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십기’의 저자 고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
‘외교십기’의 저자 고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

2018년 1월 한반도 남쪽에서는 2월 9일의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 공동입장과 한반도기 사용,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등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광경을 전하는 중국의 국영 중앙TV는 어떤 때는 ‘조·한(朝韓)’, 어떤 때는 ‘한·조(韓朝)’라고 불러가며 서울발 상보(詳報)를 신난다는 듯 매일같이 전하고 있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한 직후부터 남북한을 각각 ‘한궈(韓國)’와 ‘차오시엔(朝鮮)’이라고 자기네 세계지도에도 못 박아 놓았다. 이와 함께 ‘조·한 양국(朝韓兩國)’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대로 역사가 흐른다면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별개의 나라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될 것이다.

1991년 9월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를 성사시킨 중국의 외교부장은 첸치천(錢其琛·2017년 5월 9일 사망)이었다. 첸치천이 2003년 10월에 출판한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외교에 관한 10가지 비망록)’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중국이 한국과 무역대표부를 상대방 수도에 설립하고 나서 부딪힌 문제는 조선 남북 쌍방이 유엔에 가입하는 문제였다. 유엔은 국제사회 최대 조직이고, 유엔 가입은 주권국가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은 그때까지 남북 쌍방의 유엔 가입을 줄곧 반대해왔다. 조선반도 남북의 분단이 영구화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조선과 한국은 유엔에서 모두 옵서버 신분이었고, 한국은 줄곧 유엔 단독 가입을 도모해왔다. 당시 유엔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는 국가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펑(李鵬) 중국 총리가 1991년 5월 방북해 북한 총리와 북한의 유엔 가입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이 열렸다고 외교십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리펑 총리는 북한 총리에게 “올해 유엔 총회에서도 한국은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인데 중국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됐다. 일단 한국이 유엔에 단독 가입하면 조선이 나중에 유엔에 가입하려 해도 곤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리펑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첸치천은 평양 방문이 끝나기 직전 김일성으로부터 만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일성은 첸치천과 만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과 협의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음날 조선의 신문에는 한 편의 논평이 실렸는데 “조선도 이제 북·남 조선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리펑 중국 총리는 1991년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김영남 당시 북한 외교부장은 리펑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조선이 유엔에 단독 가입하려는 음모를 우리 조선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유엔에서 조선이 불리해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도 유엔 가입 신청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북·남의 유엔 가입이 한꺼번에 처리되기를 바란다. 만약 미국이 북·남 조선의 유엔 가입을 분리해서 심의하자고 하면 중국이 반대를 해달라. 미국이 조선의 유엔 가입에 반대한다면 중국도 남조선의 유엔 가입에 반대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북한이 걱정하던 것은 한국의 유엔 가입 신청은 순조롭게 처리되고, 북한의 가입 신청은 저지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리펑 총리를 수행한 첸치천 외교부장은 북한 측에 유엔에서 남북한 동시가입안이 어떻게 처리될 전망인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당시 리펑 총리 일행은 묘향산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났다고 외교십기는 기록해놓았다. 김일성은 이런 말을 했다. “북·남 조선의 유엔 가입 문제는 어떻든 일괄 처리되어야 한다. 만약 분리해서 토론한다면 미국이 우리의 유엔 가입 신청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될 경우 우리 조선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다.”

첸치천은 김일성의 그런 걱정에 대해 “조선반도 북과 남이 유엔에 동시가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유엔 내에서 이미 공통인식이 이뤄져 있으므로 조선이 걱정하는 그런 상황은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1991년 9월 17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안이 통과되는 역사가 이뤄졌다고 외교십기는 기록하고 있다.

27년 전에 있었던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과 그 다음 해 있었던 한·중 수교를 되돌아볼 때 한·중 수교는 우리로서는 어떻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판단을 지금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1년 전에 있었던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보면 다시 판단해 볼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통일을 하려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해체하고 하나의 주권국가로 가입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과연 쉬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이른바 대국들의 의견이 일치되어 남북한의 동시가입을 해체하고 하나의 주권국가로 유엔 회원국 자격을 정정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2011년 8월 8일에 초판이 나온 ‘노태우 회고록 하권-전환기의 대전략’에 보면 중국이 등을 떠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의 배경에는 당시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하되 북한이 반대하면 단독으로 가입한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구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90년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다음 해인 1991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외무장관과 외교안보수석에게 확고한 지침을 내렸다. 북한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단독으로라도 유엔에 가입하자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6년.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갖고 있던 ‘유사시 단독 유엔 가입’이라는 방침을 확인한 중국이 슬쩍 김일성의 등을 떠밀어 성사시킨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과거 동서독도 유엔 동시가입은 추구하지 않았다. 또 지금의 중국·대만도 유엔 동시가입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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