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5일 베트남 다낭에 입항한 미국 항공모함 USS 칼빈슨. ⓒphoto 뉴시스
지난 3월 5일 베트남 다낭에 입항한 미국 항공모함 USS 칼빈슨. ⓒphoto 뉴시스

지난 3월 5일부터 9일까지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 다낭에 미 해군 항공모함 ‘USS 칼빈슨’이 기항했다. 미 항모가 베트남 항구에 들어온 것은 1975년 베트남전 종전 이후 43년 만에 처음이었다. 다낭은 미국이 북베트남에 맞서 무력 개입을 시작할 때 병력과 물자를 처음으로 전개한 곳이다. 그러나 이번에 다낭을 찾은 칼빈슨과 부속 함정들은 북베트남을 승계한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정부와 베트남 국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외신들과 베트남 언론 모두 미국과 베트남의 고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환영식 장면, 미군 장병들이 과거 선배들이 살포한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피해자 지원 시설을 찾아 위로하는 모습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외신들은 이 특기할 만한 사건을 두고 “남중국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에 맞서 과거의 두 적들이 손을 잡았다”고 분석했다.

칼빈슨이 입항한 다음 날인 지난 3월 6일 오후 다낭을 찾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汗)강을 건너 티엔사항(港)으로 향하는 투언프옥 다리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다낭만(灣)이 펼쳐졌다. 다리 난간을 따라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든 베트남인 20여명이 달라붙어 있었다. 만 안으로 들어와 닻을 내린 칼빈슨의 모습을 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3㎞ 떨어진 곳이었지만 거대한 함체와 각진 모양의 함상 활주로, 높이 솟은 함교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30대 택시기사 탄마이씨는 칼빈슨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정말 강력해 보이지 않느냐. 어제 칼빈슨이 들어온 뒤로 다낭은 축제 분위기”라고 말했다. “옛날에 싸웠던 나라의 군함이 들어와 있는데 기분이 이상하지 않으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 전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지금 미국은 적이 아니라 친구다. 우리 땅을 빼앗으려 하는 중국에 맞서려면 미국이 필요하다.”

탄마이씨가 말하는 ‘우리 땅’이란 남중국해에 있는 파라셀제도(중국명 시사군도·베트남명 호앙사군도)와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베트남명 쯔엉사군도)이다. 다낭에서 동쪽으로 300㎞ 떨어진 곳에 있는 파라셀제도는 베트남을 식민통치하던 프랑스가 점령했고, 이후 남베트남 관할로 넘어갔으나 남베트남이 패망을 목전에 둔 1974년 중국이 빼앗았다. 중국은 파라셀제도를 발판으로 더 멀리 떨어진 스프래틀리제도에까지 손을 뻗쳤다. ‘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남중국해 분쟁의 시작이었다. 중국, 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이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인에게는 독도나 마찬가지인 파라셀·스프래틀리제도를 매개로 터져나오는 베트남의 반중(反中) 정서는 강렬하다. 4년 전인 2014년 5월에는 베트남 곳곳에서 유례없는 반중 폭동이 터졌다. 중국 정부가 베트남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고 파라셀제도에서 석유 시추를 감행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를 저지하려는 베트남 해군 초계함에 중국 해군 함정들이 밀어내기 공격을 감행하고 물대포를 쏴 베트남 장병 9명이 다치자 베트남 여론이 폭발했다.

2016년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이 반중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2016년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이 반중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2000년 넘게 이어온 반중 기치

베트남 전역에서 ‘중국은 베트남의 석유를 훔치지 마라’라는 푯말을 든 시위대가 들고일어났다. 남부 빈즈엉성에 있는 공단에서는 분노한 베트남 노동자 2만여명이 조업을 중단하고 간판에 한자(漢字)가 적힌 공장들을 습격했다. 대만, 한국, 싱가포르 등에서 온 기업들의 공장 10여곳이 중국 공장으로 오인돼 불탔다. 로이터는 현지 병원 관계자를 인용해 이 공단에서만 중국인으로 간주된 16명과 베트남인 5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중국인 7000여명이 본국으로 피신했다. 베트남공산당이 이끄는 인민군대와 인민공안(경찰)의 사회 통제가 강력한 베트남에서 이런 화산 같은 분노의 폭발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폭동은 응우옌떤중 당시 총리가 나서 자제를 당부하고 군과 공안이 투입돼 850여명을 체포하고서야 잦아들었다. 반중 집회는 그 뒤에도 두 달간 계속됐다.

2016년에는 중국 여권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다. 중국 정부가 2012년부터 자국민에게 발급한 여권의 한 면에는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선인 ‘구단선(九斷線)’이 인쇄돼 있다. 파라셀제도와 스프래틀리제도 전체를 포함해 남중국해의 90%가량을 중국 영해로 표시한 선이다. 이 여권은 2012년 당시에도 베트남을 비롯한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들의 항의를 받았는데, 2016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하자 다시 문제가 됐다. 베트남 정부는 일부 육상 출입국관리소와 국제공항에서 2012년판 여권을 제출한 중국인들에게 여권에 입국 허가 도장을 찍어주기를 거부했다. 비자는 별도 용지에 발급받게 했다. 베트남 입국심사관이 중국인이 제출한 여권의 구단선이 인쇄된 쪽마다 욕설을 적어 돌려줬다가 중국 정부의 항의를 받는 일까지 일어났다.

베트남인이 품고 있는 격렬한 반중 감정은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무인도와 암초들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반중’ 기치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베트남은 민족국가 형성의 여명기부터 중국의 간섭과 지배에 노출돼 있었고, 베트남의 정체성은 중국에 맞서 정치적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 벌인 끈질긴 투쟁 속에서 형성됐다.

각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은 그 나라 정부와 국민들이 자기네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보여준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와 최대 도시 호찌민에 있는 국립 역사박물관들도 마찬가지다. 현대 베트남의 강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과 왕조시대 보물들, 공산혁명을 기리는 물건들이 시대 순으로 배열돼 베트남이 얼마나 오랜 기원을 갖고 있고 빛나는 역사를 펼쳐왔는지를 과시한다. 이 공식 역사 해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중국의 지배에 대한 항쟁’이다. 베트남은 기원 후 첫 천년기의 역사 전체를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가는 과정이었다고 정의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전시실들은 베트남 인민이 외세 침략자 중국에 맞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와 전투 장면을 재현한 미니어처 작품, 실제 전투에 쓰였던 무기들로 가득 차 있다. 호찌민시 역사박물관의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바익당강(오늘날의 송코이강) 바닥에서 건져올린 나무말뚝이 전시돼 있다. 베트남 최고의 민족영웅 쩐흥다오(陳興道·1228~1300)가 원(몽골제국)이 중국인 병사들을 동원해 벌인 3차 침입을 격퇴할 때 적선에 구멍을 내기 위해 박아뒀다는 말뚝들이다.

베트남에 대한 중국 간섭의 시작은 22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시황제가 보낸 원정군이 베트남 북부의 토착 정권인 어우락(歐駱)을 무너뜨리고 오늘날의 광둥·광시성과 베트남 북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시황제 사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이 지역은 ‘남월(南越)’로 독립했지만 우두머리는 원정군의 부장(副將)이었던 조타(趙佗)였다. 남월은 다시 한(漢) 무제(武帝)가 보낸 원정군에 무너졌고 베트남은 기원후 938년까지 1000년 넘게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인의 대중 항쟁은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끈질겼다. 왕조교체기를 맞은 중국이 혼란에 빠질 때마다 베트남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곤 했다. 한대에는 쯩짝·쯩니(徵側·徵貳) 자매의 반란(40~43)이 있었고 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 초에는 전 리(李) 왕조(544~602)가 한때나마 중국 세력을 몰아냈다. 베트남이 독립을 이룬 것은 중국이 오대십국의 혼란기에 빠졌을 때인 응오(吳)왕조(939~967) 때의 일이다.

기원후 첫 천년기에 베트남의 지배자였던 중국은 다음 천년기에도 내내 베트남에 실제적인 위협이었다. 중국은 기회만 되면 베트남을 재정복해 직접 지배하려 했다. 베트남은 송대와 원대에도 중국의 침입에 시달렸고, 명대에는 영락제 시기에 일시적으로(1407~1427) 중국의 지배가 재현되기도 했다. 1788년에는 청의 20만 대군이 베트남에 들어와 하노이를 점령했다. 응우옌반후에(阮文惠·1753~1792)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베트남인들은 현대 중국을 구성하는 56번째 소수민족이 됐을지도 모른다.

정복의 기도가 좌절된 뒤에도 청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의 군주들은 침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왕으로 낮춰야 했다. 이 베트남 특유의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는 베트남 통치자들에게 지속적인 굴욕감을 안겼다. 청의 영향력은 1885년 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서야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에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래는 하지만 중국인은 싫다

중국에 대한 경계심은 현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앞세운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중국의 개입을 경계했다. 많은 북베트남군 지휘관들이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북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물자와 병력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늘 중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베트남을 흡수하려 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들의 의심은 197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통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구실로 국경을 넘어 내려오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뒤로 베트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줄곧 친소련 노선을 걸었다. 베트남과 중국은 소련이 해체되는 1991년까지 단교 상태로 있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모두 경제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오늘날 중국은 베트남의 최대 무역상대국이다. 지난해 베트남과 중국 간 무역액은 938억달러(약 99조9100억원)에 달했다. 베트남 전체 무역 규모(4248억7000만달러)의 22%에 달하고, 베트남에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한 한국과의 무역액(618억달러)도 크게 뛰어넘는다. 중국은 지난 2000년간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의 중국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뿌리 깊다. 베트남 어디에서나 “중국인과 거래를 하기는 하지만, 중국인이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胡志明·1890~1969)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베트남에 중국군을 끌어들이려는 동료 독립운동가들을 꾸짖은 적이 있다. 그는 중국 국민당군을 진주시켜 프랑스의 베트남 재점령을 막겠다는 구상에 대해 “중국이 베트남 땅에 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냐? 역사도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일갈했다.

“지난번에 중국인이 왔을 때 그들은 1000년을 머물렀다. 프랑스인은 외국인이다. 그들은 약하고 식민주의는 죽어가고 있다. 백인들은 아시아에서 끝장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인이 들어오면 그들은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악취를 5년간 맡는 것이 남은 평생 중국의 분변(糞便)을 먹는 것보다는 낫다!”

김경필 조선일보 베트남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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