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노송영지(老松靈芝)’, 지본담채, 103×147㎝, 개인 소장
정선, ‘노송영지(老松靈芝)’, 지본담채, 103×147㎝, 개인 소장

소나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무이며 가장 중요한 수종이고, 우리 민족이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신목이다. 한국인은 일생을 소나무와 함께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신석기시대 배가 경남 창녕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재료가 소나무였다. 8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등재되어 있다. 소나무는 약 2억5000만년 전부터 이 땅에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한반도에서 살기 시작했을까.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이 대략 10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때가 기원전 2333년이니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소나무라 할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6세기 후반에 그려진 진파리1호분 묘실 북벽에는 뱀과 거북이가 한 몸인 현무(玄武)가 등장하는데 현무 양쪽에 각각 두 그루의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다. 소나무도 현무처럼 영성과 신성을 갖춘 신령스러운 존재라는 의미다.

산에 있는 산신당의 신목은 거의 소나무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도 소나무가 많다. 하늘에서 신들이 하강할 때 신성한 소나무를 통해 강림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신목의 명성에 걸맞게 천 년을 산다. 성스러운 신령이 한두해살이풀 같은 나무에 깃들 리 만무하다. 소나무는 ‘송수천년(松壽千年)’이라는 아이콘에 화답하듯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에도 당당하게 그 명패를 걸어두었다. 사마천(司馬遷·BC 145년경~BC 85년경)은 사기(史記) ‘귀책열전(龜策列傳)’에서 소나무와 잣나무(松柏)를 일컬어 ‘백목지장(百木之長)’이라 칭송했다. 모든 나무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사마천이 비록 송백을 뭉뚱그려 백목지장이라 칭했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엄연히 그 급수가 다르다.

왕안석(王安石·1021~1086)은 ‘자설(字說)’에서 소나무에게는 공(公)의 작위(爵位)를, 잣나무에게는 백(伯)의 작위를 주었다. 서열에서부터 밀린다. ‘조선왕조실록’에 소나무를 검색해보면 738회 등장한 반면, 잣나무는 84회 등장한다. 명성으로 보나 중요도로 보나 소나무가 잣나무보다 한 수 위라는 뜻이다. ‘용비어천가’에서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세’라고 했을 때의 뿌리 깊은 나무도 소나무가 분명하다.

소나무와 함께 살아온 한민족

소나무는 조선시대 그림에도 가장 많이 등장한다. 소나무 한 그루만을 주인공으로 삼은 단독그림은 물론 수많은 수종이 뒤섞여 있는 산을 그린 그림에서도 소나무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조선 후기 수많은 진경산수화가들이 그린 금강산도, 인왕산, 남산 등의 그림에는 모두 잘생긴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노송영지(老松靈芝)’도 조선인의 소나무 사랑을 말해준다. 휘어지고 굽어진 늙은 소나무를 배경을 생략한 채 화면 가득 채워 넣었다. 소나무 뿌리 부분에 영지버섯도 곁들였다. 영지는 불로초라고 부르듯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상상의 약초다. 노송과 영지가 모두 십장생에 들어간다. 영지버섯 반대편에 ‘乙亥秋日 謙齊八十歲作(을해추일 겸제팔십세작)’이라고 써 넣은 것을 보면 그의 나이 80세 되던 1755(乙亥)년 가을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정선은 ‘노송영지’에 버금갈 정도로 우람한 필치의 ‘노백도(老柏圖)’도 한 점 남겼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비록 성골과 진골처럼 출신성분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물에서 노는 클래스로 인정해줬다. 정선은 소나무를 즐겨 그렸다. 사직단에 있는 소나무를 그린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와 ‘반송도(盤松圖)’, 노송의 일부분만 강조해서 그린 ‘고송도(古松圖)’와 ‘노송대설(老松大雪)’은 소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작품이다. 반면에 소나무 가지에 매미가 앉아 있는 ‘송림한선(松林寒蟬)’, 소나무 위에 앉은 다람쥐를 그린 ‘다람쥐’는 소나무가 길러낸 초충(草蟲)의 세계를 보여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함흥본궁의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도 볼 만하다. 정선처럼 다른 화가들도 소나무를 단독 화제로 선택해서 그렸다.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와 정수영(鄭遂榮)의 ‘쌍송도(雙松圖)’, 허필(許佖)의 ‘쌍송교노(雙松交老)’가 일품이다.

정선을 비롯해 수많은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린 소나무를 보면, 아예 삶 자체가 소나무 사이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벗들과 만나서 대화할 때도 소나무 아래를 선택했고(이인문 ‘송계한담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아회(雅會)장소도 역시 소나무 아래였다(‘미원계회도’ ‘하관계회도’, 정수영 ‘백사동유도’, 이인문 ‘송계아집’,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신윤복 ‘송정아회’). 차를 마셔도 소나무 아래에서 물을 끓였고(심사정 ‘송하음다도’), 붓을 들어 시를 쓸 때도 소나무 아래였다(이재관 ‘전다도’).

바둑을 둘 때도(이경윤 ‘송하대기도’, 김홍도 ‘위기도’), 장기를 둘 때도(조영석 ‘현이도’), 활쏘기를 할 때도(강희언 ‘사인사예’), 폭포를 감상할 때도(윤인걸 ‘거송관폭도’, 이인상 ‘송하관폭도’, 윤두서 ‘무송관수도’) 소나무 아래를 고집했다. 독서할 때도(이수민, 이명기, 이인상, 김희겸이 모두 ‘송하독서도’를 그렸다), 수업할 때도(이인상 ‘송하수업도’, 이인문 ‘연정수업도’), 낚시할 때도(이재관 ‘귀어도’), 계곡물에 발을 담글 때도 소나무 아래였고(윤덕희 ‘송하탁족도’, 김희겸 ‘좌롱유천’), 눈 올 때 고기를 구워먹어도 굳이 소나무 아래였다(임득명 ‘설리대적’). 낮잠 잘 때도(윤덕희 ‘송하오수도’, 이재관 ‘송하오수도’, 김희겸 ‘산정일장’, 이재관 ‘오수도’), 향을 사를 때도(윤제홍 ‘송하분향도’), 담배 한 대 피면서 휴식을 취할 때도(이교익 ‘휴식’) 소나무가 아니면 자리를 옮겨 갔고, 심지어는 걸을 때도 소나무 아래 길을 택했다(이상좌 ‘송하보월도’, 이인문 ‘송림야귀도’). 노승(老僧)이 쉴 때도(조영석 ‘노승헐각’), 탁발할 때도(오명현 ‘노상탁발’), 산사로 돌아갈 때도(이징 ‘연사모종도’), 호랑이를 쓰다듬을 때도(정선 ‘송암복호’) 언제나 소나무 아래였다.

어린아이가 가지 않으려 버티는 나귀와 씨름할 때도 소나무가 지켜보고 있었고(김시 ‘동자견려도’), 젊은 과부가 인생을 한탄할 때 걸터앉은 나무도 소나무였으며(신윤복 ‘과부’), 물고기를 잡은 가장이 밤늦게 귀가할 때도 가난한 집을 지켜준 것은 어김없이 늙은 소나무였다. 매가 토끼를 잡아먹을 때(심사정 ‘호응박토도’), 까치가 울 때(조영석 ‘송작도’), 선비가 아무 생각 없이 먼 산을 바라볼 때도 소나무 아래였다(이재관 ‘송하처사도’, 강세황 ‘송하인물도’).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도연명을 그리워할 때도(윤두서 ‘무송관수도’),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를 읊으며 가도(賈島)의 천재성을 생각할 때도(장득만 ‘송하문동자도’), 소나무 아래였다.

어디 그뿐인가. 이익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의 염량세태를 보며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공자님의 말씀을 되새긴 것도 소나무 아래였다(김정희 ‘세한도’). 노자(老子)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지나갔다는 고사를 그릴 때도 소나무가 등장하고(정선 ‘청우출관’), 행복한 인물의 대명사로 통하는 곽분양의 화려한 집을 그릴 때도(‘곽분양행락도’), 서왕모(西王母)가 곤륜산 요지에서 베푼 연회 장면에도(‘요지연도’),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의 소망을 담아 수많은 사내아이들이 부유한 집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그릴 때도(‘백동자도’) 소나무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말해 소나무는 조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묵묵히 지켜본 이 땅의 증언자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 ‘송하선인취생도’, 지본담채, 109×55㎝, 고려대박물관
김홍도, ‘송하선인취생도’, 지본담채, 109×55㎝, 고려대박물관

소나무에 담은 소망

소나무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되어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신선을 그릴 때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소나무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대개 은자(隱者)나 고사(高士) 또는 노승(老僧)이 많은데 신선도 그에 못지않게 자주 얼굴을 비춘다. 김홍도(金弘道·1745~?)가 그린 ‘송하선인취생도(松下仙人吹笙圖)’는, 신선이 소나무 아래서 생황을 불고 있는 모습이다. 제시(題詩)는 당나라 시인 나업의 ‘생황에 대하여 짓다(題笙)’의 일부분이다. 즉 ‘봉의 날개같이 들쭉날쭉한 대나무관(筠管參差排鳳翅)/ 달빛이 비쳐 드는 방 안에서 생황 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처절하게 울린다(月堂淒切勝龍吟)’라는 구절이다. 그림은 생황을 불고 있는 선인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주인공은 선인인데 소나무가 더 빨리 눈에 들어온다. 눈을 사로잡는 소나무에 끌려 자세히 훑어보니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소나무의 윗부분에 왼쪽으로 뻗은 솔잎 위에는 세 가닥으로 그려진 줄기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용 같다. ‘생황 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처절하게 울린다’는 시를 형상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소리 없는 시라고 했던가.

시인들은 즐겨 소나무를 용에 비유했다. 당(唐)의 시인 이산보는 용틀임하는 노송의 모습을 ‘땅에서 솟아오른 푸른 용이 구름을 품고 있는 듯’하다고 묘사했다. 조선시대의 강희안도 ‘천길 용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고 감탄했다. 예전의 시인들은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의인화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대상에 사람의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했다. 김홍도뿐 아니라 조선시대 많은 화가들이 선인(仙人)이나 신선을 그릴 때 소나무를 배경으로 그렸다.(윤덕희 ‘송하고사도’, 김명국 ‘산수인물도’, 이인상 ‘검선도’, 이인문 ‘선동전약’, 장승업 ‘춘남극노인’)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역시 소나무가 빠지면 서운하다.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송하맹호도’는 우리나라 산천을 휘젓고 다닌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굳이 호랑이를 소나무 아래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소나무가 백목(百木)의 왕이기 때문에 백수(百獸)의 왕인 호랑이와 함께 그려야 등급이 같아진다. 짐승의 왕인 호랑이가 천 년을 사는 소나무 아래 서 있는 그림이니 그 어떤 잡귀나 부정한 기운이 와도 전부 다 막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수많은 민화 ‘송하맹호도’가 그려지게 된 배경이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숱한 난관들을 소나무가 갖는 벽사력(辟邪力)에 기대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반영된 그림이다.

소나무는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하는 신성한 나무다. 그래서 막 태어난 아기가 아플 때면 삼신할머니에게 빌기 전에 맑은 샘물을 떠서 솔잎에 적셔 방안 네 귀퉁이에 뿌렸다. 소나무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그 자체가 성수다. 소나무는 혼례식의 초례상에 대나무와 함께 꽂았다. 이것은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부부가 백년해로하라는 의미가 더 컸다. 소나무의 잎은 두 개가 한 입자루 안에서 나오는데 아랫부분이 서로 붙어 있다. 그래서 음양수라 부른다. 음양수는, 남녀가 부부가 될 때부터 한 몸이듯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질 때도 함께한다는 의미이니 이보다 더 강렬한 부부애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뮐세

그렇다면 서민들의 삶이 아닌 궁궐 안에 계신 높으신 분들은 소나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일월오봉도’는 양쪽에 소나무가 배치되고 그 가운데 해와 달, 다섯 봉우리와 폭포, 물결치는 파도가 완벽하게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궁궐 그림이다. 좌우대칭은 오른쪽과 왼쪽의 비중이 똑같다는 뜻이다. 한쪽으로 기울거나 쏠리지 않고 저울에 추를 올려놓듯 균형 잡혀야 한다.

‘일월오봉도’는 왕 그 자체다. 왕이 정전이나 편전에서 회의를 주재하거나 집무를 볼 때 어좌 뒤에는 항상 ‘일월오봉도’를 펼쳤다. 왕이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배경으로 설치해 왕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했다. ‘일월오봉도’는 그림 앞에 왕이 앉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왕이 그림 중앙에 앉았는데 배경 그림의 구도가 한 방향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고 상상해보라. 안정감이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그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이유다. 수직적인 선보다 수평적인 선을 강조한 원인이다.

궁궐에서 쓰는 그림이다 보니 채색이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일월오봉도’를 그릴 때는 그 앞에 왕을 그리지 않았다. 워낙 존귀하신 분이라 함부로 그릴 수 없다. 대신 ‘일월오봉도’만 그려서 왕의 임어(臨御)를 말해준다. 부재(不在)가 곧 현존이다. 진찬연(進饌宴)이나 진하례(陳賀禮) 등의 궁중기록화에서 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왕은 보이지 않고 ‘일월오봉도’만 등장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그런데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고 국민이 왕이 되는 민주주의 시대다. ‘일월오봉도’의 앞에 앉는 사람이 곧 국민이란 얘기다.

높으신 분들의 소나무 사랑은 ‘일월오봉도’로만 끝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소나무와 관련된 내용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니 소나무와 관련해 대략 세 가지 사업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소나무를 심는 재식과 육성에 힘쓰는 재송, 둘째는 송충이를 잡는 일, 셋째는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는 ‘송목금벌’이다. 소나무를 심는 일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옮기면서부터 본격화됐다. 한양은 조선 정부에 의해 계획된 신도시였다. 조선 정부가 소나무를 심은 근거는 ‘예기’에서 ‘천자는 소나무를, 제후는 잣나무를, 대부는 밤나무를, 사(士)는 느티나무를 심고, 서인(庶人)은 나무를 심지 못한다’고 기록된 것에 근거한 것처럼 존비와 귀천에 따라 구분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소나무를 심고 육성한 이유가 단지 예법에 따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소나무야말로 국가 방위에 꼭 필요한 병선(兵船)과 조선(漕船)을 만드는 재료였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육지를 통해 침입하는 외적뿐 아니라 바다에서 침략하는 왜적도 막아야 했다. 왜의 한반도 침략은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에 맞서 해상국가 방위 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우수한 병선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세종, 성종, 중종, 선조, 영조, 정조 등등 그 어떤 왕을 막론하고 모두 소나무를 심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411년 1월 7일 ‘태종실록’을 보면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각령의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500명씩과 경기(京畿)의 장정 3000명을 데리고 남산(南山)과 태평관(太平館)의 북쪽에 무릇 20일 동안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양에 심은 나무는 소나무뿐만이 아니었다. 1434년 4월 24일 ‘세종실록’에도 병조에 일러 ‘남산의 안팎 쪽과 백악산, 무악산, 성균관동, 인왕산 등과 같이 소나무가 희소한 곳에는 잣나무나 상수리나무 등을 심게 하라’고 전해진다. 애국가의 한 구절처럼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한 모습은 역대 왕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나타난 결과였다.

그러나 윗선에서는 지시만 내리면 끝이지만 막상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현장에서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616년 2월 15일 ‘광해군실록’을 보면 판윤이 백성들에게 소나무 심는 일을 독촉하자 이렇게 하소연했다는 시가 남아 있다. ‘남산 소나무는 북산의 소나무가 되고, 북산 소나무는 남산의 소나무가 되었네. 날마다 옮겨 심어 끝날 날이 없으니 산 소나무가 죽은 소나무가 되었네.’

‘일월오봉도’, 견본채색, 149.3×325.8㎝, 국립고궁박물관
‘일월오봉도’, 견본채색, 149.3×325.8㎝, 국립고궁박물관

소나무 벌목의 주범은 누구

송충이도 문제였다. 아무리 고생해서 소나무를 심어도 송충이가 발생하면 소나무가 거의 고사되기 마련이어서 조선 정부로서는 송충이가 큰 골칫거리였다. 송충이는 전국의 산야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1403년 4월 21일에 태종은 1만명의 백성들을 송악산에 풀어 송충이를 잡게 했다. 1450년 3월 21일에 문종은 헌릉의 송충이를 잡으라 명했다. 오죽하면 세종은 송충이의 피해가 심한 소나무 대신 밤나무를 심으라고 명할 정도였다.

송충이를 잡는 백성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1741년 4월 11일에 송충이를 잡아서 날마다 세 되씩 바치라고 하자, 일부 주민들이 땅에 파묻은 것을 파서 다시 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언제나 가혹한 행정은 백성들에게 그 피해를 전가시킨다.

이런저런 이유로 병선을 만들어야 할 소나무는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았다. 흉년이 들면 백성들은 소나무껍질을 벗겨 주린 배를 채웠고, 날이 추우면 삭정이나 솔가리를 몰래 져다가 불을 땠다. 그 과정에서 생나무를 말라 죽은 나무라고 베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들이 소나무를 남벌하는 것에 비하면 백성들의 행위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소나무의 주 소비층은 왕족과 세도가와 벼슬아치들이었다. 1469년 3월 6일 ‘예종실록’에 보면, ‘무릇 소나무를 베는 자는 장(杖) 100대를 때리고, 그 가장이 만약 조관(朝官)이면 파직시키고, 한관(閑官)이나 산직(散職)이면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며, 평민이면 장 80대에 속(贖)을 징수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태종도, 성종도, 중종도, 정조도 벌목을 막기 위해 법을 어긴 사람을 수없이 징계하고, 파직하고, 처벌했지만 벌목의 폐단은 근절되지 않고 전국의 소나무산은 벌거숭이산으로 변질됐다.

왜 그랬을까. 법을 시행하는 주체가 곧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100년을 키워야 병선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더디 자라는 수종이다. 국가가 소나무를 기르는 것은 병선과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병선에 써야 할 소나무를 영선(營繕·건축물을 짓거나 수리함)에 사용했다. 왕실이 하는 것을 보고 대군과 부마가, 영의정과 좌의정이 뒤를 따랐고, 돈 있고 세도 있는 사람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이 화려한 누각을 짓기 위해 벌목한 소나무는 백성들이 땔나무로 갈퀴질한 솔가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세’라고 했는데 왕실과 고위관료들의 벌목은 바람이 아니라 불도저로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행위였다. 이런 현상이 어찌 조선시대만의 문제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에는 우리 모두 또다시 소나무 아래에서 살아가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 위해. 샘이 깊은 물이 되기 위해. 지치지 말고 걸어가야 한다.

키워드

#신년 특집
조정육 미술평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