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지난 5월 29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핵 폐기’를 위한 미·북 정상회담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지난 5월 29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핵 폐기’를 위한 미·북 정상회담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볼턴이 뒤집은 것 같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지난 5월 29일 오후 서울 강서구 소재 자택을 찾은 기자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미·북 정상회담 개최지 결정 과정에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언급한 것이다. 지난 4월 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개최 후보지로 “비무장지대(DMZ)의 평화의집, 자유의집에서 개최하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지만 보름 뒤 미·북 정상회담 개최지는 싱가포르로 낙점됐다.

“만약 판문점에서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북한이 이걸 대단한 승리로 치장했을 게 분명하다. 북한에서 인식하는 판문점은 1953년 미국 마크 클라크 대장이 보는 앞에서 정전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곳이다. 김정은은 이 장소로 미국 대통령을 불러들여 담판을 벌이고 싶었던 거다. 트럼프가 우리 정부 관계자를 만나고 나서 무턱대고 판문점 얘기를 꺼냈는데, 북한을 잘 알고 있는 볼턴이 방향을 틀었다.”

내가 세 차례 만난 볼턴이 키맨

김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24일 미·북 정상회담 전격 취소 발표를 한 배경에도 볼턴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볼턴은 북한 문제에 있어서 강경하다. 내가 만나본 볼턴은 북한의 실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미국인이다. 볼턴을 만났을 때 정치범수용소, 국군포로, 납치자 문제, 탈북자 인신매매까지 북한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범죄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북한 김정은 체제를 붕괴시켜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게 볼턴의 생각이다. 현재의 독재체제를 그냥 놔두면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김 대표는 “만약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신 볼턴이 처음부터 북한 문제를 다뤘다면 미·북 회담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볼턴은 자리에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제안해왔을 때 트럼프가 ‘오케이’한 것은 실수였다. 지난번 미·북 정상회담 취소 소동이 있었는데, 그때 트럼프도 발을 잘못 들여놓은 걸 알았을 거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말보다 볼턴이 예상한 대로 북한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것 같다. 회담을 재개한 이상 이제는 최대한 성과를 내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어쨌든 트럼프는 볼턴의 조언에 더욱 의지하게 될 것 같다.”

올해 4월 트럼프 대통령의 안보 참모로 백악관에 입성한 볼턴은 지난 5월 “북한 내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북한 내) 모든 핵무기를 처분하고 해체해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른바 ‘리비아식 해법’에 준하는 북핵 폐기를 언급한 것인데, 이를 전해들은 북한이 발끈하고 비난 성명을 발표해 미·북 정상회담이 한때 무산 위기에 놓였었다.

김 대표는 미국에서 볼턴을 3차례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볼턴이 유엔대사로 있던 시절 탈북자 인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뉴욕 유엔본부에서 두 차례 만났고 미국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수잔 솔티와 함께 사석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최근 이낙연 국무총리가 “‘미국 측이 비핵화 문제에 있어 한국이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고 발언했는데, 이런 관점을 고수해온 인물이 바로 볼턴이라는 게 김 대표의 주장이다.

김 대표는 지난해 3월 뇌종양과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뇌종양 제거 수술 이후 꾸준하게 식이요법을 해온 덕분에 건강 상태는 예전과 비슷한 수준까지 회복됐다. 김 대표는 오는 7월부터 대북방송 등 기존에 해오던 사업을 재개할 계획이다.

-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보나.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핵을 포기하면 김정은은 위태로워진다. 내부에서 체제가 전복될지도 모른다. 이번 미·북 정상회담에서 핵무기 몇 개쯤은 내어줄 수 있다. 그러나 수천 개의 땅굴이 있는 북한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핵무기를 숨길 수 있다. 게다가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시키면서 증거를 모두 없애버렸다. 북한의 핵 기술력이 어느 수준인지, 핵무기는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를 파악하려면 핵실험장에 들어가 직접 관찰해야 하는데 이걸 덮어버렸다.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미국 백악관은 꽤 화가 났을 거다. 한때 북한 핵실험을 파악하려고 각국 정보기관들이 풍계리 일대 한 줌 흙의 가치를 2000만원까지 내건 적이 있다.”

- 북한이 미·북 정상회담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뭔가. “김정은과 트럼프가 협상을 하는 단 한 장의 사진이다. 체제보장이나 비핵화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경제지원 문제도 순차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김정은이 트럼프와 담판을 짓는 모습은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핵보유국이면서 정상국가로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김정은을 북한 주민들이 더 따르게 된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하지 못했던 미국과의 담판은 그 자체로서 북한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독재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북한이 자세를 낮춰가며 그 무서운 그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김정은은 김정일과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만약 김정일이었다면 지난번 트럼프가 회담 취소를 통보했을 때 비판을 쏟아내고 만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김정은은 목적 달성을 위해 몸을 낮추고 죽는 척도 할 태세다. 중국까지 경제제재에 동참한 위기 상황에서 김정은이 트럼프와의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대내외에 보여주고 말겠다는 속내가 보인다. 그건 일종의 자신감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려면 공격적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늘 주장했다. 혁명의 역사에서는 이게 먹힌다.”

- 강력한 경제제재 때문에 북한이 백기투항하듯 회담에 나왔다는 분석도 있는데. “그건 한국식 사고방식이다. 북한이 제재로 코너에 몰린 건 맞다. 미국이 정밀타격 언급하며 공격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재가 아무리 강해도 북한 사람들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광복 이후 외부 지원 없이 자력갱생하며 살아온 사회다. 지금처럼 장마당에 개입하지 않고 놔두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은 만족해한다. 과거 김정일 시절 시장을 통제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 장마당에 나오는 물건은 어떻게 조달하나. “예를 들면 신발은 신발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조금씩 재료를 훔쳐와 가정에서 만든다. 결핵에 쓰는 고가 약이나 고급 의류, 휘발유는 중국에서 들어오지만 나머지는 모두 북한 내부에서 조달하고 있다. 1995년 내가 황해제철소에 가서 철근을 만들어올 때도 3t 물량을 넣어 용광로를 가동했는데 나온 건 2t뿐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철근을 빼돌려 장마당에 가져가 물물교환을 한다. 도둑질하다 걸리면 총살을 당하는데도 도둑질은 더 교묘해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는 허가받은 장마당만 400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이른바 ‘메뚜기 장마당’이나 역전 주변에 자연스럽게 조성된 장마당 등을 합치면 현재 북한 내 크고 작은 장마당은 수천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자본주의에 물들면 북한 내부의 사상체계가 흔들릴 것이라는 전망에 동의하나. “동의하지 않는다. 장마당이 활성화되는 것과 사상은 별개의 문제다. 장마당이 주민들 먹여살리는 건 맞지만 사상은 흔들림이 없다는 게 북한 사람들 얘기다. 적어도 그런 척을 하고 산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북한 내부에서 정보를 빼내 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에게 체제를 흔들 만한 일을 해보자고 제안하면 그 직후 연락이 끊긴다. 우리 생각과 달리 북한 사람들은 체제에 순응하고 산다.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한국 드라마를 본다지만 그것도 현실과 달리 세트장에서 찍어내는 걸로 인식한다. 중국에 나와 봐야 그때서야 한국이 엄청 잘사는 나라가 됐다는 것을 접하게 된다.”

- 종전합의와 평화협정이 이어진다면 북한이 미군 철수를 요구할까. “당연한 수순이다.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난다면 그 얘기를 꺼낼 것 같다. 한반도 비핵화 이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서 미군을 빼라고 요구할 것이다. 북한이 한·미 합동훈련에 거부감을 보이고 미국의 전략자산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걸 비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북한식 논리로는 정전협정 상대가 한국이 아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16개 연합국이다. 평화협정으로 가면 미군이 한반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게 북한 사람들 생각이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미군이 빠지고 나면 북한은 자기들 방식으로 통일을 밀어붙일 거다. 탈북자처럼 북한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이런 얘기를 일상으로 듣던 사람들은 지금 북한의 움직임에서 그런 기류를 읽을 수 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미군이 계속 주둔하겠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되면 북한은 미국 내 여론을 흔들어 ‘한반도 미군 철수론’이 나오게 공작할 거다. 베트남전쟁 때도 미국 내 전쟁 반대 여론으로 결국 철수하게 됐다. 북한은 이미 김일성 시절에 그런 전략들을 다 마련해놓았다. 김정은이 만나자고 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비공개리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넘어가는 요즘이다. 이대로 가면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김정은 측근인 김영철이 최근 미국을 방문했는데. “미·북 회담 성사를 위해 미국에 직접 갔다.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외무성에서 해야 할 일인데 이번에는 통일전선부 김영철이 직접 나섰다. 이것은 북한이 조국 통일의 큰 그림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 정부가 너무 순진하게 북한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

-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크게 줄어든 것 같다. “김정은에 대한 호감도가 70%를 넘는다는 보도를 봤다. 정말 큰일이다. 우리가 다 속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과거 북한에 가서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만나본 사람들은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며 전도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동당 서기실은 설사 바보가 온다 해도 그를 최고의 지도자로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런 조직이 있어서 북한 지도자가 대단한 존재로 포장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의 행동은 모두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다. 정치범수용소와 같은 반인륜적 시스템을 지키고 있는 게 김정은 체제의 본질이다.”

김 대표는 북한 노동당 조직부와 서기실이 김정은 조직을 받치고 있는 핵심 부서라고 했다. “조직부는 중앙당과 군에 다 있다. 여기서 중간 간부 이상의 신상 자료를 3개월에 한 번씩 작성해 모아둔다. 소소한 가정사까지 해당 인사와 관련한 모든 게 적혀 있다. 처형당한 장성택에 관한 정보도 조직부 자료를 토대로 한 것으로 안다.”

- 김정은이 남한을 속이고 있다는 근거는 뭔가. “한국식 사고가 아니라 북한식으로 보면 지금 북한의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내가 북한에서 교육받았던 방식대로 북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북한이 추구하는 미군 철수나 북한 주도의 통일로 갈 것 같아 두렵다. 북한의 숨은 의도를 캐내기 위한 첩보활동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북한의 체제보장 요구는 독재를 용인하라는 것인데도 이걸 한국 정부가 먼저 거론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지금 김정은은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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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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