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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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이 발표한 중·고교 한국사 교육과정 및 집필기준 시안을 두고 좌우 진영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문제에 이어 이른바 ‘역사교과서 전쟁’ 제2막이 열린 셈이다. 평가원 측 시안에 따르면 2020년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될 새 역사교과서에는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들어가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 수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뀌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표현도 빠지게 된다.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한 국정교과서가 ‘친일파’ 논란에 휩싸였다면, 이번 평가원의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당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이번 시안에 대해 페이스북을 통해 “내용이 참 황당하다.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꾸겠다고 한다. 사회주의혁명 세력이 주장하는 ‘인민민주주의’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야당과 우파 진영의 여러 헌법학자들도 “이번 정부 발표 시안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 헌법 4조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서정욱 변호사는 “파시즘, 나치즘, 스탈리니즘, 마오이즘 등 소위 ‘자유롭지 않은 민주주의들’도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한 개념상 민주주의 체제에 포함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시안을 발표한 평가원 측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평가원 측은 “역대 역사과 교육과정 및 교과서에서 활용된 용어는 대부분 ‘민주주의’였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자유민주주의’로 서술한 이후 학계와 교육계에서 수정 요구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논란이 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자유’를 굳이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은 국가 정체성과 관계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회 세미나 참석차 충남 공주에서 서울에 잠시 들른 이 교수를 만나 교육부가 발표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 문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 교수는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상임대표를 역임했으며, 그가 속한 한국현대사학회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가 포함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교과서에 들어간 배경

이 교수는 먼저 2009년 교육과정 개정 당시 기존의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바뀌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기존에는 교과서에 ‘민주주의’라고 하면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란이 일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 일부 전교조 교사들이 민주주의를 잘못된 개념으로 해석해서 가르치거나,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나 계급투쟁적 민중사관을 옹호하는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현대사에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배치되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지향하는 여러 운동이 분명히 존재해왔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교육을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교과서에 반영한 것이다.”

이 교수는 “이명박 정부 당시 수많은 토론과 사회적 논의를 거쳐서 결정한 것을 현 정부는 아무런 공론화 과정도 없이 일개 국책연구기관을 통해 일방적으로 교과서를 고치려 하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초에는 집권 여당이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그냥 민주주의로 바꾸려고 시도하다 여론의 역풍을 맞고 물러섰다. 이번에는 민주적 논의나 절차도 없이 연구기관의 보고서만으로 교과서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굳이 ‘자유’라는 단어를 지우려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역사의식이 기저에 깔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결국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넣느냐 빼느냐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연관된 문제다.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헌법에 따라 북한식의 인민민주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이 점을 명확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국가 정체성과 관계된 문제를 가지고,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은 결국 역사교육을 소홀히 해온 정통 자유보수 진영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우파 진영이 진작에 국민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 기원과 성립과 발전의 역사를 정리했어야 하는데 너무 안이하게 대처해온 것이 오늘날의 화근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개별 학자들이 나름의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연구했고, 이들의 연구 결과와 주장이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돼왔다. 정통 역사학계는 현대사가 사실상 이들 손에 의해 쓰여지는 것을 방치해왔다.”

교육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위탁한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 및 집필기준 시안’을 5월 2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기존의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로 바뀐다. ⓒphoto 연합
교육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위탁한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 및 집필기준 시안’을 5월 2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기존의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로 바뀐다. ⓒphoto 연합

발전이 아닌 분열의 역사 가르쳐선 안 돼

그는 “특히 1980년대 이후 현대사 연구는 순수 학문적 목적보다는 역사를 소위 변혁운동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이들이 주도했고, 이들에 의해 대한민국을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의 연구가 광범위하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그들의 연구성과가 1997년 제7차 교육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한 한국근현대사라는 과목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초의 국민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성립과 기원, 발전이라는 긍정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가 아니라 분단과 독재, 거기에 저항하는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중점적으로 부각하는 시각의 역사교과서가 교육 현장에서 사용된 것이다. ‘운동’이라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며,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움직임인데, 그런 것만 부각하는 것은 국민의 역사로는 한계가 있다.”

이 교수는 “그동안 우파 진영에서는 건국의 이념, 국가의 지향점과 가치가 어떻게 구현되고 발전하여 왔는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돼 있지 않으니, 막상 우파 정부가 들어와도 교과서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학교에서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이를 추진할 역량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어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노력이 있었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역사 교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분열의 역사가 주류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이 있었는데 이런 반대가 적극적으로 분출된 것이 제주 4·3사건이다. 대한민국 수립에 반대해서 일어난 사건이 대한민국 발전에 주춧돌이 된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무고하게 돌아가신 분을 위로하는 것과 그 사건 자체를 미화해서 가르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유를 뺀 넓은 의미의 민주주의로 보면, 민중의 의지가 표출된 것은 모두 다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 온갖 반체제운동과 반정부활동, 간첩사건을 민주주의로 옹호하고 가르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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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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