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노를 입고 도쿄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 도쿄에서는 기모노 체험 관광을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photo 뉴시스
기모노를 입고 도쿄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 도쿄에서는 기모노 체험 관광을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photo 뉴시스

1년 만의 일본이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 일본 특유의 발 빠른 변화가 느껴진다. 10여명의 ‘70대 노인군단’이 맞는다. 이른바 ‘실버 계약사원’들로, 외국인의 입국 과정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필자의 여권을 보자마자 “안녕하세요”라며 한국어로 인사한다. 주변에 보니까 영어·중국어·태국어·인도네시아어 인사도 들린다. 이들의 업무는 지문감식기에 손가락을 대는 방법, 입국카드 기입 요령 등을 외국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루 8시간 근무에, 대략 20만엔 전후의 월급을 받는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우리나라의 노령 기초연금 같은 사회복지가 제공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그냥 계약직 직원이다. 입국심사 때 30대로 보이는 여성 입국심사원에게 입국장에 배치된 ‘70대 군단’이 전부 몇 명인지 물어봤다. 한참 망설이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계약직 사원에 대한 정직원의 감시용 질문처럼 느껴졌다.

일본인 흉내 내는 외국 직원들

시차 극복을 위해 항상 나리타공항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한 뒤 도쿄 시내로 들어간다. 항상 찾는 호텔이기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체크인을 도와주는 호텔 직원이 20대 중반의 ‘챙(Cheong)’이란 이름의 중국인 여성이다. 중국인 특유의 굴림형 발음 때문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걸 단숨에 알아챘다. 항상 맞이해주던 일본인을 대신해 호텔 카운터도 외국인 차지다. 필자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영어로 응대한다. 물론 중국인 손님에게는 중국어로 말할 것이다. 호텔 카운터에 늘어선 4명의 직원 가운데 3명이 외국인이다. 지난해에는 외국인이 단 1명도 없었다. 방에 갔는데 금연방임에도 담배 냄새가 났다. 방을 바꿔달라고 하자 곧바로 ‘챙’이 올라왔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담배를 피운 듯합니다. 미안합니다.”

일본 사람들과 99% 똑같은, 매뉴얼에 따른 인사법도 놀랍지만, ‘외국 손님’이란 표현이 흥미롭다. 짐작건대 담배 냄새의 범인은 중국 관광객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국가명을 말하지 않는다. 차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호텔에서 일하는 중국인이 일본인 특유의 비즈니스 관행도 똑같이 흉내 내고 있다. 비슷한 풍경은 이후 맥도날드 햄버거, 스타벅스 커피점, 100엔짜리 스시 전문점에서 일하는 외국인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다. 뛰어와서 주문을 받거나, 거스름돈을 줄 때 손님 눈앞에서 세면서 재확인하는 식이다. 외국인 직원들이 일본인의 장사 태도를 100% 흉내 내고 있었다.

불과 1년 만이지만,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의 숫자가 수직상승한 상태다. 가는 곳마다 엄청나다. 물론 한국인도 포함돼 있다. 인구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사태에 직면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빨리’ ‘능률적으로’ 대응하는 곳이 일본이다. ‘해외 인재’라는 이름의 용병모집이 동시다발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실업률은 2.4%다. 세계 1위의 성적표로, 원할 경우 당장 일할 수 있는 완전고용 상태다. 따라서 구인율도 1.61로 치솟았다. 1973년 고도성장기 당시를 넘어선 수치다. 현장에서 필요한 인력은 161명이지만, 정작 공급자는 100명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한 그릇에 260엔짜리 우동을 파는 20인 규모의 서서 먹는 우동집의 자동주문기는 8개국 언어를 제공한다. 홀에서 일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주문과 요리, 서비스를 각각 한 사람이 맡고 있다. 자동화와 함께,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모자라는 노동력 확보에 올인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기모노 차림의 한국 젊은이들

1년 만에 찾은 일본의 거리풍경이 전과 또 달라 보이는데 가만히 보니 외국인 관광객 때문이었다. 큰 가방을 끌고 횡단하는 중국인 관광군단은 작년과 다름없지만 작년에는 못 보던 기모노 차림의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도쿄 아사쿠사 절 주변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몰리는 시부야, 장년들의 휴식처인 긴자에서도 기모노 차림의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기모노를 입고 갖가지 문화체험에 나서는 ‘고토(こと)’ 관광족들이다. ‘모노(もの)’족들은 물건을 사거나 사진만 달랑 찍고 돌아다니는 관광을 하는 반면, 기모노를 입고 문화체험에 나서는 ‘고토’족들은 일본식 머리손질, 다도, 스시와 도자기, 부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 촬영만 해주는 1000엔 기모노 체험에서부터, 1만엔짜리 일본식 결혼 체험까지 다양하다.

필자도 아사쿠사 근처 기모노 렌털숍에 들러봤다.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3000엔만 내면 8시간 동안 기모노를 빌릴 수 있다. 하루 평균 30명 정도가 온다고 한다. 인터넷 예약 손님이 대부분인데 중국인 관광객이 60%를 차지하고, 나머지 20%는 한국인 관광객, 그 나머지가 미국과 유럽 손님이라고 한다. 국적 불문 20대 손님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반일감정에 들끓는 중국인이 60%나 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50대 필자가 보면 한국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입고 일본 거리를 활보한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다. 아무리 반일정서와는 별개라고 해도 기모노를 입고 일본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미국에 가서 카우보이 옷을 입는 것과는 전혀 다를 듯하다. 기모노 체험은 50대 머리로는 풀 수 없는 비이성적 ‘꼰대의 벽’일지 모르지만 이미 한국의 20대들은 그 같은 벽을 넘어선 상태다. 설령 반일감정을 가졌다 해도 ‘옷과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다. 전후맥락이야 어찌됐든, 도쿄에서 만나는 기모노 차림의 외국인 5명 중 1명이 한국인, 그것도 20대 젊은이들이다.

지난해 한국인 중 일본을 찾은 방문객 수는 753만명에 달했다. 한국인 6.6명 중 1명꼴로 일본에 간 셈이다. 작년에 일본을 찾은 중국인 838만명에 이어 두 번째 규모로 전체 일본 방문 외국인 관광객 3119만명의 24%에 이른다. 전통적인 독도 갈등과 함께 최근에는 징용 배상과 레이더 갈등까지 사사건건 대립하는 두 나라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그 어떤 나라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필자만이 아니라 일본인도 신기해할 정도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필자의 일본인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의 경우 공산당이 의도적으로 반일감정을 조장할 뿐, 실제 반일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적·사적 입장이 다른 나라가 중국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일본에 와서 일제 물건을 쇼핑하는지 궁금하다. 한국에 가는 일본인의 경우 한국이 좋거나, 적어도 한국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2020년 하계올림픽이 치러질 도쿄 메인스타디움 공사가 한창이다. ⓒphoto 뉴시스
2020년 하계올림픽이 치러질 도쿄 메인스타디움 공사가 한창이다. ⓒphoto 뉴시스

일본 찾은 외국인 중 24%가 한국인

2019년 한·일 양국은 서로에게 상호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태다. 일본의 경우 혐한을 넘어서, 한국 패싱(Passing)에 돌입한 상태다. 아예 논외로 치고 무시하는 식이다. 가령 곳곳에서 개최되는 수많은 국제포럼에서 요즘은 한국인 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외교는 전멸 상태고, 경제분야 포럼이나 모임에도 한국인의 그림자는 희미하다. 종래의 한국에 할당되던 자리는 인도네시아·대만·베트남인으로 대치되고 있다. TV를 봐도 외교·북한 문제를 제외한 한국 관련 연성(軟性) 뉴스들을 찾기 힘들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한국인 연예인들도 많이 사라졌다.

항상 강조하지만 일본은 ‘공기’로 움직이는 나라다.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 당시 어두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거나 말장난을 하던 일본 연예인들은 한순간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공기의 흐름에 반하는 ‘후킨신(不謹慎)’이 죄명(罪名)이다. 한국과의 정치적 갈등 역시 아베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기처럼 일본 사회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은 292만명. 2017년에 비해 무려 28%나 급증한 규모다. 일본인 30명 중 한 명이 한국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올해 한국을 찾는 일본인은 지난해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게 일본 관광업계의 전망이다.

기모노 관광객을 통해 한·일 양국의 현주소를 분석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지 모르겠다. 핵심은,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기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나라라는 점이다. 분위기 파악에 관한 한 한국인도 남다르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반일정서가 사회 곳곳에서 표출되지만 일본행 관광객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관광객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은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속도에 있어서 일본보다 더 나쁜 세계 최악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슬로건만 무성할 뿐, 제대로 된 대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인구감소라는 공기가 퍼지는 순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발 빠르게 대응하는 일본과 대비된다.

명분의 나라, 생존의 나라

주자학과 양명학은 근대화 이전 한국, 일본 두 나라의 사고체계다. 주자학이 명분의 학문이라면, 양명학은 생존을 위한 학문이다. 일본은 1엔짜리 동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현실에 탄탄하게 발을 딛고 있는 생활대국이다. 나리타호텔에서 봤지만 로비 바닥에 침을 뱉는 중국인 관광객에게도 싫은 모습 하나 안 보이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다. 돈을 벌어주는 ‘큰손’들이기 때문이다. 2019년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 2019년 10월 새 일왕 즉위식, 2020 도쿄 하계올림픽, 2025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미래의 이벤트에 수반될 비즈니스 얘기로 날과 밤을 새는 나라가 일본이다. 한국은 정반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종교계에서 펼쳐진 ‘100년 전 참회’ 같은 것이 좋은 본보기다. 듣기 좋은 말로 장식된 100년 전 과거사에 매달린다. 뚜렷하게 책임질 사람도 없지만 거꾸로 누구나 나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것이 과거사다. 북한과의 장밋빛 경협 논의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손익계산서에 대한 얘기는 없다. 현실은 없고 명분과 이상만 판을 친다. 근대화 시기 양국의 운명을 가른 그 대조적인 세계관은 3·1절 100주년을 맞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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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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