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스는, 더 정확하게는 한국 특파원들이 다루는 미국 뉴스는 대부분 워싱턴이나 뉴욕 등 동부에서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서부도 또 하나의 뉴스 중심이지만 그 외의 지역은 사건사고나 자연재해가 아닌 이상 국제 뉴스에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다. 당연히 취재하러 갈 기회도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면 대선 유세이다. 2016년 대선 때 꽤 여러 주를 돌아다녔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오하이오주였다. 오하이오주의 유권자 인종 구성은 미국 전체 인구 비율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선거 결과가 미국 대선 결과와 대체로 일치해, 대선 때면 오하이오주 여론 동향이 매우 중요해진다.

오하이오주는 ‘대세’가 잘 형성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북부의 클리블랜드, 중부의 컬럼버스, 남쪽의 신시내티를 중심으로 각각 여론 움직임이 다르다. 그래서 대선후보들이 유세하는 데 애를 먹는 곳이다. 지난 대선 때 오하이오주 선거 관련 행사를 취재하느라 주도인 컬럼버스에서 자동차를 빌려 신시내티까지 갔다. 고속도로는 쭉 뻗어 있고 양옆으로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풍경 변화가 없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오하이오주 출장의 절정은 윌밍턴이란 작은 도시였다. 작고 한산했고 활기가 없었다. 식당을 찾다가 마을 어귀에서 마주친 동네 사람에게 “중심가가 어느 쪽이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가 피식 웃었다. “뭐, 중심가라고 할 것도 없지만 저쪽으로 가봐요. 식당이 몇 개 있긴 할 겁니다”라고 했다. 중심가라는 곳도 텅 비어 있었다.

윌밍턴은 사연 있는 도시였다. 제조업이 사그라든 이후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들은 대부분 활력을 잃었다. 일자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으니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윌밍턴의 사연은 더 극적이었다.

윌밍턴은 독일계 특송업체 DHL 덕에 오래도록 먹고살았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DHL은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던 물류센터가 문을 닫았다. 이 작은 도시는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그해 DHL이 9500개의 일자리를 줄였는데 그중 7000개가 윌밍턴에 있었다. 어찌나 타격이 컸는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유명한 TV 스타가 이 지역에 와서 방송을 했고 전국에서 기부금이 쏟아졌지만 무너진 경제는 쉽사리 살아나지 않았다. 최근엔 아마존이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경기가 회복되는 분위기라고 한다.

사람이 거의 없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한때는 매력 있었겠지만 이제는 쓸쓸해진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낯선 도시 풍경 덕에 내가 아는 미국은 동·서부 양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에 꽤 오래 살았지만 미국 지도를 반으로 접었을 때 중간에 해당하는 지역은 거의 못 가봤다. 노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오클라호마 같은 주는 아마 앞으로도 가볼 일이 쉽게 생길 것 같지 않다.

다시 윌밍턴으로 돌아가면, 그날 오후 나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의 유세를 보러 갔다. 교외의 큰 컨벤션센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텅 빈 도시 어디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일자리를 되찾아주겠다는 트럼프의 연설에 열광했다. 오하이오는 결국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돌이켜보면 트럼프는 미국의 약한 고리, 아픈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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