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26일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건설 현장을 방문해 한국이 건설한 바라카 원전 1호기 앞에서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제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26일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건설 현장을 방문해 한국이 건설한 바라카 원전 1호기 앞에서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제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24~27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방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여러 중동 대국(大國)이 있지만, 대통령 취임 후 첫 중동 방문지로 한반도 면적 35%의 소국(小國) UAE를 택한 것이다. UAE는 문 정부와 궁합이 잘 맞는 나라는 아니다. UAE는 산유국이지만 탈(脫)석유 시대를 내다보고 걸프 산유국 최초로 원전(原電) 프로젝트를 백년대계로 추진하는 나라다. 반면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원전은 안전하지도, 저렴하지도, 친환경적이지도 않다”고 말한 ‘탈원전 대통령’이다. 문 정부는 또 UAE의 원전 건설을 따내며 이 나라와 사이가 돈독해진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적폐청산’ 명단에 올리고 현재 구속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우리가 건설한 바라카원전 1호기 완공 기념식에 맞춰 UAE를 찾은 건 UAE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매우 크기 때문이다. 우리 외교부 관계자는 “UAE는 우리가 원전을 수출한 나라일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 지역 교역의 중심지이자 교두보라는 점 때문에 각별히 공을 들이는 것”이라면서 “우리 주요 원유수입국인 이란에도 1개인 외교 공관(公館)을 이 작은 나라에 2개(아부다비·두바이)를 둔 것만 봐도 얼마나 중요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진주조개잡이 나라가 미래도시로

UAE의 위상이 높아진 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이 나라 최대도시인 두바이는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無名)의 도시’였다. 아부다비, 두바이에 주로 사는 이 나라 국민 대부분의 생업은 진주조개 양식이었다. 1960~1970년대 들어 유전(油田) 개발로 ‘오일머니’를 벌어들이긴 했지만, 하루 원유생산량은 150만배럴 수준이었다. 당시 하루생산량이 1000만배럴인 사우디의 15%에 불과했다. UAE는 숱한 산유국의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했다. 사우디는 이들을 속국(屬國), 위성도시처럼 여겼다.

국제뉴스에 거의 나오지 않던 UAE가 헤드라인의 단골 소재가 된 건 1990년대 말 들어서다. 이들이 ‘오일머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반 산유국과 달리 관광·금융업 등을 개발하며 비(非)산유국처럼 행동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탈석유 정책을 추진하며 산업다각화에 나섰던 것이다. 사우디, 쿠웨이트 등 이웃 걸프 산유국들은 “땅만 파면 콸콸 쏟아져나오는 ‘검은 금괴(오일)’를 놔두고 왜 딴짓을 하느냐”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두바이는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만 시설과 국제공항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고 항공 노선도 대폭 늘렸다. 두바이는 물류 유통의 ‘허브(중심지)’로 나날이 변모해갔다. 은행 등 금융시설도 늘리고 이민법을 손봐 외국인이 쉽게 이주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중동의 대표 ‘금융도시’는 베이루트(레바논)와 쿠웨이트였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가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 사이, 두바이는 꾸준히 금융허브의 면모를 갖추며 성장했다. ‘큰손’들이 하나둘 전쟁터로 전락한 베이루트를 떠나 두바이로 몰려갔다. 두바이는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칼리파’, 세계에서 가장 넓은 ‘두바이 쇼핑몰’을 지으며 누구나 한 번쯤 여행하고 싶은 나라로 변모해갔다. 기업 규제 완화와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외국 투자를 끌어들였다. 삼성전자, 도요타, DHL, 3M 등 각종 글로벌 업체와 각국 정부 무역대표부를 비롯해 CNN 등 세계 주요 언론도 중동 본부를 두바이로 옮겼다. UAE는 중동의 모든 길이 통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중동의 로마’라 불렸다.

그 결과 두바이의 재정에서 오일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으로 떨어졌다. 대신 건설·부동산·관광업과 각종 수수료 수입이 늘어 ‘오일 시대’보다 더 큰 부를 창출하게 됐다. 체질이 180도 바뀐 것이다. 이에 1980년 500억달러(55조원)였던 UAE 국내총생산(GDP)이 2017년 4200억달러(460조원)를 돌파했다. 840% 성장이다. 지난해 UAE 1인당 GDP는 약 4만달러에 달했다. 4만달러는 UAE 전체 인구(980만명) 중 90%를 차지하는 인도·필리핀·네팔·방글라데시 등 외국인을 포함한 수치다. 고위 관료직과 기업 경영직군을 차지하는 인구 10%(100만명)의 ‘이마라티(UAE 본토민)’만을 따져 보면 1인당 GDP는 15만달러가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두바이 지도자 무함마드

두바이가 아부다비 등 다른 도시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데는 현재 UAE 총리 겸 부통령이자 두바이의 아미르(통치자)인 무함마드 빈라시드 알 막툼(69)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무함마드는 4형제 중 셋째였지만 그의 첫째 형 막툼 빈라시드 알 막툼과 함께 1990년 초부터 두바이를 경영했다. 막툼이 1990년 노환으로 별세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두바이의 아미르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두바이 개혁·개방 정책은 어릴 적부터 카리스마가 남달랐던 무함마드가 이끌었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야자수 잎사귀 모양으로 펼쳐진 5.72㎢ 면적의 인공섬 ‘팜주메이라’도 그의 아이디어다. 팜주메이라는 ‘부르즈칼리파’와 함께 UAE의 대표적 상징물이자 신선한 아이디어의 건설 프로젝트로 평가받으며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함마드는 2006년 맏형 막툼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자 정식으로 아미르가 됐다. 이후 그는 드론(drone·무인기)택시 도입, 태양광 발전소 건립 등 깜짝 놀랄 만한 프로젝트를 짧은 기간에 실현시키며 강력한 추진력을 선보였다. 그는 2007년 4월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청계천을 추진할 때 처음엔 많은 사람이 나를 어리석다고 했다”는 이 전 대통령의 말을 듣고선 “나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석유 없이도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소신을 굳게 갖고 있었다. 그의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에 세계가 적잖게 놀랐다. 그간 ‘아랍 왕자’라고 하면 노력 없이 번 ‘오일머니’를 펑펑 써대며 자기 배만 불리는 게으르고 멍청한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자기관리가 엄격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그가 영국 올더숏의 몬스 사관학교(왕립 사관학교 샌드허스트의 전신)를 다니며 밴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관학교 졸업 때 최고의 생도에게 주는 상인 ‘명예의 검’을 수상했다.

무함마드가 탄탄대로만 달렸던 것은 아니다. 두바이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했다. 두바이의 평판이 ‘사막의 기적’이란 찬사에서 ‘모래 위의 성’ ‘사막의 신기루’라는 악평으로 갈렸다. 회복하려면 6~7년은 걸릴 것이란 잿빛 전망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1년 만에 “도전 없는 인생은 따분한 것 아니냐”면서 경제 회복 선언을 했다. 채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무함마드가 이렇게 벌떡 일어설 수 있었던 건 그의 뒤에 후원자인 아부다비 지도자 칼리파 빈자이드 알 나흐얀(70)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파는 빚더미에 앉은 무함마드에 통 큰 대출을 해주며 그의 손을 잡아줬다. 무함마드는 고마운 마음에 원래 ‘두바이타워’였던 최고층 빌딩의 이름을 ‘부르즈칼리파’로 바꿨다.

두바이의 아미르(통치자)인 무함마드 빈라시드 알 막툼(오른쪽)과 UAE의 상징물인 부르즈칼리파. ⓒphoto 뉴시스
두바이의 아미르(통치자)인 무함마드 빈라시드 알 막툼(오른쪽)과 UAE의 상징물인 부르즈칼리파. ⓒphoto 뉴시스

개혁 큰 그림 그린 아부다비 지도자

칼리파는 UAE의 대통령으로서 좌장 역할을 하며 UAE 개혁의 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아부다비를 두바이처럼 재깍재깍 유행에 맞춰 변화시키기보다는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선이 굵은 개혁 정책으로 바꿔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 안보를 위한 원전 사업이다. 칼리파는 “기름 값이 물보다 싼 나라에서 웬 원전이냐”는 비판을 받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전력 공급원을 다각화하고 이를 위한 인프라를 확충하지 않고선 경제 발전은 물론 국가 안보도 지킬 수 없다고 봤고, 이를 위한 최고의 해결책은 원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부다비가 위치한 걸프 지역은 더운 중동 가운데서도 기온과 습도가 유난히 높은 지대에 속해 냉방 시설을 많이 사용한다. 야외 버스정류장에도 에어컨이 달렸을 정도다. 인구는 적지만 전력 수요량이 큰 이유다.

UAE는 나라 전체 전력의 95%가 천연가스 발전에 의존하고 있고, 이 가스의 100%를 카타르로부터 수입한다. 카타르는 이슬람 양대 종파(宗派)인 수니와 시아 가운데 사우디·UAE와 같은 수니파 정권이지만, 특이하게 사우디보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가깝게 지낸다. 이런 카타르가 만에 하나 가스 공급을 기습적으로 중단하는 ‘에너지 테러’를 하면, UAE는 전력 대란에 빠져 국가 위기 사태가 벌어진다. 국가 경제가 계속 규모를 키워나가기 위해서뿐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도 원전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약 200억달러를 들여 140만㎾급 신형 원전 4기를 짓기로 했다. 4기가를 풀가동하면 국가 전체 발전량의 25%인 560만㎾를 생산한다.

칼리파는 국운(國運)이 걸린 원전 사업에 ‘바라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랍어로 ‘신이 내린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이 원전 건설을 2009년 한국에 맡겼다. 바라카 원전의 60년 운영권도 한국인 손에 맡겼다. 원전으로 양국은 ‘100년 라피크’가 된 것이다. 라피크는 ‘먼 사막 길의 동반자’라는 뜻의 아랍어다.

칼리파는 바라카 원전 완공을 보지 못하고 2014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생명은 부지했지만, 병상 생활로 국정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리더십 공백이 우려됐지만, 남동생 무함마드 빈자이드 알 나흐얀(57) 왕세제가 빈자리를 안정적으로 메우고 그의 안보 강화 정책을 이어갔다. 무함마드 빈자이드는 미국·영국·프랑스와의 군사 협력을 더 강화했다. 최신예 전투기, 정찰 드론 등 최첨단 무기를 대거 들였다.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는 한편 자국을 위협하는 이란에 맞서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수입해 배치했다. 사드는 원전을 위해서도 필수였다. 이란의 군사 지원을 받는 예멘 반정부 무장단체 ‘후티’가 탄도미사일 공격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UAE는 전통적인 중동 패권국 사우디의 개혁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우디 실세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 알 사우드(33)는 최근 ‘비전 2030’이란 이름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UAE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무함마드 빈살만은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걸프 해안 휴양지를 본떠 사우디 홍해 연안에 비키니 착용과 음주가 허용되는 관광특구를 건설할 계획이다. 무함마드 빈살만은 무함마드 빈자이드를 형처럼 여기며 편하게 전화를 걸어 국정 운영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UAE의 독특한 정치 체계

UAE는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즈만, 움 알 콰인, 라스 알 카이마, 푸자이라 등 7개 도시 겸 토후국(土侯國)이 연합한 국가다. 각 토후국의 지도자를 아랍어로 ‘아미르’라고 한다. 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을 ‘이마라’라고 한다. UAE는 일곱 이마라가 연합한 나라라는 뜻이다. 이마라마다 자치권을 갖고 서로 간섭하지는 않지만, 국방은 아부다비가 통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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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전 예루살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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