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거시경제 전문가이자 ‘자본주의 신화’의 저자 조너선 테퍼. ⓒphoto Jonathan Tepper 제공
미국 거시경제 전문가이자 ‘자본주의 신화’의 저자 조너선 테퍼. ⓒphoto Jonathan Tepper 제공

2017년 4월 미국 일리노이주 오헤어국제공항에서 유나이티드항공편에 탑승했던 한 승객이 승무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끌려나왔다. 베트남계 미국인이었던 이 승객은 좌석이 초과 예약됐다는 이유로 강제 퇴거를 당했다. 다른 탑승객이 찍어 올린 현장 영상이 인터넷상에 공개됐지만 해당 항공사 측은 승객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소비자들의 분노는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애널리스트들은 항공사 통폐합으로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이 항공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그 분석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해 말 이 항공사는 적자는커녕 순익이 23억달러나 됐다.

미국의 경제전문가 조너선 테퍼(Jonathan Tepper)는 ‘독과점’과 ‘경쟁의 죽음’이란 키워드로 자본주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인물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했던 무절제한 경쟁적 자유시장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으며, 산업 영역에서 점차 커져가는 독점 구조가 자본주의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나아가 제한적 경쟁과 독점 구조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2018년 11월 출간된 책 ‘자본주의 신화’(The Myth of Capitalism·한국어판 미발간)를 통해 ‘자본주의는 이대로 괜찮은가’란 질문을 보다 대중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출판이 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이 책을 두고 몇몇 미국 언론은 2013년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펴낸 ‘21세기 자본’을 들먹이기도 했다. ‘21세기 자본’만큼 화제와 관심을 모았다는 의미다.

테퍼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허상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SCA캐피털,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에서 일한 금융전문가 출신인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자’라 규정한다. 그의 주장 끝엔 완전 자유경쟁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되살리는 길이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나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자본주의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적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한 언론은 이 말을 두고 “열성 자본주의자가 독점을 거부하고 나섰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자본주의를 개혁하고 경제력의 집중을 피하려면 자본주의와 반독점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테퍼의 주장과 결을 같이하는 ‘자본주의 다시 보기’ 움직임도 최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그 자체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 이후 자본주의는 조지프 스티글리츠, 제프리 삭스, 토마 피케티 등 세계 석학들의 펜 아래 수정과 변형을 거쳐왔다. 2019년의 자본주의 재고(再考) 움직임에 새로운 점이 있다면 자본주의의 수정·보완이 아니라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기본 정신을 되살리자는 주장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주간조선은 2월 초 이메일을 통해 조너선 테퍼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재 그는 미국과 영국에 기반을 둔 거시경제 연구그룹 배리언트퍼셉션(Variant Perception)의 대표이사(CEO) 겸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2009년 독립언론인들의 네트워크인 데모틱스(Demotix)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조직은 2016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설립한 디지털 이미지 은행 코비스(Corbis)에 인수됐다. 테퍼는 금융인으로 이력을 쌓았지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경제학과 역사를 전공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현대사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점 기업이 경제를 왜곡시킨다”

- 자본주의는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이 세계의 절대적 승자로서 군림했다. 지금 자본주의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뭔가. “소련이 몰락한 후 우리 산업구조는 사유재산을 위한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경쟁을 위한 전투에선 서서히 패배해왔다.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경쟁인데, 나는 오늘날 많은 산업 영역에서 ‘경쟁’이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봤다. ‘경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보는 많은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모조 자본주의(ersatz capitalism)’라고 부르는 상황들 말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자유롭고 경쟁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대부분의 산업이 소수의 기업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편집자주: 모조 자본주의는 고급스러운 경제 활동을 위해 경제에 인위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정부와 기업 등의 행위를 뜻한다.)

- 독점, 부의 편중 등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자체를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당신의 주장은 그들과는 달라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본다. 토마 피케티가 ‘내부적 모순’이라고 부른 것이 대표적이다. 어떤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나는 그런 문제조차 자본주의 자체가 아닌 경쟁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자본주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적은 것이다. 독점 기업들이 그들의 공급자와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시장을 왜곡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은 산업 영역에서 더 많은 경쟁이 필요하다. 완전한 경쟁 속에서 경제·정치 권력은 분산된다. (완전한 경쟁 속에서는) 회사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위해 경쟁하며, 지금처럼 독점기업이 공급업체를 쥐어짜 파산시킬 수 없다. 자유경쟁은 곧 사람들의 선택권이 넓어지고 가격은 내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당신은 오늘날 자본주의 문제의 시작을 산업, 특히 정보기술(IT) 산업의 독점 구조에서 찾았다. “산업과 시장은 종종 순환적으로 움직인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는 독점금지법이 시행되면서 다양한 산업에서 많은 경쟁을 독려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산업이 점점 더 특정 기업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보고 있다. 몇몇 독점 기업은 그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쥐게 됐고, 이런 변화는 경제를 왜곡시키고 있다.

독점 기업의 등장은 특히 IT 분야에서 눈에 띈다. 미국 내에서 구글은 거의 90%의 시장 점유율로 인터넷 검색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지난해 클릭 스트림 데이터를 분석해 제공하는 데이터업체 점프샷에 따르면 미국의 인터넷 사용자 62.6%가 구글을 통해 인터넷 검색을 한다. 구글이미지와 유튜브, 구글맵 등의 검색까지 포함하면 90.8%의 검색이 구글로 이뤄지고 있다. 페이스북은 소셜미디어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IT뿐만이 아니다. 소수 기업으로 시장이 집중되는 현상은 1980년대 초반부터 심화됐다. 이제 미국 소비자들은 업종과 지역에 따라 독점 및 과점 기업으로부터 제품·서비스를 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단 3~4개의 경쟁기업만이 존재하는 산업은 무수히 많다. 미국인이 마시는 맥주의 90%는 단 두 개의 회사에 집중돼 있으며, 다섯 개 은행이 미국 내 은행 자산의 약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州)에선 상위 두 보험사가 시장을 89% 이상 점유하고 있으며, 한 주에 살고 있는 초고속 인터넷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회사는 사실상 한 개뿐이다. 2018년 이뤄진 두 차례의 합병을 거쳐 세계 농약 시장의 70%, 미국 옥수수 종자 시장의 80%를 3개 회사가 장악하게 됐다.”

“자유무역 회복 위한 새로운 혁명 필요”

-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할수록 더 많은 기회와 자유를 누리게 된다. 모두가 자본을 독점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독점이 불가피하지 않은가. “많은 CEO에게 독점에 대한 충동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독점을 장려하거나 허용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장은 법과 합의의 결과물이다. 법이 없는 자유시장은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시장을 지배하는 관습법이나 법규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 자본가들이 독점권을 만들고 그들의 권력을 남용하고 싶다 해서 맘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사회와 국가의 역할이다.”

- 당신은 작년 11월 발간한 ‘자본주의 신화’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시장의 독과점 행태에 대해 논했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은 다른 지역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세계 최대의 시장인 한편, 독점·과점 행태에 있어서도 세계적으로 최선두에 서 있다. 물론 1890년 ‘셔먼법’ 제정과 시카고학파의 반독점 주창 등 반독점을 위한 움직임에 있어서도 앞장서왔다. 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시장에서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기업가적 자유를 원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독립선언문은 독과점 권력의 남용에 대한 과감한 성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독점권을 버리고 자유무역을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 진정한 자유경쟁은 자유시장의 본질이며, 경쟁은 합리적 규제를 필요로 한다. 미국이 역사를 통해 배워온 교훈은 좋든 나쁘든 많은 다른 나라에도 적용된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한국의 소비자들에게도 선택의 폭이 적고 경쟁자가 적은 환경이 결코 좋지 않다고 믿는다. 더 많은 선택지와 경쟁자가 있는 산업구조 속에서 한국인들은 더 잘살 수 있을 것이다.”

- 당신은 우리 사회에 완전한 경쟁을 되살리기 위해 입법·사법 부문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는데, 이 부분은 정부 개입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딜레마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규제와 법률은 진입하려는 산업에 아주 큰 장벽을 만들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좋은 법과 규정도 필요하다. 어려운 부분은 그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법은 충분히 세심하게 조정돼야 한다. 또한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고 경쟁자를 배제하도록 설계되기보다는 단순하고 명확하며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김경민 코인와이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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