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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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0살 된 민준이는 한국인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민준이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지금 민준이가 살고 있는 베트남 중부 지역의 작은 도시에서 벌써 8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8년 전, 민준이와 엄마는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시댁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고향에서 엄마 얼굴을 본 날은 손에 꼽는다. 엄마는 차로 7시간 넘게 달려야 닿는 호찌민시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준이는 몸이 불편한 외할머니와 함께 한동안 작은 집에서 하루 종일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지만 민준이는 학교를 갈 수 없었다. 베트남의 경우 외국 국적자는 학교에 다니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민준이의 사연이 지역 사회에 알려져 2014년부터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민준이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민준이의 여권은 2015년 만기됐다. 한국에 가서 갱신받아야 하지만 민준이의 가정형편상 한국에 들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대로 민준이가 한국어 단어 하나 아는 것 없이, 한국과의 인연이 끊어진 채로 성인이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베트남 어느 작은 도시에 자리 잡은 민준이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베트남에 사는 귀환여성 자녀는 최소 37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트남 귀환여성이란 한국으로 결혼이주를 왔다가 이혼, 사별 등으로 인해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간 여성들을 말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한 해에만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베트남 여성이 1575명인데, 이 중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이혼한 경우는 446명에 달한다.

이들 대다수는 베트남으로 귀환하기를 결심한다. 혼자서는 아이를 키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개는 어린 나이의 자녀를 데리고 돌아가기 때문에 귀환여성의 자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어 구사능력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반면에 이들의 대부분, 그러니까 81.42%는 한국 국적을 유지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유엔인권정책센터에 따르면 귀환여성을 어머니로 둔 한·베 자녀의 절반 이상이 미등록 체류 신분으로 베트남에 머물고 있다. 귀환여성의 자녀들이 베트남에서 이미 사회문제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아이들의 문제는 베트남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의 국적이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이 미처 닿지 않았던 사각지대, 외국 어느 곳에 있는 한국 아이들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3개월이나 6개월에 한 번씩 입국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체류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베트남 국적을 취득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아이들의 문제는 한국의 문제로 남는다. 아이들이 한국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재외동포이기 때문이다.

 

귀환 한·베 자녀의 비극

743만688명. 지난해 외교부가 집계한 재외동포 숫자다. 같은 시기 행정자치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 인구가 5169만6216명이었다. 재외동포 인구 수가 총 인구의 15%를 넘는 규모인 셈이다.

재외동포는 재외국민과 한국계 외국인을 포함하는 용어다. 재외국민은 외국에 거주하면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거나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한국계 외국인은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다. 통계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재외동포는 한국계 인구 전체를 포괄한다. 해외로 입양간 한국계 외국인도 재외동포다. 한국계 조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외동포로 볼 수 있다.

종종 재외동포는 ‘한국이 싫어 떠난 사람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나라 사람’으로만 인식된다. 재외동포를 배려하고 포용하자는 얘기는 구시대의 국수주의적 발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한국의 이민 역사는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국경을 넘은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유대인을 떠올려보자. 보통 우리는 재외동포를 표현할 때 ‘한국계 미국인’‘중국계 프랑스인’처럼 혈통을 앞에 적고 국적을 뒤에 적는다. 그러나 유대인은 그렇지 않다. 화교도 마찬가지다. 주로 ‘싱가포르 화교’ ‘독일(계) 유대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국경을 넘어 민족 문화적 동질성을 강하게 가지는 집단이 유대인과 화교라는 얘기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유대인은 유대인의 공동체를 만들고, 각국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노력한다. 미국은 유대인이 만들어낸 강대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만 봐도 그렇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2016년 딸을 낳고 “지금은 종교가 중요하다고 믿는다”며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발언을 했다.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도 유대인이다. 온라인 쇼핑몰 이베이와 결제 서비스 페이팔의 경영진도 유대인이다.

사실 지금에 와서 유대인을 혈통으로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워낙 많은 민족이 섞여 유대인 고유의 생김새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유대인은 문화와 역사적 동질감으로 하나가 된다. 젊은 유대인은 성공한 유대인의 도움을 받아 창업하고, 다시 유대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는다. 성공한 유대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유대인의 문제는 전 세계의 문제가 되고, 유대인의 관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관습이 된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우리 재외동포 다수는 빈곤을 피해 이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재외동포는 다양한 이유로 이주를 결심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재외동포 공동체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점점 성장하는 중이다. KT경제연구소가 7년 전인 2011년 추정한 바에 따르면 재외동포의 경제력은 100조원 정도로 우리나라 1년 국가예산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크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각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한 재외동포의 사례는 이제 흔하게 접할 수 있을 정도다.

국적과 영토라는 기존 개념에 갇혀 있을 때는 인식하기 어렵지만 시야를 확장한다면 재외동포는 우리 사회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담보하는 기회다. 재외동포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고려대 사회학과 윤인진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재외동포를 포용하고 재외동포와 소통하는 일은 혈통중심주의적 폐쇄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다문화사회에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전 세계에서 K컬처가 주요한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순간의 유행일지도 모르는 K컬처 붐을 지속시키고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는 것은 재외동포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최근 재외동포 정책은 재외동포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한국 사회와 연결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올해로 17회를 맞는 세계한상(韓商)대회나, 늘어나고 있는 재외동포 방한(訪韓) 프로그램이 그 예다. 확장된 한국 사회, 한국 문화를 위해서 재외동포 공동체와 적극 소통해야 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숨어 있는 재외동포를 찾아서

우리는 종종 재외동포 공동체의 밝은 면만 이야기하곤 한다. 청운의 꿈을 안고 국경을 건너가 성공한 재외동포, 자신의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정도로 성공했지만 한국 문화와 민족의식을 잊지 않은 재외동포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처럼 경제적인 이유로만 이주하지 않는 지금,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재외동포를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것은 밝은 면에 가려진 그림자를 발굴하고 이야기하는 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입양인 문제다. 보통 영아기에 입양되는 입양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정착한 사회에서 충분한 돌봄을 받더라도 ‘남들과 다른’ 자신의 외모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자녀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입양인 부모들은 으레 입양인이 태어난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고 한다.

입양을 보내기만 할 뿐 입양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한국에서도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입양인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고 있다. 지난 8월 18일부터 재외동포재단에서 진행한 ‘차세대 동포 한국어 집중캠프’도 그중 하나다. 올해 캠프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입양인 24명과 그들의 자녀 26명이 참가했다. 석정민 재외동포재단 과장은 “입양인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캠프는 해마다 있어왔지만 입양인의 자녀까지 초청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누나 캉드스 졸리베, 졸리베의 자녀들과 함께 처음 한국을 찾은 자비에 모토에게 한국은 멀기만 한 나라였다. 자비에 모토는 1981년 입술과 잇몸, 입천장이 갈라져 있는 구순구개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곧바로 프랑스로 입양됐는데, 다른 보육원에 있던 누나 캉드스 졸리베와 함께였다. 자비에 모토를 입양한 프랑스 부모는 부유하고 온화한 가정을 만들어줬다.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여러 번 수술도 했다. 행복하고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났지만 자비에 모토를 괴롭히는 한 가지가 있었다면 바로 자신의 출신에 대한 것이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왜 나는 버려졌던 것일까 고민했어요. 어떨 때는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와 한국이 미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그냥 문화적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태어났던 곳이 어떤 곳일까, 내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할 때마다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곤 했죠.”

적극적으로 한국을 배우려고 하는 누나 캉드스 졸리베와 함께 한국을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평생 제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부모를 만날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부모를 찾아달라고 신청조차 하지 않았죠. 그래서 친엄마가 저를 찾고 있다고, 당장 만날 수 있다고 얘기를 들었을 때 그저 놀랐습니다.”

자비에 모토의 친모 윤순례씨는 그를 입양보낸 후 줄곧 아들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프랑스에서 입양인에 대한 정보는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친부모라 하더라도 개인정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났을 때 아들은 우유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어요. 수술을 당장 받아야 하는데 가정형편, 당시의 우리 의료환경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지요. 정말 많은 고민 끝에 아들을 잘사는 나라로 보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윤씨는 아들이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정보를 입양기관에 남겨둔 덕분에 자비에 모토가 한국에 입국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윤씨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지난 8월 23일 오후 서울에서 만난 모자는 한참 동안 손을 마주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눈물을 흘렸다. 떨어진 시간이 어색하지 않은지 이야기를 쏟아내던 두 사람은 서로의 가족을 소개하기도 했다. 윤씨는 자신에게는 “아들 세 명이 있다”면서 자비에 모토와 그의 남동생 두 명을 주변에 소개시켰다. 한참을 울먹이던 자비에 모토는 자신에게도 다섯 살 난 아들이 있다며 아들의 이름을 읊어줬다.

“미들네임에 ‘킴’을 넣었어요. 제 원래 성이 무엇이었을지 몰랐지만 아들에게는 ‘너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단다’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아들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아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싶어요.”

 

프랑스로 입양돼 함께 자란 캉드스 졸리베·자비에 모토(왼쪽) 남매는 올해 처음 한국을 찾아 한국어를 배웠다. ⓒphoto 재외동포재단
프랑스로 입양돼 함께 자란 캉드스 졸리베·자비에 모토(왼쪽) 남매는 올해 처음 한국을 찾아 한국어를 배웠다. ⓒphoto 재외동포재단

 

한 입양인의 고독사

자비에 모토는 입양을 통해 성공적으로 정착한 재외동포다. 그러나 입양인 중에는 자비에 모토와 같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해 12월에는 경남 김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고 한국에 머물던 노르웨이 입양인이 고독사한 채로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 7개월 전인 5월에는 필립 크레이라는 입양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는 1984년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부모가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아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다가 2012년 한국으로 추방됐다.

천정배 민주평화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는 해외 입양인은 전체 16만5305명 중에 2만3935명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권리를 찾을 수도 없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한국 사회의 몫이기도 하다.

숨어 있는 재외동포 중에는 앞서 언급한 결혼이주여성들의 자녀도 있다. 결혼이주여성이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편입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다문화 담론이 시작됐고 실제로 한국 사회는 다문화사회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 한국 사회 바깥에서 한국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떠도는 다문화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알려지고 있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베트남으로 돌아간 한·베 자녀의 문제는 베트남에서 사회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국내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외국 국적자가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이 지극히 적은 편이다. 학교를 다닐 수도 없다. 다행히 베트남 언론에서 여러 차례 이들의 문제를 다루고 나서 지자체마다 임의로 학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허가를 내주고는 있지만 여전히 한·베 자녀의 신분은 불안정하다.

경기도 고양시의 끝자락 낡은 주택에서 아들 김하안과 함께 사는 베트남 결혼이주여성 담티하이씨는 그런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인 하안이는 태어날 때부터 거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렵게 한쪽 귀에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 일반인의 80% 정도로 청력이 회복됐지만 한동안은 말을 제대로 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남편과는 이혼했어요. 남편은 술만 마시면 저를 때렸죠. 하안이도 때렸어요. 계속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이혼하고 도망치다시피 떠나왔어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여기에 집을 구하게 된 것도 남편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한 거예요.”

혼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하안이를 무사히 수술받게 하고 재활치료까지 하면서 담티하이씨는 직장을 그만뒀다. 하안이의 인공와우는 전기자극으로 소리를 전달하는 기계인데 자주 고장이 나기 때문에 늘 곁에 있어야 한다. 학원을 보낼 돈도 없기 때문에 아이를 혼자 둘 수도 없어 담티하이씨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이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주는 60만원과 아동수당이 수입의 전부예요. 월세 30만원 내고 공과금 10만원 내고 나면 둘이서 겨우 먹고살 만한 돈이 남아요. 그런데 인공와우가 한 번 고장나면 수리비가 20만~30만원씩 드니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살 때가 많아요.”

그래도 고향에 있을 때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고 생활을 함께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풍족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생활을 했다. 하노이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산골마을로 돌아가고 싶을 텐데도 담티하이씨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귀환을 망설인다.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더 안 좋다고 해요. 아이 여권 때문에 자주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돈이 없고, 그래서 불법체류자가 된다고 해요. 하안이처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는 돈이 없고 살기 힘들어도 의료 수준이 더 높은 한국에 있어야 한다고 해요.”

 

중도입국 자녀들의 문제

 

담티하이씨의 친한 언니는 아이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돌아갔지만 연락이 끊겼다. “아마 한국에서만큼 어렵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게 담티하이씨의 설명이다. 실제로 남편이 사망하고 나서 베트남으로 귀환한 띠엔(가명)씨의 딸 미정이의 경우 한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소멸되다시피’ 한 신분으로 살고 있다. 베트남에서 출생신고를 하려 했지만 베트남법에 의해 거부당하고 오히려 벌금까지 물었다. 한국 여권도 이미 만료된 상황이라 미정이는 10살이란 어린 나이에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한·베 자녀와는 반대 유형인 중도입국 자녀 역시 재외동포 사회의 문제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도입국 자녀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한국에 정착한 부모를 따라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입국한 아동들을 말한다. 베트남인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았던 베트남인 자녀를 한국으로 불러오기도 한다. 탈북자들이 중국 등지에서 사실혼 관계로 살며 아이를 낳았다가 뒤늦게 한국에 입국해 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례도 많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고려인으로 살다가 뒤늦게 한국인이 되기 위해 한국을 찾는 청소년도 많다. 다양한 다문화가정 형태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중도입국 자녀 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중도입국 자녀의 사회 적응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야 하는 부분이다. 중도입국 자녀를 오랫동안 돌봐온 사단법인 밝은미래 경기도지부 박경희 대표는 “한국말을 모르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적은 상황에서 무작정 부모를 따라 입국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이럴 경우 적응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넓은 의미에서 중도입국 자녀들은 외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살고 싶어하니까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청소년 문제를 일으키곤 합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재외동포의 관점에서 중도입국 자녀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 선도적인 지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한 재외동포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중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남겨진 독립유공자 자손 문제는 비교적 잘 알려진 문제 중 하나다. 독립유공자 자손의 국적회복을 도왔던 김시명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에 따르면 많은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고민할 여력도 없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조상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고 알려주면 그제서야 자신의 핏줄에 자부심을 느끼고 더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시 한국에 들어와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알리고 지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지요. 그래서 다시 중국으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는 자손들도 많습니다.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도 돌아가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고려인 문제 역시 한국에 돌아오는 고려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점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부분이다. 고려인은 재외동포법에 의해 체류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지만 활동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재외동포비자(F-4)는 최대 90일까지만 체류가 가능하다. 그나마도 재외동포법에서는 4세대부터는 재외동포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역사가 오래돼 대부분 10~20대 젊은 고려인은 4세대 고려인이다. 이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한국에서 정착하고 싶어하지만 재외동포 지위조차 인정받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재외동포를 미래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적으로 각국에 정착한 재외동포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도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상황이다. 더구나 사각지대에서 한국 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재외동포의 문제는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재외동포가 힘이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사각지대에 있는 재외동포를 선제적으로 발굴해 장차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방지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영토와 국적에 관계없이 더 넓고 다양해질 미래의 한국 사회에서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 재외동포다. 온전한 재외동포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소통하려면 지금부터 나서야 한다. 재외동포가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지금이 적기(適期)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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