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지난 4월 9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KCNA
김정은이 지난 4월 9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photo KCNA

“1948년 4월 24일 옛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의 별장. 스탈린을 비롯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 안드레이 주다노프 중앙위원회 서기 등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이곳에서 회의를 갖고 북한 헌법 제정 등을 결정했다. 이 회의에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북한 헌법은 소련 헌법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스탈린이 일부를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같은해 8월 북한에서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조선최고인민회의는 9월 8일 헌법을 채택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을 결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명은 러시아어를 그대로 직역한 것이었다.”

시모토마이 노부오 일본 호세이대학 법학부 교수가 옛 소련의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토대로 쓴 ‘아시아 냉전사’라는 저서의 내용이다.

북한은 이처럼 소련이 만들었던 헌법을 전체적으론 지금까지 13차례 개정했다. 그중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내용이 들어간 헌법은 크게 세 개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다. 이 헌법은 1948년 제정된 헌법과는 달리 북한이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또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하고, 조선노동당의 우월적 지위를 명시했다. 국가주석제를 도입해 모든 권한을 주석으로 통합시켰다. 두 번째는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이다.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세 번째는 2012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이다.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규정했다. 특히 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북한은 201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7차 회의에서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핵보유국 지위 공고화법)까지 채택했다.

2012년 개정 헌법 서문에 핵보유국 명시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판문점선언’의 제3조 4항에는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에 있는 핵 실험장을 폐기했다. 하지만 미국 등 국제 핵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 실험장 폐기가 비핵화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조치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는 “북한의 핵 실험장 폐기를 비핵화 의지로 볼 수 없다”면서 “북한의 잠재적인 핵무기 제조 능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이번 행사는 화려한 쇼에 가깝다”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폭파부터 할 것이 아니라 핵 실험 장비, 갱도를 만드는 방법, 핵무기 제조 방법, 핵실험 역량을 공개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니얼 러셀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김정은이 핵 무력을 완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실험이 필요 없다고 밝힌 만큼 핵 실험장 폐기는 큰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북한의 핵 실험장 폐기는 지난 4월 20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당시 김 위원장은 “핵무기의 병기화가 완결된 만큼 우리에게 그 어떤 핵 실험과 중장거리 및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도 필요 없게 됐고 핵 실험장도 사명을 끝마쳤다”고 밝혔다. 올리 하이노넨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차장은 “핵 실험장 폐기 행사는 정치적 행위일 뿐”이라면서 “단순히 핵 실험장의 폐쇄가 아니라 핵 실험장의 해체가 돼야 하는데, 핵 실험장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는 동의가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패트릭 크로닌 미국신안보센터(CNAS) 아시아태평양안보소장은 “만약 북한이 과거처럼 영변 핵시설을 넘기고 금방 재건할 수 있는 핵 실험장 폐기 등에 그친다면 트럼프 정부는 북한에 이전보다 더 강한 제재 조치를 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의 국방정보국(DIA)과 국가지리정보국(NGA)은 북한이 핵 실험장을 폐기해도 수주〜수개월 내에 복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photo IAEA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photo IAEA

노동당 규약에는 핵·경제 병진노선

그렇다면 북한이 비핵화의 진정성을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입증하려면 어떤 조치를 해야 할까. 국제사회는 북한이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일 수 있는 조치를 하지는 않으면서 오히려 미국 정부에 체제 안전 보장을 담보할 수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국제사회는 북한이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일 수 있는 중요한 조치를 반드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조치로는 북한 헌법 서문에 명시된 핵보유국 조항을 삭제하고 핵보유국 지위 공고화법과 핵·경제 병진노선이 들어간 조선노동당 규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최소한 여섯 번의 핵합의를 파기한 전력이 있다.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1994년 제네바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2·13 및 10·3 합의, 2012년 2·29 합의 등이 있었지만 북한은 매번 ‘대화와 핵개발은 따로’라는 이중전략에 따라 이를 준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북한은 2016년 5월 8일 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핵보유국’을 명시하는 결정서를 채택한 바 있다. 결정서에는 “공화국은 핵보유국으로서 핵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핵무기의 소형화, 다종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고 핵 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해 우리 조국을 동방의 핵 대국으로 만들자”고 밝혔다. 당시 북한은 당 규약을 개정해 “경제 건설과 핵 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을 틀어쥔다”며 핵·경제 병진노선을 명문화했다. 북한은 당이 국가보다 우위에 있는 체제로 당 규약이 북한 체제를 이끌어가는 기본 지침이 된다.

북한은 또 지난해 10월 7일 노동당 중앙위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핵 보유 고수’와 ‘국제제재 극복’을 2대 당면활동 방향으로 채택했었다. 김정은은 지난 1월 1일 신년사에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실전배치 및 연구개발을 지속하고 즉각적인 핵 반격태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4월 20일의 제3차 전원회의에서도 ‘국가 핵 무력 완성과 핵무기의 병기화’를 천명함으로써 핵 보유 기조가 불변임을 확인했다. 때문에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 이전이라도 노동당 중앙위 전체 회의를 소집해 핵 보유 포기의 뜻을 밝힐 필요가 있다. 노동당 규약에 따르면 중앙위원회는 노동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당 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 모든 당 사업을 조직·지도하는 기구다. 발언권·의결권을 모두 가진 위원(144명)과 발언권만 가진 후보위원(129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참석하는 전원회의에서는 노동당의 주요 노선과 정책이 결정된다. 김정은 핵·경제 병진노선도 2013년 3월 소집된 중앙위 제6기 제23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됐었다.

김정은이 핵무기 개발을 지도했다고 보도한 지난해 9월 3일자 노동신문 1면.
김정은이 핵무기 개발을 지도했다고 보도한 지난해 9월 3일자 노동신문 1면.

임계전 핵실험 능력이 의미하는 것

북한이 핵보유국 삭제 등 헌법 개정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이유는 ‘임계전(臨界前) 핵실험(subcritical nuclear test)’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임계전 핵실험은 플루토늄이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초고온 및 초고압을 가해 물질들의 거동 정보와 무기화 정보를 획득하는 실험이다. 폭발 핵실험을 하지 않아도 컴퓨터상에서 핵폭발 자체를 정확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북한은 지난 4월 20일의 제3차 전원회의에서 “임계전 핵실험과 지하 핵실험,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초대형 핵무기 및 운반수단 개발을 위한 사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핵무기 개발을 실현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임계전 핵실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기해도 지하 폭발 핵실험 없이도 핵무기를 개량하고 기술을 고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북한이 핵물질을 은닉하거나 추후에라도 불법적으로 들여온다면 임계전 핵실험을 통해 몰래 단기간 내에 핵을 재건할 수 있다. 임계전 핵실험은 섬광이 발생하지 않아 위성으로 관측할 수 없고, 지진파도 미약해 감지가 어렵다. 지하에서 실시한다면 방사능 감시 장치로 관찰할 수도 없다. 안드레아 버거 미국 미들버리 국제관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의도는 핵무기를 보유한 채로 책임 있는 핵 관리자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정부가 북한이 미래에 다시 핵을 개발할 가능성까지 차단하겠다며 ‘영구적이며,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PVID)’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리사 콜린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은 “김정은 정권은 핵무기가 체제 보장 및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거듭 강조해왔으며, 헌법에도 핵을 명시하고 있다”면서 “하룻밤 새 기존 입장이 뒤바뀔 것으로 믿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또 다른 조치로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는 것이다. NPT는 1960년 프랑스, 1964년 중국의 잇단 핵실험으로 핵확산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자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미국과 소련이 1968년 주도해서 만든 협정이다. 이 협정은 각국의 서명과 비준 과정을 거쳐 1970년 국제적인 조약으로서 효력을 갖게 됐다. NPT는 불평등 조약이다. NPT 체제에서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실시한 국가만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있고, 이후 핵실험을 실시한 국가들은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을 보유했으면서도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체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NPT 복귀의 중요성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했다. 당시 소련이 북한과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협력협정’을 맺으면서 NPT 가입을 조건으로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1993년 IAEA가 핵 물질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며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에 따라 NPT 탈퇴를 철회했다. 이후 북한은 제네바합의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계속해왔다. 그러다 미국이 2002년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을 생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2003년 NPT를 탈퇴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했다. 북한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6차례 핵실험을 감행하며 NPT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해왔다. 만약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면 NPT 체제 밖에 있으면서 핵을 보유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과는 달리 NPT 체제 내에서 핵을 개발한 최초의 사례가 된다. 이렇게 되면 NPT 체제가 와해될 수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성을 보이려면 NPT에 복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NPT 63개 회원국들은 지난 5월 4일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NPT와 IAEA의 안전조치협정에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북한이 NPT와 IAEA의 안전조치협정에 재가입한다면 핵사찰을 받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김정은이 IAEA 복귀와 함께 북한 모든 지역에 대한 핵 사찰을 수용한다면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시나 제르보 포괄적핵실험금지기구(CTBTO) 사무총장은 “북한이 NPT에 복귀한다면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구축조치(confidence building measure)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그동안 비핵화 운운하면서도 NPT 재가입 여부에 대해선 전혀 언급한 적이 없다.

북한은 이와 함께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가입해야 한다. 북한은 현재 전 세계에서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가장 많은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신경작용제인 VX와 사린가스, 질식작용제인 포스겐(CG), 혈액작용제 등 각종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 화학무기의 규모는 2500~5000t에 달한다. 특히 북한은 다량의 VX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VX가스는 독성이 가장 강한 화학무기로 꼽힌다. 북한은 지난해 2월 김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에도 VX가스를 사용했다. 북한은 유사시 화학무기를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화학무기 부대와 투발수단들을 갖추고 있다. 화학무기는 핵무기보다 더욱 공포를 유발하기도 한다. 화학무기는 시리아 내전에서 증명됐듯이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동안 시리아의 화학무기 개발을 적극 지원해왔다. 북한은 CWC에 가입하지 않은 4개국 중 하나다. 북한은 또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때문에 북한이 어느 정도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북한이 미국의 비핵화 협상에서 합의를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화학무기들을 그대로 보유한다면 국제사회는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김정은이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는 점을 입증하려면 진정성 있는 조치들을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 2012년 집권 이후 지난해까지 핵과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왔던 독재자가 어느날 갑자기 마음을 바꿔 ‘평화의 사도(使徒)’ 행세를 하는 것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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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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