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자동차로 20분을 달리면 팜오일 나무숲 사이로 행정수도 푸트라자야의 고층빌딩 숲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20분가량 더 달리면 셀랑고르(Selangor)주의 세팡 지역에 위치한 사이버자야(Cyberjaya)가 모습을 드러낸다. 쿠알라룸푸르에서 33㎞ 남쪽에 위치한 사이버자야는 1997년 5월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를 목표로 밀림을 밀어내고 야심 차게 조성한 정보통신 산업단지다.

작년 5월 마하티르 총리가 93세 세계 최장수 총리로 당선되면서 이곳에서는 또다시 개발붐이 일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IBM, 인텔, 모토로라 등 수백 개의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지난 1월 26일 기자가 찾은 곳은 사이버자야 과학단지 세팡 서쪽에 위치한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다. 한국국제학교 정문 앞에는 2012년 한화케미칼이 독일의 태양광 기업 큐셀을 인수해 건설한 세계적 셀(태양광 전지) 생산공장 한화큐셀(25만4545㎡ 규모)이 있었다.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는 연건평 4856㎡(1469평) 규모의 3층 건물에 들어서 있다. 초등 6개 학급, 유치원 2개 학급에 도서실, 음악실, 미술실, 과학실, 강당, 축구장 등 쾌적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삼성전자가 학교 설립 당시 기증한 에어컨 60대가 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현재 유치원과 초등학교 학생 총 55명(유치원 16명, 초등학교 39명)이 재학 중이다.

장홍재 한국국제학교 교장은 “마하티르 총리가 집권한 이후 학교 진입도로 4차선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등 학교 주변 환경이 쾌적하게 개선되고 있다”며 “2011년 한국학교설립추진위가 발족됐고, 이듬해 전체 공사비 30억원 가운데 15억원을 정부가 지원해 학교를 건립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는 2016년 교육부로부터 공식승인을 받고 2017년 3월 정식 개교했다. 장홍재 교장은 2016년 7월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영어교육만 충실하다면…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는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기간 중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찾아와 유치원생들의 수업을 진행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 3월 13일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를 방문한 김정숙 여사는 장홍재 교장에게 “해외에서 성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한국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습득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격려했다.

당시 김정숙 여사는 병설유치원 ‘꽃들반’ 교실을 찾아 어린이들에게 말레이시아 출신 한국 작가가 쓴 ‘아왕 이야기’라는 동화책을 읽어줬다. ‘아왕’이라는 손이 큰 아이가 자신의 외모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지만 결국 커다란 손의 장점을 발휘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꽃들반 친구들 중에는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경우도 있고, 부모 중 한 사람은 말레이시아인인 경우도 있다. 김정숙 여사는 동화를 읽어준 후 어린이들에게 “여러분들도 아왕처럼 손이 큰 아이랑도, 나랑 얼굴이 다르고 키가 다른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현재 전 세계 한국국제학교는 부모 중 한 사람만 한국인이면 다닐 수 있다. 말레이시아 교민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낼 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선택지는 한국국제학교, 둘째는 현지 국제학교, 셋째는 현지 학교(말레이계·중국계) 등이다. 장홍재 교장은 “교민들은 현지 국제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분도 많고, 아예 중국어를 가르쳐 중국계 현지 학교에 무상으로 교육을 시키려는 분들도 있다”며 “우리 한국국제학교가 영어교육만 충실하다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우리말 교육까지 받으며 한국인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지킬 수 있는 한국국제학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사이버자야의 한국국제학교 전경과 수업 모습. 오른쪽은 이 학교 장홍재 교장. ⓒphoto 오동룡
말레이시아 사이버자야의 한국국제학교 전경과 수업 모습. 오른쪽은 이 학교 장홍재 교장. ⓒphoto 오동룡

베트남 한국학교에 학생이 몰리는 까닭

현재 국내법상 재외국민 자녀들이 다니는 한국국제학교는 순수한 외국인에게는 문호가 닫혀 있다. 이 때문에 정부지원과 학생 수업료만으로 운영하는 한국국제학교들은 재정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캄보디아 프놈펜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중국의 웨이하이에 한국국제학교가 추가로 설립돼 작년 말 기준 재외 한국국제학교는 35개교에 이른다. 교육부는 ‘재외국민의 교육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한국국제학교에 연평균 50%에 달하는 운영비를 지원해오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7년 12월 31일 기준 재학생이 400명 이상인 한국국제학교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곳으로 분류되는 학교는 전체 32개교 중 12개 학교에 불과하다. 일본의 동경한국학교(재학생 1402명)·건국한국학교(457명),중국의 북경한국국제학교(1047명)·천진한국국제학교(814명)·상해한국학교(1271명)·무석한국학교(511명)·연대한국학교(603명)·칭다오청운한국학교(810명), 베트남의 하노이한국국제학교(1534명)·호찌민시한국국제학교(1845명),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691명), 싱가포르의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434명) 등이다. 반면 100명 미만의 학생을 보유한 대만의 타이베이한국학교(36명)·가오슝한국국제학교(51명), 사우디아라비아의 젯다한국학교(8명)·리야드한국학교(25명), 태국의 방콕한국국제학교(78명), 파라과이의 파라과이한국학교(96명), 러시아의 모스크바한국학교(84명), 이란의 테헤란한국학교(13명), 이집트의 카이로한국학교(24명),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41명) 등 10여개 학교는 학교 운영 자체가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김종화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 이사장은 “일본, 대만,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의 한국국제학교는 현지국의 교육과정에 편입해 한국어와 한국사 과목만 배우는 상황이라 사실상 현지 학교”라며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한국국제학교는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취업하려는 목적, 한국으로 유학하려는 목적 등으로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학생수가 많지 않은 한국국제학교들은 대부분 재정 상황이 열악하다”며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의 경우, 한 해 예산이 8억원가량인데, 정부의 지원과 수업료로 가까스로 학교운영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는 “교사 인건비만 6억원이 소요되고, 올해 들어가는 임차료만 4억원이라 학교가 중·고교 추가 설립, 방과 후 교육, 창의체험교육 등에 투자할 여력이 거의 없다”며 “부족한 운영비를 교민들에게 기부금으로 부탁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장홍재 교장은 “베트남의 경우엔 학생수가 1800명에 달해 정부 지원 20~30%만 받아도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정부 지원이 70%에 달하지만 나머지 30%를 연간 400만~500만원인 학생 등록금으로 운영해 나가기에는 빠듯하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가 안정화되고, 학교가 더 성장하려면 중·고교가 들어와야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며 “중등과정 교육수요가 얼마나 있는지, 시설규모가 적합한지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장 교장은 “교민이나 학부모들은 말레이시아 현지에 영어가 통용되고 중학교는 국제학교로 가야 하니 영어 수업시간을 늘려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며 “한국의 초등학교 저학년의 일주일 수업시간이 25시간인 데 비해,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는 영어(주당 11시간)와 중국어(주당 4시간) 시간을 늘리는 바람에 일주일 37시간, 즉 한국의 동급생보다 12시간을 더 수업하고 있다”고 했다. 영어 또는 현지 언어를 배울 시간을 확보하면서도 교육부의 한국 교육과정 기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전체 수업 시수(時數)를 늘려서 부족한 시간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 학생 선발 50%까지 자율적 허용

해외 한국국제학교의 어려운 재정 상황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국회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국회는 지난해 2월 5일 ‘재외국민의 교육지원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 법률(안)’을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성남 분당구을) 등 민주당 의원 14명이 발의했다. 대표발의한 김병욱 의원은 “현재 전 세계 720만명의 해외동포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고 현지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등 글로벌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가의 교육적 지원 및 제도적 뒷받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며 “현행법에서 한국학교의 외국인 학생 선발에 대한 근거규정이 없어 외국인 학생을 선발하지 못함에 따라 한국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를 현지학교 방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개정안 제8조의 2에 따르면, 학교장은 재학생이 소재국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고 한국국제학교의 교육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소재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 재외국민 등이 아닌 사람을 학생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우, 재외국민이 아닌 학생의 선발 비율은 정원 30%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국제학교의 운영상 불가피한 경우, 정원 50% 이하의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선발을 늘릴 수 있도록 했다.

김 의원은 “현재 ‘재외국민교육지원법’에는 재외국민 등을 위해 설립된 한국학교에 외국인 학생 입학을 허용하는 명문 규정이 없지만, 일부 한국학교는 이미 현지 법령에 따라 현지 학생이 30% 이상 다니고 있으므로 과반수인 50%를 넘지 않는 선에서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며 “또한 외국인 학생에게 좀 더 높은 수업료를 부과해 한국학교 재정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외국인 학생의 입학 허용규정을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현재 이 개정안은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심사가 진행 중이다. 김병욱 의원실 관계자는 “교육부 재외동포교육담당관실과 상의한 결과 교육부도 한류 확산과 학교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 때문에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야당도 협조하고 있는 사안”이라며 “최근 현안인 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등 ‘유치원 3법(박용진 3법)’ 개정안에 막혀 법안 처리가 계류 중인데, 상임위원회에서 조만간 현명한 판단을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장홍재 교장은 법안 정비도 중요하지만, 교육부의 ‘재외한국학교 교육과정 운영기준’ 개편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현지 한국국제학교 입장에서는 정말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필요한 국어나 국사 등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는 기준을 많이 완화해주면 좋겠다”며 “한국의 교육과정과 국제화를 매칭할 수 있는 재량권을 현지 한국학교에 많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어 “우리의 교육과정과 국제화가 매칭이 안 된다면 국회에서 법안을 정비해 30~50%의 외국인 학생을 받을 수 있게 하더라도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국제학교에 오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의 교육과정을 특성화해 운영하되, 영어나 현지어 등을 배우는 과정이 늘어나야 법률개정안이 실제로 작동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재외국민 교육지원법 개정안’의 법안 처리를 앞두고, 교육부도 법 개정에 맞춰 해외 한국국제학교에 대한 전면적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해 5월 1일 서울대 재외동포교육지원센터에 ‘교육부 재외교육지원센터’를 설립하고, 한국국제학교의 교육과정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교육부 재외교육지원센터는 현재 35곳의 해외 한국국제학교를 지원하고 있는데 해외 ‘한국교육원’도 지원하고 있다. 한국교육원은 해외 각국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하도록 돕고 해외 학생들의 한국 유학 유치활동도 한다.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19년 1학기 학생자치회 행사.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19년 1학기 학생자치회 행사.

국가교육과정 현지화해야

권오현 서울대 재외동포교육지원센터장(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은 현재 해외 교육과정 개편을 총괄하는 교육부 재외교육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다. 권 교수는 “한국국제학교에 외국인 학생을 받아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교육과정 개편”이라며 “교육과정을 어떤 방향으로 개편하는 것이 교민사회에 도움이 되고 학생을 보내고 싶은 교육수요가 창출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권 센터장은 “해외의 한국국제학교는 사립학교이지만, 재외국민이 다니는 학교이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라며 “국가 입장에서는 해외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대변해줄 수 있는 그룹, 일종의 국가적인 외연확장 차원”이라고 했다. 그는 “교육과정 개편엔 현지 교장들의 철학이 담기고 학부모들의 요구사항도 담겨야 한다”며 “한국국제학교는 민족정체성을 가르치는 것이 기반이 되지만, 영어 수업 시수를 늘린다든지, 수학이나 과학 등 수업의 일부를 영어로 해주는 등 국가교육과정을 어느 정도 현지화해줘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권 센터장은 “한국국제학교는 한국의 학교이기도 하지만 현지의 학교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국국제학교 교육과정을 개편해서 우리 마음대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국 정부와 협의가 되어야 한다”며 “예를 들어 조선족과 같은 해외동포는 뿌리만 우리와 같을 뿐, 국적은 중국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국 정부의 반발을 살 수가 있다”고 했다.

권 센터장은 “초등학교만 있는 한국국제학교는 졸업하면 진학할 중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졸업생들이 현지 학교나 국제학교로 진학하는 등 현지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따라서 우리의 교육과정 개편은 중학교 입학할 시기에 맞춰 설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현재 중·고교 과정은 없이 초등학교 과정만으로 운영하고 있는 한국국제학교는 대만의 타이베이한국학교·가오슝한국국제학교, 사우디아라비아의 젯다한국학교·리야드한국학교, 파라과이의 파라과이한국학교, 러시아의 모스크바한국학교, 이집트의 카이로한국학교,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시아한국국제학교와 얼마 전 신설된 캄보디아의 프놈펜한국국제학교,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한국국제학교 등 10개 학교다.

권 센터장은 “올여름 서울대 재외교육지원센터에서 해외 한국국제학교 교무부장을 대상으로 교육과정 관련 연수를 운영할 예정인데 그때 해외 한국국제학교 교육과정 개편방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생각”이라며 “글로벌 시대 교육의 책무는 남북통일을 통해 우리의 외연을 확장하고, 다문화 구성원들을 포용해 한국민으로 만들고, 재외동포들을 한국인 울타리 안에 묶어두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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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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