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주목할 만한 과학적 사건들이 유독 많은 기념비적 해이다. 그중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 시도된 사건들도 있다.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과학자들이 도전 기록을 남긴 역사적 사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과학 이슈 10선을 알아보자.

1. 200년 전 발간된 토마스 영의 논문 ‘측정 오차’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과학자들을 괴롭혔다. 대답은 어느 한쪽이 완승을 거두지 못하고 시대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했다. 17세기에는 호이겐스의 빛의 파동론이 지지를 받다가 18세기에는 뉴턴을 좇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빛을 입자로 봤다.

하지만 19세기 초 의사이면서 물리학자인 영국의 토마스 영(Thomas Young·1773~1829)이 빛의 회절과 간섭현상을 실험적으로 밝혀내자 전세가 역전돼 빛의 파동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1803년 빛이 2개의 작은 틈(슬릿)을 통과하도록 하고 그 뒤에 스크린을 놓았다. 2개의 틈을 통과한 빛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스크린에 줄무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빛이 파동이란 사실이 입증됐다.

빛의 파동설을 확실하게 증명한 그는 1819년 1월 ‘측정 오차’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200년 전의 일이다. 논문은 과학 측정에서의 오류 가능성과 다수의 측정 결과로부터 오차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오차 가능성을 측정하기 위해 수식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경우엔 이 방식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며 ‘모든 오차에 적용하면 안 된다’는 모호한 내용을 적었다. 올해 200주년 세계 기념행사에서는 이런 그의 논문이 집중 조명되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2. 150년 맞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지난 3월 6일은 ‘화학의 ABC’라고 하는 ‘주기율표’가 만들어진 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주기율은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원소의 일정한 순서(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법칙이며, 주기율표는 이를 표로 나타낸 것이다. 원소들을 원자번호 순서로 배열하되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나오면 줄을 바꿔 같은 열의 바로 아래 오도록 배치한 도표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Dmitri Mendeleev·1834~1907)가 그때까지 발견된 63개의 모든 화학 원소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주기율표를 완성해 처음 내놓았다.

그의 주기율표는 오늘날 주기율표의 기초가 됐다. 150년간 주기율표에 등록된 원소는 118개. 멘델레예프의 표에서는 63개의 원소만을 차례로 배열했는데, 당시 발견되지도 않은 여러 원소의 성질을 정확하게 예언해 빈자리를 남겨두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를테면 45번과 68번, 70번 원소 등이 있다고 가정하고 원자량을 기준으로 다른 원소들과 함께 배열했다. 그의 예측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원소들은 모두 발견됐다. 과학자들은 그의 주기율표 덕분에 원소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4개의 방사성 원소가 2015년 말에 새로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주기율표는 단순히 화학적 영역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물리, 생명, 재료, 에너지과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후세에서는 멘델레예프의 업적을 기려 101번째 원소 이름을 ‘멘델레븀(Md)’이라고 정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헬리콥터’ 스케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헬리콥터’ 스케치.

3. 500년 만에 다시 드러나는 다빈치의 업적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이자 건축가, 지질학자, 해부학자, 수학자, 공학자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그만큼 다양한 분야를 탐구했던 인물은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는 5월 2일은 그가 사망한 지 500주기가 되는 날이다. 500주기를 기념해 빼곡하게 적힌 그의 노트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7200쪽이 넘는 방대한 메모와 기록을 남겼다.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걸작을 남긴 화가다. 동시에 궁중기술자란 직책으로 기상천외한 전쟁무기 개발과 엉뚱한 발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그가 평생 꿈꿨던 것은 인간의 비행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평소 새와 박쥐, 곤충 등 모든 생물체들의 비행역학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해부학, 공기역학, 기계공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나선형 날개를 회전시키는 ‘헬리콥터’와 ‘낙하산’의 스케치를 남겼다. 러시아 태생의 항공기술자 이고리 시코르스키는 다빈치의 나선형 날개에서 영감을 얻어 1930년대에 최초로 헬리콥터를 만들었다. 비행기와 낙하산 등도 500여년 뒤에 상용화됐다.

그의 과학적 통찰은 때로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물체가 공기에 의해 받는 압력만큼 공기도 물체에 압력을 가한다’는 그의 관찰은 뉴턴의 운동 제3법칙(작용반작용의 법칙)을 2세기나 앞선 것이었고 이는 실제 인간의 비행에 대한 논리적 뒷받침이 됐다.

1969년 달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
1969년 달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

4. 인간 달 착륙 50주년, 달 향한 끝없는 도전

오는 7월 20일은 인류의 달 착륙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69년 7월 20일,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1930~2012)이 아폴로 11호에서 내려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류가 달을 정복한 역사적 순간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는 암스트롱의 역사적 음성이 우주를 통해 지구로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50년, 인간은 우주를 향해 끝없는 도전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지금까지 달 탐사를 통해 얻어낸 성과는 많다. 달은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진화한 행성이라는 점, 달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밝힌 점, 달의 지진과 중력장을 새로 측정한 점, 물과 희귀광물자원 발견 등이다. 그리고 달은 이제 인류에게 또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달 탐사는 더 적극적으로 진행된다. 미국을 비롯해 일본, 인도, 중국, 러시아 등이 달 착륙을 시도할 예정이다. 40억년간 태양의 독특한 방사능 연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달은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게 무궁무진한 곳이다.

5. 케플러 행성운동 제3법칙 발표 400주년

올해는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가 행성운동 법칙 중 제3법칙을 발표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행성의 공전주기를 알면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다는 법칙이다. 1619년 그는 이런 내용을 담아 ‘우주의 조화(De Harmonices Mundi)’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법칙에 따르면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일수록 공전주기가 길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수성은 공전주기가 88일, 금성은 225일, 지구는 365일, 화성은 더욱 길어져 687일이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알면 이 공식을 통해 지구가 시속 10만8000㎞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계산해낼 수 있다. 토성은 시속 3만4500㎞로 공전한다. 이는 인공위성에도 적용돼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인공위성 주기를 결정한다.

과학계 전문가들은 케플러를 ‘최초의 천체물리학자’라고 칭한다. 행성운동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이론인 ‘케플러 법칙’으로 행성운동을 간단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1609년, 케플러 제1법칙(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표했다.

케플러의 세 법칙은 행성이 태양을 공전하는 등 우주가 얼마나 질서 있게 움직이는지 나타낸다. 그는 천체들이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행성이 타원 궤도를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이전까지 행성은 그저 오고 가는 존재였지만 케플러가 밝혀낸 행성은 일정한 궤도를 갖고 태양 둘레를 도는 존재였다. 이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확실하게 증명해냈다. 만일 케플러의 법칙이 없었다면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6. 수정기관으로 식물 분류한 체살피노 탄생 500주년

생물을 어떤 질서에 따라 정리하고 싶은 것은 생물학자들의 자연스러운 욕구다. 그러한 시도를 처음으로 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의학자이며 식물학자인 안드레아 체살피노(Andrea Cesalpino·1519~1603)다. 그는 1583년 ‘식물론 제16권’이라는 저서에서 식물을 꽃이나 씨앗, 그리고 열매의 특징 등의 일관된 원칙에 따라 약 1500종류로 분류했다. 특히 식물을 분류하는 형질 중 꽃과 열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독창적인 체계를 발표했다. 그의 연구는 식물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확립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식물론 제16권’은 식물학의 첫 교과서로 간주되고 있다. 체살피노의 분류 체계는 이명법(二名法)을 만든 카를 린네를 비롯해 존 레이, 조아힘 융기우스 등 후대의 식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올해는 체살피노가 태어난 지 딱 500년이 된다.

7. 페레그리누스, 750년 전 처음 자석 성질 연구

1269년 8월 프랑스의 천문학자 페트루스 페레그리누스(Petrus Peregrinus de Maricourt·1214~1294?)는 ‘자석에 대한 편지(Epistola de magnete)’를 발표했다. 자극(磁極)의 개념을 설명한 서간문이다. 이전까지 인류는 자극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페레그리누스는 유럽에서의 첫 실험을 통해 자석의 성질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 결과 자석은 두 극이 있고, 한 자석이 두 쪽으로 나뉘어도 각 조각은 항상 두 극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만일 자철석을 깨뜨린다면 그 조각들 하나하나가 자극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 자석의 같은 극은 서로 밀어내며 다른 극은 잡아당긴다는 점도 밝혔다. 하지만 자석이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현상이 지구의 자기장에 의한 것임은 생각하지 못했다.

페레그리누스 이후 약 300년 동안 자석에 대한 연구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자석에 대한 편지’는 중세의 실험 연구에 관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자 현대 과학적 방법론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페레그리누스는 자기(磁氣)에 관한 최초의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좌) 아인슈타인. (우) 훔볼트
(좌) 아인슈타인. (우) 훔볼트

8. 근대 지리학의 시조 훔볼트 탄생 250주년

1799년 여름,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박물학자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1769~1859)는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에메 봉플랑과 함께 남아메리카로 5년간(1799~1804) 탐험을 떠났다. 콜롬비아에서 안데스산맥을 거쳐 페루까지 탐험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9650㎢의 지대를 탐험했다. 오리노코강과 아마존강이 지류로 연결되어 있다고 단정하고 베네수엘라 열대우림지역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다양한 동식물을 조사했다. 안데스산맥에서는 활화산을 관찰하기 위해 고지대의 암벽 사이를 따라 기어들어가 침보라소산(6265m)을 5784m 높이까지 등반했고,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해 페루 연안을 흐르는 해류를 조사했다. 이를 기념해 ‘훔볼트 해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훔볼트는 남아메리카 탐험에서 모은 자료들을 간행하기 위해 죽기 전 25년 동안 집필에 주력했다. 6만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새로운 식물표본, 위도·경도의 확정, 지구자기장 분야 구성요소들의 측정법, 기온·기압의 일일 측정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코스모스(Kosmos)’라는 유명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과학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훔볼트의 영향을 받아 비글호 항해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윈이 “훔볼트가 없었다면 ‘종의 기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의 동시대인이 말했듯 훔볼트는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9. 500년 전, 마젤란 최초로 세계일주 떠나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했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먼저 착수한 쪽은 포르투갈이었다. 1488년에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스페인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리고 1519~1522년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했다. 그 중심에는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이지만 스페인 왕의 후원을 받아 세계일주에 나선 최초의 항해가다.

1519년 9월 20일, 그는 신항로 개척을 위해 떠났다. 항해 도중 마젤란해협을 발견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필리핀섬 원주민들에 의해 불의의 죽음을 당해 세계일주를 끝마치지 못했다. 그의 사후 나머지 선원들이 항해를 계속하여 항해를 떠난 지 약 3년 만에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별개의 대륙이었다는 점이 명백히 밝혀졌다. 마젤란해협의 발견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1914년에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해협은 매우 중요한 통행로로 각광을 받았다.

10.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증명 100주년

1915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면서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빛이 중력장에서 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19년 5월 29월,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개기일식을 관측해 태양 주변 빛이 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평소 낮엔 별을 볼 수 없지만 개기일식 때는 달이 해를 가리는 덕분에 그 주변의 별들을 볼 수 있다. 에딩턴이 시도한 방법은 이 별들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가 약 6개월 뒤 그 별들이 다시 밤하늘에 나타날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만일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맞다면 태양으로부터 가까운 별들의 위치가 달라져야 하고, 태양으로부터 멀리 있는 별일수록 그 위치 이동이 점점 더 작아져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양의 중력에 끌려 원래의 별의 위치를 벗어났다. 별빛은 휘었고, 일반상대성 이론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해 11월 6일 영국왕립학회와 영국왕립천문학회 합동회의에서 검증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조명받으며 평생 유명인사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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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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