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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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에 관심이 많아서 1990년대부터 일본을 자주 갔어요. 거기선 집에서 밥을 먹든 식당에서 밥을 먹든 항상 밥맛이 뛰어났죠. 그게 참 부러웠습니다.”

지난 10월 10일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흥천농협에서 이태영(57) 여주 흥천농협 상무를 만났다. 여주 토박이인 이 상무는 37년간의 농협 생활 중 30년을 흥천면 바로 옆의 가남읍에서 보냈다. 여주 가남농협 태평지점에서는 3년간 지점장을 맡기도 했다.

37년 동안 여주 농협에서 근무한 이 상무는 1981년 농협 입사 때부터 쌀에 관심이 많았다. 주로 쌀 수매·유통과 품종 개발 쪽에서 일해온 그가 농협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 것은 2005년 농림부장관상을 받은 일이다. 당시 이 상무에게 상을 안겨준 것은 ‘저온쌀’이었다. 지금은 쌀 저온보관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어 있지만 이 상무가 처음 저온쌀을 발견해낸 2000년대 초반에는 쌀을 저온에 보관한다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 상무는 뛰어난 품질의 쌀이 나기로 유명한 여주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 쌀 앞에서는 작아졌다. 바로 옆 나라인데 왜 일본 쌀은 우리 쌀보다 더 맛있을까.

이 상무가 찾아낸 것은 쌀을 보관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벼는 수확한 뒤 껍질을 벗겨내야 먹을 수 있다. 이 공정이 도정(搗精)이다. 벼에서 왕겨 부분만 벗겨내면 현미가 되는데, 현미에는 건강에 유익한 성분이 많지만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보관이 쉽지 않다. “일본에 가보니 현미 상태의 쌀을 종이 포장지에 조금씩 분할해서 보관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백미 상태로 보관했죠. 밥맛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쌀을 수확하면 산지에서 방아를 찧어서 현미로 보관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한 번 더 껍질을 벗겨낸 백미로 보관한다. 가을에 쌀을 수확해 백미 상태로 보관하면 이듬해 4월쯤 됐을 때 급격히 밥맛이 떨어진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쌀을 현미 상태로 보관할 만한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상무의 설명이다. “우리나라는 현미 보관이 안 돼서 백미로 보관하거나 아예 벼 상태로 보관해요. 이듬해에 도정을 하면 밥맛이 엄청 떨어지죠. 보통 상온에서 보관을 하니까요. 상온에 쌀을 보관하면 쌀이 금방 맛이 없어져요.”

현미 보관 일본, 백미 보관 한국

이 상무가 찾아낸 방법은 수확한 쌀을 섭씨 11도에서 18도 사이의 저온창고에 보관하는 것이다. 쌀 저온저장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설치비와 전기요금 등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저온저장소를 갖춘 정미소는 전국을 합쳐도 한두 곳에 불과했다. 그는 과일 보관창고를 시험 대상으로 사용했다. “추운 1월이나 2월에는 과일을 보관하는 창고에 저장할 게 없어서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한번 실험적으로 해봤는데 생각보다 밥맛이 좋아서 상품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했죠.”

이 상무의 실험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쌀을 아예 섭씨 11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 보관했다. 쌀을 저장할 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쌀을 외부로 꺼내자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꺼내자 쌀이 쉽게 변질된 것이다. 차가운 곳에 벼를 보관하다 꺼내면 이슬이 맺히는 결로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걸 몰라서 실패를 맛봤습니다. 여름에 주전자에 찬물을 넣으면 표면에 물이 맺히는 것처럼 벼도 기온 차가 너무 급격하게 나면 변질돼버려요. 그래서 첫해는 실패했습니다. 쌀이 몽땅 상해서 전부 버려야 했어요”

이 상무는 수년간의 실험 끝에 적정온도를 찾아냈다. 그가 찾아낸 저온쌀 보관 적정온도는 세 가지. 섭씨 11도, 15도, 18도이다. 특히 저장고 내부 온도와 외부 기온이 섭씨 10도 이상 차이가 나면 쌀을 상온에 꺼내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변질되기 때문에 지나친 저온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상무는 이렇게 개발해낸 쌀을 ‘농촌풍경’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개발했다. 저온창고에 보관한 고시히카리 품종 ‘저온쌀’을 소량으로 나눈 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의 포장지로 감싸 판매했다. 계절별로 디자인된 포장지에 담긴 쌀을 다 먹고 포장지를 잘라내면 엽서가 된다. 당시 이렇게 판매한 ‘저온쌀’은 일반 쌀에 비해 20% 이상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이 두 배 이상 높았다는 것이 이 상무의 설명이다. 그는 저온쌀을 개발해낸 공로로 2005년 농림부장관상을 받았다. 하지만 2010년 여주 8개 지역농협이 여주시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을 설립해 양곡 업무를 한 군데로 합치면서 아쉽게 저온쌀 생산은 중단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본에 여행가서 식사를 하면 밥이 맛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쌀 보관법의 차이, 품종의 차이 외에는 어떤 이유가 더 있을까. 이 상무는 일본 쌀밥이 맛있는 이유를 “과학적 생산과 관리 덕분”이라고 짚었다. “일본은 쌀을 수확할 때부터 정말 과학적으로 해요. 고시히카리(밥맛이 좋기로 유명한 품종)를 재배하는 지역에 가면 인공위성으로 수확 시기를 맞춥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미 그 정도 수준이었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게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농업인이 그렇듯 이 상무의 최근 고민거리는 농촌의 고령화다. 갈수록 농민들이 고령화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활력이 줄어들면서 농가소득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상무는 농협이 농가소득 증진에 앞장서기 위해서는 일본의 과학적 쌀 수확과 관리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농촌의 일손이 부족해질수록 쌀을 과학적으로 수확하고 관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쌀을 지켜내려면 계속 연구해야죠. 제대로 한다면 우리 밥맛도 일본에 밀리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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