돌아다니지 않고 처음 들른 병원에서 끝까지 진료받는다면 오히려 ‘미련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감기 같은 가벼운 질병이 아닌 이상 웬만한 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임플란트를 해야 할 때는 치과를, 축농증 수술을 해야 할 때는 이비인후과를 고르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중증 질환일수록 의료쇼핑은 더 필요해진다.

4년 전 정기검진에서 유방암을 발견한 이경숙(가명)씨는 항암치료를 위해서 충청 지역의 대학병원 두 군데, 서울의 대학병원 두 군데에서 진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집 근처에서 치료받으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새로 검사도 해보고 의사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병원을 선택하기 전에 인터넷 카페에도 가입하고 주변에도 물어보고, 정말 많은 정보를 찾아 헤맸어요.”

전혀 다른 의료쇼핑의 경우도 있다. 김규탁씨는 재작년 가을 좀처럼 낫지 않는 두통 때문에 병원 두 곳을 찾았다. 처음 찾아간 내과에서는 위염 증상 중 하나로 두통을 꼽고 위염약을 처방해줬다. 그러나 두통은 그대로라 김씨는 이틀 뒤 다른 의원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스트레스성 두통’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환경을 만들 것을 권했다. 오랜만에 직장에 휴가를 내고 쉬던 김씨는 이틀 뒤 뇌종양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한때는 양 팔과 다리가 다 마비됐지만 꾸준히 재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오른쪽 팔다리의 감각은 돌아왔다.

“친척 어른이 속쓰림 때문에 병원을 전전하다가 나중에야 암인 줄 알았다고 하던 얘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더군요. 30분 기다려서 1분 진료받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진단받지 못했으니 의사들 믿을 것 없다는 생각만 강해졌습니다.”

실제 자신의 증상이 무엇 때문인지 제대로 진단받지 못해 병원을 전전하는 환자들도 많다. 병원 치료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다. 소모적인 ‘의료쇼핑’도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의료쇼핑은 종종 환자나 의사의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된다. 늘 건강염려증(Hypochondriasis)을 앓고 있는 예민한 환자들이 의사를 불신하기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 현상으로 간단히 설명되기도 한다. 또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몇몇 과(科)에 몰려든 의사들이 과열 경쟁을 펼쳐 병원 간 ‘제 살 깎아먹기’식 영업을 통해 발생하는 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의료쇼핑 현상은 한국 의료 보건의 핵심 문제들이 뒤엉켜 있는 심각한 난제 중 하나다.

메르스 사태를 불러온 의료쇼핑

외국에서도 의료쇼핑은 일어난다. 서울대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신동욱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20% 넘는 환자가 같은 증상으로 두 군데 이상의 병원을 찾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미국에서는 아예 동일한 증상으로 다른 병원에 2차 의견(second opinion)을 구하는 것이 비즈니스 모델로 구축돼 있다. 유명 대학병원에서는 수백달러의 비용을 내고 원격으로 진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의료쇼핑은 외국의 것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리의 의료쇼핑은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이뤄진다고 볼 수 없다. 그보다는 병원에 대한 불신, 병원의 과잉 경쟁과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의료 전달 체계와 급여 시스템의 전반적인 문제와 관련돼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3월 공개한 ‘2011~2016년 보건의료 실태조사’를 보자. 인구 1명당 일 년 동안 외래진료를 받은 횟수는 14.6회에 달한다. OECD의 평균 6.9회의 두 배를 넘는 수치다. 아픈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병원을 찾기 쉽기 때문이다.

요통을 앓던 김은혁씨는 병원 두 군데를 돌아다니며 MRI 검사를 중복해 받았다. 그가 15년 전에 들어둔 보험을 통해 검사비를 상당 부분 보전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방받은 도수치료는 대표적인 비급여 항목 중 하나지만 역시 실손보험을 통해 전액 돌려받을 수 있다. “의사는 평소 생활습관을 바로잡고 운동을 하라고 했지만 돈 들지 않고도 치료받을 수 있으니 병원에 가는 것이 차라리 간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병원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환자를 받아야 한다. 한국의 개원의 한 명이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 수는 과(科)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2016년을 기준으로 내과는 하루 평균 78명, 이비인후과는 평균 101명이 넘는다. 하루 평균 100명의 환자가 오가는데 제대로 된 진료가 이뤄질 리가 없다. 의사는 대강 환자를 진료하고 환자는 쉽게 다른 병원으로 옮겨갈 수 있는 구조는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2015년 한국을 흔들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역시 의료쇼핑 현상에서 시작됐다. 메르스 환자의 이동 경로가 공개되었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문제인데, 상당수 환자들이 메르스 확진을 받기 전 여러 병원을 거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메르스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환자들이 증상이 낫지 않자 다른 동네 의원이나 병원을 찾은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여러 병원의 감염 취약자들과 접하게 됐고 메르스가 일파만파로 퍼졌다.

정부와 보건당국은 이후 대학병원 응급실에 음압병실과 같은 격리시설을 완비하도록 강제하고 전염병 대응 지침을 재정비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전염병이 발생하고 나서 생긴 것이 아니다. 전염병을 확산시킬 수밖에 없었던, 환자들이 의료쇼핑을 하도록 만든 한국의 의료보건 시스템이 문제였다.

의료계에서는 의료쇼핑 문제를 저수가에서 찾는다. 외과에서 찢어진 상처를 하나 봉합하는 데 설정된 수가는 1만2790~1만4930원 정도다. 한 번 진찰하는 데 20~30분은 족히 걸리는데 이런 환자 10명을 받아도 하루 벌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내과에서 환자를 처음 진찰할 때 받는 초진 진료 수가도 1만4000여원인데 일본이나 미국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내과에서 환자를 1분, 2분 진료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는 셈이다. 최대한 많은 환자를 받아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급여 진료가 많이 이뤄지는 성형외과, 피부과로만 젊은 의사들이 쏠린다. 우리나라의 성형외과 전문의는 1500명인데 성형외과는 수만 개에 이르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되자 성형외과로도 제대로 돈을 벌기 어려워졌고, 결국 병원 간 과열 경쟁 현상이 벌어졌다.

요즘 피부과나 성형외과, 안과같이 경쟁이 치열한 분야의 병원들은 아예 상담료를 받지 않는다. 병원이 상담료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대개의 상담이 의사가 아닌 병원 직원들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성형외과가 많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모 성형외과 마케팅 팀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거의 대부분의 성형외과에서 상담은 상담실장을 통해 이뤄집니다. 상담실장은 일종의 영업사원이라고 보면 되는데 원가와 소비자가 사이의 가격 조정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술 한 건당 일정한 커미션을 받아갑니다. 많이 벌면 정말 월 1000만원도 쉽게 벌죠. 이렇게 하는 이유는 환자와 상담할 시간에 의사가 수술대를 떠나지 않고 수술해야 적자를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성형외과일수록 마케팅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한창 성형외과가 성장할 때는 유명 성형외과 한 곳당 바이럴(온라인 입소문) 마케팅 담당자 수만 70~80명에 달하기도 한다. 의사가 10명 있다면 상담직원과 마케팅 담당자가 20명에 달하는 셈이다. 여기다 간호인력까지 합하면 인건비로만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이 성형외과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고급 인테리어, 다른 병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최신 기계를 도입하는 비용까지 든다. 환자를 유인하는 방법도 다양해지는데 기존 시술에 이름만 바꿔 단다거나 환자들은 체감하기 어려운 기능 하나가 추가된 기계를 들여 ‘최신 기계로 진료한다’고 홍보하는 식이다.

비정상적인 의료시장이 한번 만들어지니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의사들은 진료시간을 최소화하고 돈 되는 비급여 진료만 늘려 돈을 벌고자 한다. 환자들은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아다니면서 받지 않아도 되는 진료를 여러 번 받는다. 환자 개인의 진료비 부담이 좀처럼 줄어들 수 없는 데다 건강보험의 재정에도 위협이 가해지는 총체적 난국을 맞은 것이다.

문재인케어가 문제 악화

이 상황에서 등장한 ‘문재인케어’는 의료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문재인케어의 핵심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60% 초반으로 OECD 평균에 비해 낮아 가계의 의료비 직접 부담이 높다는 것이 문제 의식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보장이 되지 않는 항목을 모두 보장되도록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대안이 나왔다.

그러나 문재인케어는 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높아졌는지, 왜 보장률이 낮은지에 대해 시스템적인 차원에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의료의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방향에는 동의하더라도 문재인케어의 효과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전문가도 많다. 비급여 진료를 늘려온 의료보건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당장 보장성만 강화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의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비급여 진료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던 많은 개원의들로서는 문재인케어의 도입은 수익원을 없애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문재인케어 저지’를 내걸고 집단휴진에 들어갈 것이라 선언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당선된 의협 최대집 회장은 문재인케어 강성 반대파로 알려져 조만간 의협과 보건당국 간의 큰 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아직 숨어 있는 문제도 있다. 건강보험료 인상과 관련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문재인케어로 인해 급격한 보험료 인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도 성상철 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정부가 예고한 보험료 인상률 3.2%로는 부족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 더 많은 진료 기회를 얻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국민은 없지만 이러한 정책이 건강보험 재정에 어떠한 부담을 줄 것인지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민과 의사 집단에 대한 충분한 합의 없이 시행되는 문재인케어는 더 극단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당장 의료비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의료소비자의 의료쇼핑 경향이 더욱 강해질 수 있다. 국민의 의료 서비스 수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비급여 진료로 쏠리는 의료보건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부담만 줄이기 때문에 의료쇼핑 경향이 강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 전달 체계’라고 부르는 의료보건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12월 10일 문재인케어를 반대하는 의사들이 서울 중구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photo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지난해 12월 10일 문재인케어를 반대하는 의사들이 서울 중구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photo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일차의료가 자리 잡으면 벌어질 일들

최근 들어 서서히 강조되고 있는 ‘일차의료(Primary Health Care)’가 해결의 키워드 중 하나다. 사전적으로 일차의료란 지역사회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를 말한다. 종종 동네의원, 주치의라는 말과도 혼용해 쓰인다. 하지만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일차의료는 동네의원과 다르다. 일차의료를 담당하는 일차의료 전문의 역시 동네의원 의사와 다르다. 고병수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 회장의 설명이다.

“일차의료 전문의(GP·General Practitioner)와 대조되는 것은 특정 전문의입니다. 특히 유럽의 경우에는 일차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데 네덜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곳에서는 일차의료 전문의를 통하지 않으면 아예 전문의 진료를 못 봅니다.”

일차의료가 자리 잡은 국가의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에서는 어느 지역이든 이사를 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일차의료 기관을 하나 선택해 등록하는 일이다. 이 일차의료 기관은 지역 주민의 전반적인 건강 문제를 다룬다.

“일차의료 전문의에게 ‘일반적’이라는 영어 단어(general)가 붙는 이유는 일차의료 전문의는 매우 폭넓은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일차의료 전문의가 이비인후과 전문의만큼 이비인후과 질환을 잘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의료 전문의는 특정 환자의 특정 증상이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통을 앓는 환자가 있다고 하면 한국의 경우에는 환자가 직접 내과, 신경과, 이비인후과를 ‘쇼핑’하면서 자신의 질환에 맞는 처방을 내려줄 의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일차의료 전문의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환자의 가족력, 평소 생활습관, 최근에 생긴 사건까지 꿰뚫고 있기 때문에 환자의 두통이 어느 과에서 진료받아야 하는지를 판단해 다른 전문의에게 진료를 의뢰할 수 있다.

이 시스템에서 전문의는 말 그대로 전문의(Specialist) 역할을 하면 된다. 한국 개원의 중에서 의사 한 명당 평균 외래환자 수가 가장 많은 분야가 바로 이비인후과인데 하루 평균 100명의 환자를 만난다는 통계도 있다. 코감기 등 감기 환자들도 이비인후과를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원래 코감기를 보는 의사가 아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전공의 수련을 받으며 몇 년 동안 축농증 수술, 중이염 수술 같은 외과 수술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는 이 몇 년간의 훈련을 아무 쓸모없는 일로 만들고 있어요. 모든 전문의가 개원을 하다 보니 코감기, 목감기 환자를 진료하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고병수 회장의 말처럼 지금 한국 이비인후과 개원의의 상당수는 몇 년간 받은 지식을 써먹지도 못한 채 능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유럽과 북미에서 수차례 연구된 바에 따르면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의 대다수는 막상 진료를 받을 필요가 없는 환자들이다. 이미 1960년에 미국의 의사 화이트(Kerr White)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대형병원의 진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는 1명에 불과하다. 고병수 회장도 자신의 환자를 대상으로 직접 조사해 비슷한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환자 100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50명은 굳이 병원에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환자였습니다. 20명은 자가치료가 가능한 환자였고요. 약을 먹는다거나 생활습관을 바꾸는 걸로 증상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많아도 30명, 40명 정도만이 의사의 전문적인 진료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병원을 떠올려 보자. 평일 낮 병원들은 규모와 진료과를 막론하고 1분 진료를 받기 위해 1시간 대기하는 중장년들로 붐빈다. 이들이 제대로 된 진료를 받고 증상을 해결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병원에서 막연하게 시간을 보내는 환자의 상당수는 의료쇼핑 중이다.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 검사까지 받아가며 의료비를 낭비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일차의료가 자리 잡는다면 과잉 진료가 줄고 자연히 의료비 부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차의료가 활성화되면 의사들이 비급여 진료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과열 경쟁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환자, 일차의료 전문의, 전문의 간의 연계가 잘 될 경우 적재적소에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이상적인 결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한국의 보건의료 시스템 전반을 개혁해야 하는 문제다. 막상 개원한 전문의들의 밥그릇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적정한 수가를 보장받는다는 전제하에 장기적으로 전문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현재 수많은 개원의들은 일차의료 기관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일차의료의 역할에 맞는 일차의료 전문의를 길러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또 일차의료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면 일차의료 기관은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병원이라기보다 지역사회의 공공 보건기관에 가깝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메르스 감염 문제로 전국적인 홍역을 앓았던 2015년 여름, 영국에서도 메르스 의심 환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공황 상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환자가 이리저리 병원을 옮겨 다닐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차의료 전문의가 의심 환자의 증상을 확보해 보건당국에 보고했고 즉시 격리됐다. 이 결과를 두고 한국에서는 보건당국의 커뮤니케이션 문제, 의사의 역할 문제 등을 다양하게 다루었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시스템이다. 보건의료 시스템의 개선에 시급히 나서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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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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