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서귀포시 ‘야자나라’에서 희귀식물을 키우고 있는 김세종 대표의 모습.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 ‘야자나라’에서 희귀식물을 키우고 있는 김세종 대표의 모습.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한 분야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덕후’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덕후, 여행 덕후는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식물 덕후’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식물을 발견하고, 구분하고, 키우고, 관찰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식물 덕후들에게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면, 제주도다.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포구 인근. 위로는 한라산 백록담, 아래로는 제주 남쪽바다 범섬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땅에 커다란 온실이 들어섰다. ‘야자나라’라는 이름이 붙은 4층짜리 건물 옆으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온실이다. 2015년부터 조금씩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온실의 면적은 지금 2600㎡(약 800평)에 이른다. 개폐 가능한 천창, 최신식 온도조절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1000종을 어림잡는 식물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모두 다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식물들이다. 한국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식물도 많다. 이름도 낯설고 모양도 낯설어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낸다.

‘야자나라’의 온실은 해마다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차로 10분 달려가면 근 6600㎡(약 2000평)에 달하는 온실 두 곳을 더 찾아볼 수 있는데 온실 가득히 자라나고 있는 식물의 수만 해도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하나하나가 다 희귀식물들인데 모두 야자나라에서 씨를 심어 발아시킨 것들이다. 개중에는 씨앗 하나에 10만원 하는 희귀식물도 있고 씨앗 1000개를 심어 겨우 하나를 발아시킨 예민한 식물도 있다.

1958년생인 야자나라 김세종 대표는 지난 6년간 식물 덕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희귀식물 천국을 손수 만들어냈다. 원래 식물을 키우던 사람은 아니었다. 흙이라곤 평생 만져본 적 없던 그가 돌연 씨앗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2012년, 6년 전의 일이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영·미 분석철학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국내 대학 강단에 서다가 쉰이 넘은 나이에 진로를 바꿨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는 결심 때문이었죠. 제주에 내려오기 전해에 저는 평생 생각해오던 바를 정리해 글을 썼습니다. 철학자로서 공부한 것, 적지 않은 경험을 통해 느낀 점 등을 정리한 글이었죠. 그러면서 어렴풋하던 생각,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삶의 목표가 됐습니다.”

김세종 대표의 글은 우연히 그의 글을 읽어본 지인의 권유 덕분에 ‘무신론자들을 위한 변명’(소이연출판사)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음에도 영생과 구원이 아닌 현재의 삶과 가치를 중요시하게 된 그의 현실주의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14년 박사생활 끝의 깨달음

김세종 대표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데에만 14년이 걸렸다. 그전에 석사학위를 받는 데에도 3년의 시간을 들였으니 도합 17년이 걸린 셈이다.

“저는 어릴 때부터 참 공부하기를 싫어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의 기대에, 주변의 격려에 제가 그나마 잘하는 것이 공부였으니 억지로 참고 했던 거죠. 나이가 들어 진지하게 공부를 하려고 하니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세부 전공을 바꿔가며, 논문 쓰기를 미뤄가며 14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철학자라면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는 질문의 답을 찾으려 책을 읽고 생각에 잠겨 글을 썼다.

“철학자들이, 종교인들이 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 제 결론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현세를 살다 가는 아주 잠시간의 것입니다. 내세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과연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더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은 그걸 통해서 현실을 가리려는 눈속임일 뿐입니다. 더 중요하고 벗어날 수 없고 직관적인 것은 현재의 삶입니다.”

철학자로서 김세종 대표는 진리는 변화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현실에서 자신이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까지 공부를 하다 보면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발견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저는 오히려 대행 스님의 ‘영원한 나를 찾아서’를 읽다가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대행 스님은 자기를 믿고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삼으라고 했죠.”

얼핏 듣기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세종 대표의 말에는 구체적인 것이 있다.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중요해지는 것들이 있다. 변화와 성장, 경험이다.

와닿지도 않고 체감할 수도 없는 내세의 삶이나 비현실적인 진리가 아니라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불꽃놀이’ 같다는 것이 김세종 대표의 인생관이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거창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경험을 통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김 대표의 삶, 철학과 식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연결된다.

“저는 어릴 적부터 식물을 참 좋아했어요. 나이가 들어서도 그건 마찬가지라 어떨 때는 집에서 기르는 식물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죠. 줄기를 보고 있으면 무럭무럭 자라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어요. 줄기가, 이파리가 어떻게 자라날지, 얼마나 무성해질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할 지경이었죠.”

2011년 그는 학자로서 그동안 연구하고 생각한 바를 글로 옮겼다. 마침 일신상의 변화도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치열하게 살아간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터전도 마련했다.

“50년 동안 저에게 일과 직업은 일종의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일, 죽을 때까지 평생 즐길 수 있는 일을 찾고 그것에 몰두하기 위해서 준비해왔던 거죠.”

2012년 그는 몇 년에 걸쳐 눈여겨보던 제주도 서귀포시 현재의 ‘야자나라’가 세워진 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펜션을 운영하며 취미생활을 즐길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흙과 땅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말 그대로 취미생활로 씨앗을 수집했다.

“희귀하고 진귀한 식물들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구하기 어려워 희귀식물종의 씨앗을 보관해 판매하는 독일의 전문 종자기업에서 힘들게 구해 들여오곤 했죠. 처음에는 컨테이너에 잔뜩 씨앗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씩 싹을 틔우고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온 사방이 식물 화분으로 뒤덮여지더군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펜션 건물 바로 옆에 온실을 세웠습니다.”

점차 싹을 틔우는 식물의 수가 많아졌다. 맨 처음 ‘야자나라’라고 이름을 붙인 계기가 된 식물, 야자나무과(palm)만 해도 120여종의 씨앗이 싹을 터 갖가지 모양으로 자라났다. 소철(Cycas)은 90여종이 자라났다. 알로에며 선인장도 희귀한 종류로만 싹을 틔웠다. 선인장과 닮은 유포르비아(Euphorbia)는 50종 넘게 태어났다. 1000종의 희귀식물이 5만그루 넘게 온실을 가득 채웠다.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한국은 물론 아시아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씨앗만 모았으니 어떻게 키워야 한다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지요. 혼자서 공부하고 끙끙대며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10만원짜리 씨앗을 100개 들여와서는 5개 겨우 발아시키기도 했습니다.”

‘야자나라’ 온실의 전경.
‘야자나라’ 온실의 전경.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철학자

온실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3년 넘게 길렀다는 파파야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에 기대 서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김세종 대표는 노랗게 익은 파파야를 하나 따 내려왔다.

“한국에도 제주도를 중심으로 파파야 나무를 키우기는 하는데 열매가 맛이 없습니다. 왜 맛이 없는지 아세요? 우연히 한국에 들여온 파파야나무 품종이 하필이면, 맛이 없는 거였기 때문입니다. 파파야에도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 모릅니다. 조금 더 알고 들여왔다면, 특히 맛있는 품종을 들여와 길렀다면, 한국에서도 파파야의 인기가 더 올라갔겠지요.”

김세종 대표의 말을 듣다 보면 좁은 땅, 한정된 기후에 갇혀 미처 알지 못했던 식물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왕야자(Queen Palm)’라고 불리는 야자나무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비롯한 아열대지방에서 매우 흔한 식물 중 하나다. 대개 15m 높이로 매우 빠르게 자라나는 중간 크기의 야자나무인데 영하 5도의 환경에서까지 버틸 수 있다. 한국에서는 소수의 식물 덕후를 제외하고는 키워보지 못한 이 식물을 김 대표는 온실 곳곳에서 키워내고 있다.

매크로자미아 맥도넬리(Macrozamia Macdonnellii) 소철은 한국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다. 호주의 맥도넬(Macdonnell) 지방에서 자라는 희귀종이다. 중국 남부 광시좡족자치구의 디바오(Debao) 지방 이름을 딴 ‘디바오 소철(Cycas debaoensis)’도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야자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네다섯 군데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희귀한 식물이다. 김 대표는 디바오 소철만 여러 그루 싹을 틔워 건강하게 키우고 있다.

“한국에도 알고 보면 식물 덕후가 참 많거든요. 우연히 야자나라를 알게 된 식물 덕후들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탄성을 지릅니다. 힘들게 키워낸 식물을 사기 위해서 구경이라도 해보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사실 김세종 대표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이 따로 있다. ‘플랜트헌터(Plant Hunter)’라고 희귀식물을 수집해 키우는 전문가 직업군이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의 유명 플랜트헌터 중에는 한국 기업과 협업하는 사람도 있고, 세계적인 희귀식물 씨앗 기업을 세워 성공한 플랜트헌터도 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해보니 최소한 일본이나 주변 국가에서 저만큼 많은 희귀식물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나 식물원이 없더군요. 한국에서 식물원은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을 정리해 전시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됩니다. 식물원은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식물을 통해 생태계의 다양성에 대해 체감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야자나라의 온실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식물 생태계의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 덕후들이 비행기 타고 차를 몰아 제주도 서귀포까지 찾아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금 늦어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지금 모습만 두고 보자면 김세종 대표의 삶은 누구나 꿈꾸던 것의 근사치에 다가가 있다. 산과 바다가 함께 내려다보이는 땅에, 죽을 때까지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을 묻어 두고, 사람들에게 꺼내 보이면서 ‘멋지다’는 격려를 받는 삶. 그러나 김 대표의 삶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던 게 아니다.

“유학을 갔으면 남들은 적어도 10년이면 따는 박사학위를 저는 17년이 걸렸고요 결혼도 늦게 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신체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기도 했어요. 그러나 저는 그 고통들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일이 잘 풀렸다면 지금 제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살자’ ‘꿈을 찾자’는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얼마 전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책에서 접하던 철학자 이름과 그들의 질문을 꺼내들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친구들이다.

“제가 아직도 그 문제를 고민하며 해답을 찾고 있다고 하자 친구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하더군요. 그때의 그 질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질문을 잃어버린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무엇을 즐길 수 있는지, 행복하게 사는 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채 ‘어딘가에 누군가가 약속해줄’ 허구의 것을 바라보고 살겠지요.”

삶은 예측불가능하고 변화하며 다양하게 구성되는 것이다. 그는 희귀식물 중 미촐리치 소철(Cycas Micholitzii)을 키우던 일을 예로 들었다.

“희귀식물이라 해서 씨앗을 들여와 키우는데, 이 식물이 어떻게 자라날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키우다 보니 무척 신기한 식물이더군요. 보통은 잎이 줄기에서 갈라지잖아요. 그런데 이 식물은 잎 자체가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잎이 또 두 갈래로 갈라져요. 그러니까 한 줄기에서 잎이 8갈래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16갈래로 갈라질지는 조금 더 키우면서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키우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일이죠.”

그러니까 벌어지기 전에는 전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완전히 새로운 일이 벌어져도 인생을 즐길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일부분으로 포함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이 가능하다.

“오히려 저는 노인들에게 강연을 가서 ‘노인들이여 꿈을 가져라’라고 말하고 옵니다. 경험의 폭이 넓은 노인들이야말로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도, 중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뿐인 인생, 살면서 꿈을 가지기 위해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거죠.”

요즘의 신조어로 한바탕 신드롬을 일으킨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와도 맞닿아 있는 얘기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문장의 약자(略字)를 그대로 삶의 가치관에 적용시킨 욜로는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나이와 성별, 직업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처지에서 최대한 삶을 즐기고 만족해하며 행복하게 살자는 삶의 방식이다.

“현재에 충실하자, 꿈을 찾자는 얘기가 마냥 낙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꿈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거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살아가고 있는 방식 그대로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방식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우리 삶은 이대로도 괜찮은 겁니다. 꿈을 찾기 위해서 살고 있다면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만 해도 됩니다.”

김 대표의 말은 현실세계에 그대로 구현돼 있다. 어느 식물원처럼 체계적이지 않아도, 생계를 위한 것처럼 치열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그때그때를 즐겨가며 피워낸 식물들이 말의 증거다. “지난 몇 년간 살아온 그대로, 희귀한 식물을 모으고 키워내다가 언젠가는 세계적인 희귀식물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또 다른 꿈”이라는 그에게서는 온실 가득한 식물과 같은 생명력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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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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