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시재생사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세운상가. 재단장한 기념으로 지난해 11월 1일 ‘서울 365-역사를 걷다 패션쇼’가 열렸다. ⓒphoto 뉴시스
서울 도시재생사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세운상가. 재단장한 기념으로 지난해 11월 1일 ‘서울 365-역사를 걷다 패션쇼’가 열렸다. ⓒphoto 뉴시스

“시민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다시 시민을 만듭니다. 시민 참여형 도시재생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지난 7월 9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센즈 컨벤션센터에 세계 133곳 도시 관계자가 모였다. ‘2018 세계도시정상회의(World Cities Summit)’ 자리였다.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은 이는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 행사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서울역 인근 공중 보행로인 ‘서울로7017’ 일대 풍경이 커다랗게 비쳐졌다.

서울시는 이날 싱가포르 정부가 주는 ‘리콴유 세계도시상’을 수상했다. 2010년 싱가포르 국부(國父)인 리콴유 전 총리 이름을 따 제정한 상이다. 살기 좋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선정해 2년마다 수여한다. 올해 서울시는 일본 도쿄, 독일 함부르크, 러시아 카잔,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등 4개 도시와 경합을 벌인 끝에 수상 도시로 선정됐다. 스페인 빌바오(2010년), 미국 뉴욕(2012년), 중국 쑤저우(2014년), 콜롬비아 메데인(2016년)에 이은 다섯 번째 수상 도시다.

서울시는 수년째 추진해온 도시재생사업의 성과를 높이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리콴유 세계도시상 사무국은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난 도심 공동화(空洞化)와 상권 침체를 시민이 참여하는 재생사업으로 해결했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수상 도시 연설에서 “토건(土建) 중심의 개발과 성장의 시대에는 서울이 기념비적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서울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서울이 가진 진짜 모습을 재발견하고, 그 안에 담긴 삶을 존중하는 도시재생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쳐서 다시 쓰겠다는 정책

도시재생사업은 3선 서울시장인 박원순 시장의 핵심 정책이다. 박 시장은 평소 “보행친화 도시 조성과 대규모 개발에서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가장 애착이 가는 정책”이라고 말해왔다.

도시재생에는 박 시장 시정(市政) 철학의 양대 기둥인 ‘역사’와 ‘시민’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서울시에서 말하는 ‘서울형 도시재생’은 서울의 역사적 자산을 복원하고 활용해 정체성을 잘 살리는 사업이다. 부수고 새로 짓기보다 있던 것을 살리고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둔다. 특정 지역을 모두 철거한 후 기반시설과 아파트 단지를 새로 건설하는 재개발·재건축과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박 시장은 “헐고 새로 짓는 방식의 재건축·재개발은 건설사들을 배불리고 집값을 과열시킨다”며 “고쳐서 다시 쓰는 재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재생사업에는 꾸준한 주민 참여가 필수라는 점에서 시민, 시민 참여, 시민단체의 역할을 강조해온 박 시장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박 시장은 싱가포르 리콴유상 시상식에서도 “시에서 일방적으로 정책 결정을 하는 것보다는 시민이 참여할 때 정책 결정·집행 시간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시민 의견을 듣지 않으면 시행착오와 실수를 거듭할 수 있고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고도 했다.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 화두인 ‘도시재생 뉴딜’의 모태가 됐다. 매년 10조원씩 5년간 총 50조원을 투자해 전국 500개 구도심과 노후 주거지를 개선하겠다는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은 시의 도시재생 사업을 확대·발전시킨 것이다. 일자리 창출 등의 부대 효과를 강조해 ‘뉴딜’이라는 단어를 붙였으나 본질은 서울시 정책을 바탕으로 한다.

도시재생에 나선 것은 박 시장이 처음은 아니다. 시동(始動)은 10년 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걸었다. 2008년 오 전 시장 때 강북구 능인골, 성북구 선유골을 대상으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시범사업을 추진한 것이 시초다. 주민 의견을 반영해 오래된 단독주택 지역과 저층주거 지역을 다시 살려보자는 사업이었다. 이때만 해도 태동 수준이었던 사업은 2012년 박 시장이 취임한 후 본격화됐다. 박 시장은 당시 지지부진하던 대규모 재개발 사업인 ‘뉴타운’ 지구 지정을 해제하고, 소규모 지역별로 도시재생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2018년 2월 현재 시 전역 131곳, 28.3㎢에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시에는 이를 위한 본부가 따로 꾸려져 있다. 2015년 1월 출범한 도시재생본부다. 7월 현재 10개과(課) 206명이 근무하는 거대한 조직이다. 시의 도시재생사업 예산은 지난해 2330억원에서 올해 2610억원으로 늘었다.

도시재생사업은 쇠퇴한 산업지역,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중심지, 낙후된 주거지, 가치회복이 필요한 역사자원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대표적으로 고가도로를 보행길로 살린 ‘서울로7017’이 있다. 1970년대 산업화의 상징이던 서울역 고가도로는 지난해 5월 47년 만에 공중정원으로 다시 개장했다. 시 예산 약 600억원이 들어갔다. 철도와 차량길로 단절된 서울역 일대를 되살리고 활력을 불어넣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철거하려다가 그대로 두게 된 세운상가도 재생사업의 대표 주자다. 오세훈 전 시장은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일대를 재개발할 구상이었다. 그러나 2014년 3월 박 시장은 철거를 취소하고 주변 지역에 경제·사회·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겠다며 재생사업인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시는 먼저 1단계 사업으로 세운상가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예산 535억원을 투입해 지난해 9월 제조업 창업기지로 재개장했다. 2020년 종묘에서 남산까지 남북 방향으로 2.8㎞에 이르는 보행축을 완성하면 2단계가 완료된다.

서울 도시재생 대표 사례들

흉물로 취급받던 산업 유산을 복합문화시설로 바꾼 사례도 있다. 지난해 9월 개장한 마포 석유비축기지다. 1970년대 2차례 오일쇼크로 국가적 차원에서 석유를 비축해두던 거대한 탱크들이 축제와 공연·전시가 열리는 문화비축기지로 변신했다. 화력발전소에서 세계적 미술관으로 거듭난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과 유사한 경우다. 축구장 22개와 맞먹는 비축기지 부지 한가운데에 공연장이나 장터로 활용할 열린 공간이 있다. 그 주변을 탱크 6개가 둘러싼다. 석유를 담아뒀던 거대한 빈 깡통의 내부를 꾸며 문화시설로 만들었다. ‘석유통’ 원형을 최대한 보존해 역사성을 살렸다.

이외에도 장안평 중고차시장 일대(50만8390㎡)를 자동차 애프터마켓의 중심지로 조성하겠다는 ‘장안평 자동차산업 복합단지’, 올해부터 5년간 200억원을 투입해 글로벌 창업센터, 디지털랩 등을 만들겠다는 ‘용산전자상가 활성화 사업’, 청량리 약령시장·경동시장·청과물시장 등 10여개의 전통시장 밀집 지역(9만2639㎡)을 2030세대도 즐겨 찾는 문화관광 명소로 육성하겠다는 ‘청량리 종합시장 프로젝트’ 등이 진행 중이다.

도시재생에는 노후 주거지 재생사업도 포함된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에는 1960~1970년대 서민의 주거생활사를 간직한 판잣집과 골목길 계단 등을 그대로 살리면서 저층 임대주택을 짓는다. 기존 재개발·재건축처럼 일대를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옛 동네의 원형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도시재생의 원칙을 잘 반영한 설계라는 평가다. 성북구 삼선동 장수마을, 종로구 이화동 이화마을, 낙산 끝자락의 충신마을 등도 전면 개발이 아닌 ‘지속가능한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역사 보존·환경 개선 사업에 들어갔다.

이 같은 서울시의 저층 주거지 개선 사업에는 아파트 가격 안정이라는 목적도 있다. 시는 “강남 중심의 아파트 수요를 분산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남 아파트 시장의 ‘투기’를 잡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재생은 주로 강북에서 이뤄진다. 시에서는 재생사업으로 발전이 강남·북에 골고루 퍼지기 때문에 투기가 상대적으로 덜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서울 마포구 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로 재탄생했다. 1급 보안시설로 41년간 일반인의 접근과 이용이 철저히 통제됐던 마포 석유비축기지에서는 공연과 축제, 전시 등이 열린다. ⓒphoto 뉴시스
서울 마포구 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로 재탄생했다. 1급 보안시설로 41년간 일반인의 접근과 이용이 철저히 통제됐던 마포 석유비축기지에서는 공연과 축제, 전시 등이 열린다. ⓒphoto 뉴시스

“단순 환경미화 사업” 비판도

시의 도시재생사업이 ‘마을 가꾸기 수준의 동네 정비’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6·13 지방선거 직전이던 지난 6월 3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서 4층짜리 노후 상가건물이 갑자기 붕괴하면서 시의 재생사업이 여러 후보의 표적이 됐다. 김문수 자유한국당 후보와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는 “서울시가 재개발·재건축 허가를 지연하면서 사고 위험을 키웠다”고 비판했다. 안 후보 측은 “박원순의 도시재생은 건물 바깥에다 페인트칠하고 환경미화하는 수준”이라며 “당장 무너질 위험이 있는 건축물에 벽화를 그려 넣는다고 낙후된 마을이 되살아나는 게 아니다”라고 깎아내렸다.

일부에서는 재건축·재개발을 지금처럼 막기보다 합리적인 재건축·재개발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거형 재개발까지 포함하는 일본 도쿄의 도시재생 사례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의 재생사업과 같은 소규모 모델은 노후 주택 정비에 한계가 있고 비용 대비 실효성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2014년 전국 최초로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된 종로구 창신·숭인 지구는 “200억원을 들이고도 주민들이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시는 이에 대해 도시재생의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또 장기적으로 지자체와 중앙 부처가 협업해 노후 하수관 정비 등 주민 불편이 많은 분야를 개선해나가겠다고 했다.

시가 강조하는 것처럼 재생사업은 장기전이라는 점에서 예산 확보가 관건이다. 재건축·재개발처럼 새 건물이 들어서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예산을 들여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시가 지난해 1단계 사업을 완료한 세운상가 일대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시에서 관리해야 자생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없이는 일부 시설만 들이고 일시적으로 예산만 들이다 중단될 수 있다. 도시재생사업의 가장 큰 부작용으로 꼽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임대료가 폭등해 기존 세입자가 떠나는 현상)도 풀어야 할 숙제다. 서울로7017 주변은 개장 이후 임대료가 두 배 정도 올랐다는 얘기가 나왔다. 박 시장은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뉴욕시장처럼 서울시장에게 임대료율 인상 상한선을 부과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희선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장기적 관점에서 도시재생은 일자리, 저출산, 고령화 등 사회 현안을 풀어가는 도시 관리 수단이 돼야 한다”며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찾는 인본적 재생을 최종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신정선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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