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자본주의 상징물인 ‘황소상’. ⓒphoto 뉴시스
월가 자본주의 상징물인 ‘황소상’. ⓒphoto 뉴시스

지난 수십 년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뭔가 잘못돼가고 있음을 느껴왔다. 노동자들은 기업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것을 도왔지만, 임금은 생산성과 기업이익의 증가를 간신히 따라잡을 뿐이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자기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지 못하며, 기업이 거두는 이익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느끼는 패배감과 좌절감은 2011년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덮친 ‘월가를 점령하라’나 지난해 프랑스에서 시작된 ‘노란조끼 운동’ 시위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4년 출간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것도 그가 책을 통해 제시한 경제적 불평등을 사람들이 이미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판 이후 자본주의는 존립에 성공한 유일무이한 사회체제가 됐다. 스미스가 주창한 초기의 자본주의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수많은 수정과 변형을 거치며 지금의 글로벌 자본주의로 진화했다. 2017년 1월 미국은 성공한 사업가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맞이했고, 그의 당선은 마치 21세기 자본주의의 성공신화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을 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허울만 남은 자본주의”

“문제는 경쟁 실종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허울만 남았다. 자본주의에 혁명이 필요하다.”

2019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 혁명’을 향한 외침이 터져나오고 있다. 영미권, 특히 대기업 자본과 금융권에서 주류를 형성한 전문가와 언론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자유로운 경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영국 제조업자들의 독점을 문제 삼은 지 240여년이 지났지만 2019년의 세계 산업은 여전히 독점과 과점, 불공정한 산업 간 경쟁으로 찌들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보호주의자나 포퓰리스트들의 주장과 별개로 진짜 문제를 가지고 있다. 1997년 이후 미국 산업의 3분의 2는 소수의 기업이 장악했다. 현재 미국 경제의 10%는 단 4개 회사가 시장의 3분의 2 이상을 점유하는 산업으로 구성된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유럽 내 모든 산업 영역에서 상위 4대 기업의 평균 시장점유율은 2000년 이후 3%포인트나 증가했다. 두 대륙 모두에서 우세한 기업들이 쌓은 성은 더 견고해지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1월 커버스토리로 ‘더 넥스트 캐피털리스트 레볼루션(The Next Capitalist Revolution)’을 내보냈다. 이 매체는 이 특집기사를 통해 많은 경제적 병폐의 근간엔 왜곡된 시장지배력이 있다며 “독점을 파괴하고 경쟁을 회복할 때”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비정상적인 구조를 통해 기업들이 취득하는 이익은 대략적으로 총 6600억달러로 집계된다”며 “그중 3분의 2 이상이 미국에서 이루어지며, 미국에서 이뤄지는 이윤활동 가운데 3분의 1은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이루어진다”고 분석했다. 무(無)의 영역에서 등장한 IT기업들이 제품·서비스 제공 및 광고 지배력에서 동등한 경쟁자 없이 불공정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기사의 주요 골자였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로운 경쟁을 되살려 민간 부문 근로자들이 그 혜택을 받는다면 미국의 실질임금은 지금보다 6%는 인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 자유로운 경쟁은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줄 것이고, 소비자들은 몇몇 기업에 빼앗겼던 선택권을 돌려받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IT ‘빅5’ 10년간 436개 기업 인수

비슷한 시기에 자본주의 독점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요청하는 책이 나왔다. 미국의 금융전문가 조너선 테퍼가 쓴 ‘자본주의 신화’는 2018년 11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서 지난해 5월에는 경제학자 에릭 글렌 웨일이 쓴 ‘급진적 시장들’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이 불평등 심화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직면한 문제를 자본주의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주장들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본주의의 큰 흐름은 기업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자국 산업 보호가 세계 산업 영역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지금, 영미권 언론이 자유경쟁의 부활을 들고나온 것은 왜일까. 그 근간엔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나 규제 등이 오히려 소수 기업과 결탁하면서 소비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기술적 도태를 초래했다는 문제인식이 자리한다.

영미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 구하기’는 기존의 산업 영역인 금융·제조업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IT 거인들이 누리는 불합리한 구조에 집중한다. 특히 IT기업들이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독점력을 확장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실제로 알파벳(구글)·애플·아마존·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 등 이른바 ‘빅5’는 최근 10년간 436개 기업을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기업은 2017년 한 해에만 기업 인수에 316억달러를 들였다. 이들의 시가총액은 2019년 1월 현재 3조5000억달러(약 3900조원)를 웃돈다. 영국과 프랑스 등 한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구글은 인터넷 검색 시장점유율이 90%에 육박하고 있으며, 아마존의 전자거래 시장점유율은 2016년 38%에서 2018년 49.1%로 상승했다. ‘자본주의 신화’의 저자 조너선 테퍼는 “이들 IT 공룡은 자유로운 경쟁을 장려하는 실리콘밸리의 정신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경쟁자 없는 시장에서 인수와 합병을 통해 시장장악력을 키워가고 있다”며 경계했다. 새 자본주의 혁명주의자들은 IT기업이 전통 경제학의 메커니즘과 달리,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장을 키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IT기업의 시장 장악을 포함한 산업 집중도 증가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 영화 시장은 4개 회사가 90%를 넘는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3개의 거대 통신사와 2개의 거대 포털이 국내 디지털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다. 소수의 IT기업이 모바일 메신저, 모바일 페이먼트, 내비게이션, 교통수단 등으로 뻗어가며 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는 모양새다. 여기에 국가주도·재벌중심의 경제성장이라는 독특한 역사를 가진 한국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더해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14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제에서 매출액 기준 재벌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9.1%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재벌 계열 기업이 시장점유율 1위인 산업은 숫자상으로는 전체의 23.7%이지만, 이들 산업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8.5%에 이른다.

지난해 11월 자본주의 미래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지난해 11월 자본주의 미래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완전경쟁’을 외치는 신자본주의자들

‘신(新)자본주의자’들이 시장지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완전경쟁을 위한 제도 개혁이다. 기존의 사업자를 보호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지금의 제도와 법률을, 혁신과 신규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수 기업의 시장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규제를 만들거나 시장 독점을 용인한 것은 결국 정부였다. 결국 정부가 나서 비경쟁 조항이나 산업 로비스트들이 만들어낸 직업 허가 요건과 같은 진입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주장에는 페이스북 등 IT 기업들이 매년 지출하는 막대한 로비자금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구글은 미 정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지난 1년간 2100만달러 이상을 지출했으며, 페이스북은 1300만달러를 지출했다. 이 금액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노동자의 20% 이상이 일을 하기 위해 면허증을 소지해야 한다’며, ‘지나치게 복잡한 작업 규정이 산업의 집중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21세기에 걸맞은 독점금지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1890년 동종 기업의 카르텔을 제한한 ‘셔먼법’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오늘날 미국의 독점금지법은 소비자 보호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는 지적을 받는다. 새로운 자본주의론자들은 규제 당국이 시장의 경쟁 건전성과 자본 수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길 요청한다. 테퍼는 “경쟁 없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다”라며 “시장과 경쟁이 제대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역할과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독점’ 탓?

신자본주의자들은 국가 경제의 생산성 하락, 기술적 도태, 노동임금 하락 등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을 경쟁의 실종에서 찾고 있다. 이 같은 원인 분석은 일부 경제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좌파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부의 불평등 심화와 같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독점 탓으로 돌리고 있다”며 ‘시장근본주의’가 지녔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기업에 대한 모든 규제를 마치 독점기업이 뜯어가는 ‘통행료’로 몰아붙이는 건 지나친 비약이란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의 주장과 결을 같이하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구스타보 그루론도 이코노미스트와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제품 시장의 본성은 경쟁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지배적인 기업의 시장지배력 증가로 인한 경쟁의 감소가 ‘실물경제에 대한 투자 감소, 생산성의 저하, 창업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역동성 감소, 지배적인 기업의 가격 상승, 임금의 하락과 부의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그루론은 “‘경쟁 혁명’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21세기 자본주의가 또다시 생존을 위한 수정과 변형의 길에 들어설지 주목된다.

김경민 코인와이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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