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일 서울 구로 천왕마을의 흥왕교회 강의실에서 주민들이 우쿨렐레 연주를 하고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6월 5일 서울 구로 천왕마을의 흥왕교회 강의실에서 주민들이 우쿨렐레 연주를 하고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구로구 오류1동 주민센터에서 근무하는 박승준 주무관의 명함에는 주무관 대신 ‘마을사업 전문가’라는 직함이 적혀 있다. 구로구에서 나고 자란 그가 마을사업 전문가 직함을 얻게 된 것은 ‘천왕마을(천왕동)’ 도심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으면서다. 2012년부터 천왕마을을 조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해 ‘천왕마을 촌장’으로 불려온 그는 2016년 5월 서울시의 ‘마을사업 전문가’ 모집 공고에 지원해 합격했다. 이후 오류1동 주민센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천왕마을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지금은 근무지인 오류1동에도 천왕마을 같은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구로구 천왕마을은 서울의 대표적 마을공동체 중 하나이다. 행정동으로 구로구 오류2동에 속하는 이곳을 주민들이 천왕동이 아닌 ‘천왕마을’로 부르는 이유는 지역의 주요 의사결정을 관(官)이 아닌 주민들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인구 1만7400명 규모인 천왕마을의 주요 의사결정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33개 모임의 대표들이 모인 ‘천왕마을 연합회’가 한다. 33명의 연합회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천왕마을의 한 아파트단지 1층에 마련된 마을회관에 모여 주요 안건을 논의하고 의사결정을 한다. 김성우 천왕마을 연합회장은 “매년 9, 10월 열리는 마을축제인 ‘천생연분’ 축제를 앞두고는 일주일에 회의를 두 번씩 할 만큼 바빠진다”고 말했다.

개관을 앞둔 인천 영성마을의 문화센터 지하 1층에 주민들이 모여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개관을 앞둔 인천 영성마을의 문화센터 지하 1층에 주민들이 모여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30여개 모임 대표가 연합체 구성

천왕마을은 본래 농가와 소규모 공장터가 있던 곳이다. 2005년 구로구 고척동에 있던 서울남부구치소·교도소가 근방으로 이전해 오고 2011년 SH서울주택도시공사의 임대·전세주택 7700여가구의 입주가 시작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7700여가구 중 25% 정도가 분양 가구고 나머지 75%는 장기임대·전세 가구다. 특성상 대부분의 주민들이 30년 이상 장기 거주를 희망하는 만큼 주민들이 지닌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다.

천왕마을 조성 초기만 해도 대규모 임대주택이 들어서고 서울 전역에서 외부인들이 몰리면서 인구는 급증했지만 이웃 간의 교류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천왕초등학교 뒤편 부지에 흥왕교회가 건립되면서 이웃 관계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성규 흥왕교회 담임목사가 교회 1층의 카페를 주민들의 놀이터로, 지하 1층의 방 2개를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강의실로 흔쾌히 제공하면서 주민들의 모임을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민간 마을사업 전문가였던 박승준 주무관은 천왕동에 오래 거주하면서 다져온 인맥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모임을 주선했다.

천왕마을에서 현재 가장 많은 주민이 참여하는 모임은 ‘090천사모(0세에서 90세까지 천왕동을 사랑하는 모임)’다. 2013년 3월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미화원들이 청소하는 장소 외에 공원이나 일반도로, 상가 주변을 돌며 빗자루로 쓸고 쓰레기를 줍는 모임이다. 매주 토요일 아침에 모여 오전 시간 동안 마을을 돌며 활동한다. 090천사모에는 어린이부터 머리가 하얀 노인까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현재 이 모임에 등록된 총 인원은 400명이 넘고, 이 중 평균 70~80명이 매주 참석해 쓰레기를 줍는다. 유정호 090천사모 단장은 “길에 쓰레기를 버리면 이웃이 직접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안해서 길에 쓰레기를 못 버린다’고 말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직접 초록색 지선버스를 타고 돌아본 천왕마을은 길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를 찾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천왕마을에서는 19세 이하 어린이·청소년들도 마을공동체에 동참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중학생들이 직접 커피를 내리고 돈을 받는 ‘철부지 카페’가 열린다. 중학생 청소년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영어책,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천왕마을은 어린이들의 비중이 높다. 2015년 말 기준 전체 1만7400명 중 약 34%에 달하는 5140명이 19세 이하 어린이·청소년이다. 가구당 3~4명 이상의 다자녀 가구가 장기임대주택 입주 우선순위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천왕마을은 2014년 서울시로부터 최우수 마을공동체로 선정됐다. 현재는 경기, 인천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벤치마킹을 위해 찾는 경우가 잦다.

인천 영성마을 문화센터 외관.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인천 영성마을 문화센터 외관.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마을 일은 주민이 직접 결정한다

천왕마을 같은 자발적 ‘마을공동체’는 요즘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여기에는 마을공동체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돼야 한다는 현 정부의 국정기조가 반영돼 있다. 행정안전부가 광역지자체와 연계해 자발적 마을공동체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행안부에 따르면 이러한 마을공동체의 개수는 전국 1만2000여개에 달한다.

마을공동체의 핵심은 ‘마을’에 관한 일을 주민들이 모여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한다는 점이다. 주민들이 모여 대표성을 지니는 협의 기구를 두고, 소통과 토론을 통해 마을 관련 결정을 하는 것이 마을공동체의 핵심이다.

마을공동체는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양극화와 주민 간 갈등, 고령화, 복지, 일자리 창출 등 지역 내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주목받는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톱-다운(Top-Down)’ 방식의 일방적 행정으로는 각종 문제에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다. 공동체 전문가인 최현선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신뢰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 시점에서 공동체 복원 논의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전부터 마을공동체 조성 사업을 꾸준히 해온 곳은 서울시다.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이 보궐선거로 당선된 2011년부터 마을공동체 사업을 지속해왔다. 2014년 박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마을공동체 사업을 더욱 확장해왔다.

마을공동체의 개념은 하나로 정의돼 있지 않다. 관련법이 국회에 계류돼 통과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지역공동체 활성화 기본법’, 지난해 2월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마을공동체 기본법’은 모두 행안위 법안소위에 계류되어 있다.

법안은 제정되지 않았지만 행안부는 조직 신설 등 제도적 개선과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전국 지자체를 지원하는 중이다. 지난해부터 전국 대부분의 광역지자체에는 ‘지역공동체과’가 신설됐다. 행안부의 ‘지역공동체 활성화 정책 추진사항’에 따르면, 2016년 말 행안부는 전국의 각 지자체에 마을기업, 도시재생 등 공동체 관련 사업을 총괄하고 기획하기 위한 조직을 설치할 것을 통보했다. 이에 따르면 광역시·도 등 광역지자체에는 4급 과장을 보임하는 지역공동체과를, 시·군·구 등 기초지자체에는 6급을 팀장으로 하는 관련 팀을 신설한다. 이전까지 관련 업무를 맡는 직원들은 지역경제과 등으로 분산배치한다.

주민들이 꼽는 마을공동체의 장점은 여럿이다. 천왕마을 주민들은 무엇보다 숫자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유대감 형성’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지난 6월 5일 흥왕교회 제2강의실에서 만난 천왕마을 주민 변준희씨는 “낮에는 어린아이들끼리도 교회에서 진행하는 수업에 보낼 만큼 안심하게 됐다”며 “주민들과 아무래도 인사라도 한 번 더 하게 된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그는 이날 우쿨렐레 수업을 듣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흥왕교회를 찾았다.

아이가 많아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천왕마을에서는 이외에도 영어, 주산 등 학습이나 악기를 가르치는 강좌가 인기다. 대부분 강사도, 학생도 주민이다. 흥왕교회에서만 올 6월 기준 14개의 강좌를 운영하고 있고, 단지마다 있는 도서관 9곳에서 각각 3~4개씩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가격은 월 3만~5만원 수준으로 시중에 비해 절반 이하로 저렴하다. 주민들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인건비를 거의 받지 않고 강좌를 운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마을공동체는 소득이나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부산 사하구의 감천문화마을은 2011년 기준 연 2만5000명에서 2016년 연 185만명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거듭났다. 주민들이 다양한 문화예술 공모사업을 유치해 마을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예술창작공간을 조성하는 등 다양한 관광콘텐츠를 개발한 덕분이다. 스스로 수익사업장을 조성·운영하고 황토가마소금 등 지역특화상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했다.

현재 행안부가 상대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 공동체다. 마을공동체는 크게 도심공동체와 농촌공동체로 분류할 수 있다. 농촌은 마을회관 등 주민들이 모일 거점 공간은 풍부한 반면 상대적으로 주민 역량이 부족하다. 도시공동체의 경우 반대로 인적 역량은 뛰어나지만 거점 공간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마을공동체가 취하는 전략도 다르다. 농촌형은 농·어촌의 지역특산물을 통한 지역민들의 소득 창출과 증대가 주 목적이다. 반면 도심형은 다른 대도시에 직장이 있는 사람이 많고 지역의 물적 자원은 적은 경우가 많아 지역 내 공동체성을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통해 도심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학업이나 예술 등 교육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것이 주 목표다. 하현상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도심공동체의 경우 인적 자원보다도 주민들이 모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천 최초 마을공동체 영성마을

지난 6월 5일 찾은 인천 부평구 삼산2동의 한 빌라 단지 인근. 부평 주민들이 ‘원도심’으로 부르는 이곳은 영성마을 부지다. 영성마을은 인천 최초로 들어서는 마을공동체다. 영성마을의 경우 주민 20명이 모인 ‘영성마을운영협의회’가 주요 의사결정 기구다. 삼산2동 일대는 정비예정구역으로 지정됐다가 2012년 12월 해제됐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 간 갈등이 심해지고 소규모 공동체가 붕괴되는 등 문제가 심해졌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을 조성하는 주민협의회를 구성하면서다. 부녀회장, 통장 등 지역에서 거주한 지 오래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민 20명이 모여 ‘원도심 저층주거지 관리사업 지구 주민협의회’를 구성했다. 주민들은 직접 경기 파주시의 거북마을 마을공동체를 현장 답사하고 마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했다. 마을의 SWOT(강점이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경영학적 분석) 분석도 주민들이 스스로 하고, 영성마을 부지 역시 주민들이 직접 지정했다. 구청이 주도한 저층주거지관리사업지는 9200㎡였지만, 주민들이 지정한 범위는 삼산동 일대 9만3000㎡ 규모로 10배 이상 넓어졌다.

여기에 인천시가 공모한 저층주거지구 관련 사업에 영성마을의 부지가 선정되면서 55억원가량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이 예산을 통해 주변 전신주를 중심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전선과 통신선들을 묶어 정리하는 등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 마을회관과 문화센터를 지을 수 있었다. 지난 4월에는 영성두레마을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인천시로부터 정식 협동조합 인가도 받았다. 새로 지어질 건물들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한 마더센터, 도자기공방, 밴드 등의 활동을 위한 건물로 꾸밀 예정이다. 마을회관과 문화센터는 올 7월 초 정식 개소할 예정이다.

현재 영성마을의 1차 목표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협동조합 회원들이 CMS계좌에 하루 1만원씩 모금하고 있다. 100계좌가 목표다. 임채몽 영성마을두레협동조합 대표는 기자와 만나 “아직까지 돈이 안 된다”며 “현재는 문화센터 관리인의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는 월 150만원의 수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영성마을두레협동조합은 마을 조성 1년 차인 올해 문화센터 정착, 주민 간의 만남과 교류 활성화에 집중하고 내년에는 요가, 노래교실을 운영하는 등 협동조합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2020년부터는 요리교실, 마을축제, 물품 판매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익 창출을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구로 천왕마을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를 돌며 꽃을 손보고 있다. ⓒphoto 천왕마을
구로 천왕마을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를 돌며 꽃을 손보고 있다. ⓒphoto 천왕마을

“공동체 복원에 국가가 나서는 건 모순”

이처럼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공동체 복원 사업을 전문가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동체 복원에 국가가 지나치게 나서면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중요한 공동체를 국가가 나서 복원하는 것은 정책적 무리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최현선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과거 정부들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델’을 만들고 관 주도로 톱-다운 방식으로 하려고 시도해왔다”며 “공동체의 자생성을 훼손할 수 있고, 무엇보다 취지 자체와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지적을 의식하듯 행안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지자체를 지원한다는 입장이다. 행안부 지역공동체과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행안부는 지역공동체 관련 제도적 개선과 지원, 우수사례 홍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마을공동체 조성에는 각 지역의 특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예산을 지원하고 직접 주민과 소통하는 것은 지자체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성과 측정이 어려운 공동체 조성 사업의 특성상 단기간의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방식에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하반기에 마을공동체 관련 법안이 통과된다면 중앙 차원의 예산이 지원될 가능성이 높은데, 단기간에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 조성 사업의 특성상 평가를 의식해 사업이 진행된다면 본래 취지와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고 결정을 내릴 협의체를 구성할 때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주민 대표를 구성할 경우 크게 두 구심점이 생긴다. 주로 50~60대 생업인이 위주가 되는 직능 단체가 한 축, 청년 활동 등 마을공동체 복원을 위해 뛰는 30~40대 활동가 단체가 다른 한 축이다. 이들 사이에는 세대 간 격차, 이해 관계의 차이에서 오는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치회 내부에서 주민들 간의 긴장과 갈등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현상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마을공동체가 지속성을 가지려면 공동체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며 “주민자치회 등 협의체를 구성할 때 주민 대표조직이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인적 구성에서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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