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오전(현지시각)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계 미국인 3명의 귀국을 축하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여사, 토니 김, 트럼프, 김동철, 김학송씨이다. ⓒphoto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오전(현지시각)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계 미국인 3명의 귀국을 축하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여사, 토니 김, 트럼프, 김동철, 김학송씨이다. ⓒphoto 뉴시스

“채널 고정하세요!(Stay tuned!)”

지난 5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올린 트윗 글이다. 북에 억류된 미국인들 문제를 두고 한 말이다. ‘낚시’ 아니냐며 미 언론의 점잖은 조롱이 쏟아졌다. 일주일 후인 5월 10일, 본 방송분이 공개됐다. 사실상 ‘포로’였던 억류자 3명 모두 집으로 귀환했다. 모두 한국계다.

‘트럼프 월드’에선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어프렌티스(Apprentice) 백악관 편’을 보는 것 같다. 원래 ‘어프렌티스’는 2004년 미국 NBC가 방영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트럼프 밑에서 일할 견습사원 자리를 두고 지원자들이 다투는 설정이었다. 매회 트럼프가 직접 탈락자를 지명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였다. NBC 개국 이후 최고의 시청률을 안겨줬다. 한때 미국에서만 2800만명 이상이 동시에 트럼프를 지켜봤다. 요즘은 전 세계가 트럼프를 지켜보고 있다. 주인공은 같아도 배경무대가 커지다보니 엄청난 일이 일어난 다음날 더 엄청난 소식을 듣는 게 일상화됐다.

‘어프렌티스 백악관 편’ 5월 둘째 주 탈락자는 이란이다. 현지시각으로 5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시장은 이미 트럼프 시대에 적응했는지 심드렁한 반응이다. 당일 국제유가(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오히려 2.4% 하락했다. 미 주류 언론은 아직도 ‘트럼프’라는 현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지난 미 대선 이후 하루도 안 빼놓고 트럼프가 한 말이나 누군가 트럼프에 대해 한 말을 보도한다. 오죽하면 뉴욕타임스 칼럼에 ‘우리 언론인들은 트럼프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한탄이 등장했을까.

트럼프 시대를 악몽으로 여기는 건 정계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탄핵을 만지작거리고 공화당 내에서도 ‘증오 발언’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온다. “내 장례식에 트럼프 대통령 대신 펜스 부통령이 참석하길 바란다.”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했다는 말이다. 매케인은 2016년 대선 경선 때 트럼프에게 아프게 조롱당했다. “매케인 의원은 베트남전에서 포로로 잡혔을 뿐인데 어째서 전쟁영웅이냐.” 워싱턴과 뉴욕은 아우성이지만 요즘 트럼프의 지지율은 견고하다. 예사로 40%대가 나온다. 대북 정책에 대해선 미 국민 절반 이상이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이쯤 되면 기업 활동에 엔터테인먼트를 접목해 성공한 트럼프 방식이 국내 정치에서도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그는 꽤 다작(多作)을 한 작가다. 20권가량의 책에 자신의 가치관이 어떤지, 왜 그리 생각하는지 구구절절 썼다. 첫 저서 ‘거래의 기술’(1987)은 이미 경영학 필독서 반열에 올랐다. 나머지도 대부분이 베스트셀러다. 쉬운 구어체 문장인 데다 실제 인물을 거침없이 소재로 삼는다. 한국 재계에 비유하면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 2년에 1번꼴로 책을 내는데 재계 인사들과의 시시콜콜한 전화통화 내용을 담는 식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책은 2007년, 한국엔 2016년에 나온 ‘빅 싱킹’이다. 트럼프가 머리 모양으로 놀림당하는 걸 약간 괴로워한다는 것과 생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대선 기간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를 ‘술 취한 삼촌’이라 표현했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술을 마시지 않았다. 심지어 군사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트럼프의 행적으로 추려본 북·미 회담 관전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 트럼프식 실용주의다. 그는 지금까지 당적을 6번 바꿨다. 1987년까진 민주당이었다. 이후 공화당에 가입했다. 1999년엔 개혁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2000년 대선 때문이었다. 대선 경선에서 떨어지자 2001년 다시 민주당으로 복귀했다. 2009년 공화당으로 옮겨갔고, 2011년부턴 아무 곳에도 적을 안 뒀다. 2016년 대선 때문에 다시 공화당으로 돌아왔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 상당 기간 적을 뒀던 셈이다. 클린턴 부부와도 원래 친분이 깊었다. 대선 출마 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상의한 게 알려져 공화당에서 기겁하기도 했다. ‘민주당에서 보낸 X맨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다.

정치를 하면서 성향이 자꾸 변한 게 아니다. 원래 트럼프에게 당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책에도 썼다.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한 부동산 개발업자가 “선거를 위해 소속 정당을 바꾸어야 하나”고 물어왔다. 트럼프가 해준 충고다. “이쪽저쪽을 따질 게 아니라 이긴 쪽에 붙어 그쪽에 충실한 사람이 돼라.”(‘거래의 기술’·1987) 대통령 당선 후엔 하이디 하이트캠프 민주당 상원의원에게 “공화당으로 넘어오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이루려는 목표이지, 거기까지 닿는 수단이 아니다. 뒤집어보면 트럼프가 자주 바꾸는 무언가는 수단일 순 있지만 목표는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김정은에 대해서는 호칭 자체가 급선회했다. ‘미치광이(Mad Man)’였는데 어느 순간 ‘매우 훌륭한(honorable) 사람’으로 바뀌었다.

‘평화가 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5월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평화가 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5월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둘째, 거래를 위한 거래를 한다. “거래는 나에게 일종의 예술이다”란 그의 말은 유명하다. 이런 말도 남겼다. “거래를 할 때 가장 나쁜 자세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일이다. 그런 태도를 보이면 상대방은 전의에 불타게 되고, 당신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최선의 방법은 힘을 내서 거래를 시작하는 것이고, 당신이 힘을 내면 낼수록 그만큼 성공의 가능성은 커진다.” “일을 성공시키는 마지막 열쇠는 약간의 허세다.” 이런 말들에서 트럼프가 책에 반복해 쓴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궁극적인 결과이지, 사람을 만나 친분을 쌓는 등의 ‘과정’이 아니다. 트럼프는 기업가일 때도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았다. 주로 사무실에 앉아 하루종일 전화를 걸며 업무를 처리했고 점심은 비서가 만들어주는 토마토주스로 때웠다. 청결 강박증도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신화는 뉴욕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시작됐다. 망해가는 호텔을 1976년에 인수해 리모델링했다. 트럼프란 사람의 본질과 뼈대는 그때 형성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수중에 25만달러도 없는 젊은 부동산 업자가 천신만고 끝에 1000만달러가 넘는 호텔을 인수했으니 말이다. 순전히 ‘거래의 기술’을 터득하며 이룬 성과다. 그는 하얏트를 동업자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한 협상을 하려면 최고위층과 만나야 한다”는 걸 배웠다. B를 압박하기 위해 C를 이용하는 것도 이때 배운 스킬이다. ‘그랜드하얏트 말고 다른 호텔은 뉴욕시 안에 일절 지을 수 없다.’ 하얏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독소조항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트럼프는 대출 은행을 이용했다. 하얏트가 호텔을 못 짓게 하는 게 은행에 이득이라는 전망으로 은행을 설득했다.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도 이용하고, 이란 핵협정도 탈퇴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얘기다.

셋째는 ‘직관의 힘’이다. 트럼프 당선 직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저 코헨은 “민주당은 트럼프의 직관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그럴듯한 시장조사는 믿지 않는다. 언제나 스스로 조사를 해서 결론을 낼 뿐이다.” ‘스스로 하는 조사’라는 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거였다. 신기하게도 중요한 결정엔 그런 식이 더 도움이 됐다고 트럼프는 회고한 적이 있다. 북·미 회담을 앞두고 트럼프는 김정은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예의 토마토주스를 마시며 전화를 돌리고 있을 것 같다. 전화기 너머엔 친한 부동산 개발업자나 카지노 매니저, 프로레슬링 관계자, 뮤지컬 제작업체 대표 등이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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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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