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photo 뉴시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photo 뉴시스

지난 6월 14일(현지시각) 프랑스 상원은 정부가 제출한 국철(國鐵) 개혁안을 찬성 245표, 반대 82표로 처리했다.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킨 것이다. 올해 초 이 개혁안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들고나왔을 때만 해도 프랑스인들은 의회 통과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다. 프랑스 사회에서 건드릴 수 없는 철옹성으로 여겨지는 국영철도공사(SNCF) 노조원들의 신분보장과 복지혜택을 대폭 줄이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SNCF 직원은 민간기업 은퇴자보다 10%쯤 많은 연금 혜택을 누린다. 직원 가족용으로 지급하는 무료 또는 할인 열차표만 연간 2500만유로(약 324억원)에 달한다. 적자가 60조원에 달하는 국영기업 직원들이 파격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어떤 정부도 SNCF에 메스를 가하지 못했다. 15만명의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가 여객·화물의 이동을 묶어버리면 역대 정부는 꼬리를 내리곤 했다. 이번에도 SNCF 노조가 마크롱의 개혁안에 반대하며 4월부터 일주일에 이틀씩 파업을 하기 시작해 긴장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마크롱은 물러서지 않고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파업에 부정적인 응답이 여론조사마다 60% 안팎에 달할 정도로 국민들도 과거처럼 철도 노조에 온정적이지 않았다. 결국 의회가 압도적으로 개혁안을 통과시키자 노동계가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프랑스 최대 노동단체인 민주노동연맹(CFDT)은 개혁안을 수용하고 파업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두 번째로 큰 단체인 노동총연맹(CGT)은 7월 이후에도 파업을 이어간다는 계획이지만 동력은 급격히 떨어진 상태다.

지난해 5월 취임한 마크롱 대통령이 하나둘 ‘프랑스병(病)’을 치유하기 위한 개혁 과제를 완수해가고 있다. 올해 철도개혁을 관철시키기에 앞서 취임 첫해인 지난해 전광석화처럼 노동개혁을 이뤄냈다. 두 개의 거대한 산을 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크롱이 이뤄놓은 노동개혁은 다른 나라보다 과도하다는 평가를 듣는 근로자 신분보장 수위를 낮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번 채용하면 해고가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것을 의식해 고용주가 일자리 늘리기를 주저하는 현상을 타개해야 투자와 고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게 마크롱의 생각이다. 그는 2차대전 직후 현대적인 노동법이 정립된 이후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해고에 대한 배상금 상한선을 만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배상금이 20개월치 월급을 넘지 못하도록 못 박았다. 산별(産別) 노조의 권한도 축소시켜 노동계의 힘을 떨어뜨렸다. 투자 여력을 늘리기 위해 중소기업과 외국 기업의 구조조정 요건을 대폭 완화해줬다.

반대 세력 누르는 치밀한 작전

마크롱은 만 40세에 집권했다. 일각에서 ‘애송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의회 경험이 전무하고 경제부 장관 외에 이렇다 할 행정부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대 정부가 이뤄내지 못한 굵직한 개혁이 가시화되면서 이제 그를 얕잡아보는 시선은 싹 사라졌다. 프랑스 실업률은 2013년부터 내리 4년간 10%대였다. 하지만 마크롱 집권 첫해인 지난해 9.4%로 뚝 떨어지더니 올해는 8% 안팎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3%로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노동개혁과 철도개혁이란 두 개의 큰 산을 넘을 때 마크롱은 철저히 전략적이었다. 무작정 힘으로 누르지 않았다. 여론의 지지를 받기 위한 명분 쌓기를 치밀하게 진행해나갔다. 또 시간을 끌지 않고 빠른 승부를 걸었다.

그가 노동개혁을 추진할 때 지략을 전개한 과정을 보자. 마크롱은 지난해 5월 취임 9일째 되는 날 민주노동동맹(CFDT)·노동총동맹(CGT)·노동자의힘(FO) 대표를 각각 따로 대통령궁으로 불러 개별 면담을 했다. 노동단체 수장들은 다른 단체 대표가 마크롱과 어떤 사안에 협조하고, 어떤 사안에 반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 수적으로 1 대 3 열세에 놓이는 상황도 피했다. 초반에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대화에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와 장관들은 노동계 대표들과 4개월간 300시간에 걸쳐 100번이나 미팅을 가졌다. 이처럼 충분히 정부 입장을 설명한 다음에는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의회를 통과하지 않고도 법적 효력이 생기는 ‘긴급 법률명령’으로 노동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대통령 권한인 긴급명령권을 동원해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밀어붙이는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했다.

하루 4시간 자면서 프랑스 개조

올해 철도개혁을 이뤄낼 때도 마크롱은 주도면밀한 작전을 구사했다. 철도 노조원의 특혜를 없애겠다는 방안에 파업으로 노조가 맞서자 마크롱은 “현재 직원들의 복리후생은 안 건드리고 미래에 뽑게 될 신입사원부터 혜택을 줄이겠다”고 천명했다. 또한 개혁안을 노조가 받아들이면 거대한 SNCF 빚을 나랏돈을 들여 상당 부분 갚아주겠다고 했다. 순간 노조의 파업 명분이 약해졌다. 정부가 양보하는데도 철도 노조가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고 무리수를 둔다는 측면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철도 노조원 중 파업 참가자 비율은 4월 초 34%였지만 6월에는 12%까지 떨어지며 동력을 잃었다.

노동계와 좌파 진영에서는 프랑스 사회를 헤집어놓는 마크롱에 대한 반발 수위가 거세다. 사회주의 전통이 큰 축을 차지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미국식 시장주의를 도입하려는 마크롱이 거슬린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마크롱이 조급하게 과격한 개혁을 추진해서 ‘개혁 피로감’을 준다며 반발하는 기류가 적지 않다. 노동개혁, 철도개혁 외에도 마크롱은 프랑스의 평등주의 대입 전형을 허물고 대학에 학생 선발권을 주는 방향으로 교육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복잡한 연금제도를 단순화하는 작업도 진행하는 등 프랑스 정부에는 갖가지 개혁 과제가 쌓여 있다. 게다가 마크롱이 거만하고 비타협적이라는 비판도 늘 따라다니고 있다. 기자가 취재 도중 만난 한 중소기업 경영자는 “마크롱의 개혁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그가 나폴레옹처럼 군림하려는 듯한 태도는 달갑지 않다”고 했다. 지나치게 부자·기업 편을 들고 있다는 공격도 연일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롱이 갖가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원천은 이제는 프랑스가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독일·영국에 비해 오랜 기간 성장이 정체됐던 프랑스가 이제는 도약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하는 식자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싱크탱크인 로베르쉬망재단의 장-도미니크 줄리아니 이사회 의장은 기자와 만났을 때 “변화에 대한 갈증이 있는 시기에 투자은행에서 경력을 쌓아 시장경제를 잘 이해하는 마크롱이 대통령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노동계와 좌파 진영이 마크롱에게 날을 세우고 있지만 그의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보기 어렵다. 일간지 르피가로는 여론조사기관 IFOP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역대 대통령의 취임 1년 후 지지율을 비교했다. 마크롱의 취임 1년 후 지지율은 44%로, 1990년대 이후 취임한 4명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최고치였다. 자크 시라크(37%), 니콜라 사르코지(36%), 프랑수아 올랑드(25%)의 취임 1년 후 지지율보다 높게 나타났다.

마크롱은 하루 4시간만 자고 일에 매진하는 워커홀릭이다. 정적(政敵)들까지도 그가 프랑스를 일으켜세우려는 데 열의가 넘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각종 개혁안을 각 부처가 하루빨리 의회로 넘기라고 독촉한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실에서 지금까지 4명의 보좌관과 14명의 정책비서가 격무를 못 이기고 사표를 냈다. 정부가 제출한 법안이 하도 많아 5월에 프랑스 하원은 휴일 없이 17일 연속 법안 심사를 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내각제 英·獨보다 정치적으로 안정

마크롱이 프랑스를 창업국가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도 새로운 변화다.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연말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이 1만개를 넘어섰다. 마크롱은 정부 소유 공기업 지분을 팔아 벤처기업을 지원할 100억유로(약 13조원) 규모의 혁신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비대한 공공부문을 축소하면서 동시에 혁신산업을 키우는 ‘일석이조’를 노리는 것이다. 마크롱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를 비롯해 IBM의 버지니아 로메티, 인텔의 브라이언 크라니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사티야 나델라 등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를 직접 만나 투자를 요청했다. 예전 프랑스 대통령들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마크롱은 복이 많은 대통령이기도 하다. 유럽의 다른 경쟁국가들이 의회가 불안정해 심각한 정치 혼란을 겪고 있지만 프랑스는 안정된 통치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빅5’ 국가 중 유일하게 프랑스만 여당이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고 있다. 마크롱이 이끄는 여당 ‘전진하는 공화국(LREM)’은 하원 577석 중 312석을 확보하고 있다. 마크롱이 국정 개혁 과제를 제시하면 필리프 총리가 실무를 총괄하는 역할 분담이 매끄럽게 이뤄지고 있다.

반면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머지 ‘빅5’인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은 여당이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연정(聯政)을 꾸리거나 과반수에 못 미치는 소수정부를 운영하고 있어 힘이 떨어진다.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에 대한 내부 충돌을 수습하느라 바쁘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난민 문제를 둘러싸고 연정이 붕괴될 위험에 노출돼 있는 등 내치(內治)에 애로를 겪고 있다. 그렇다 보니 마크롱이 유럽의 정치지도자 중에는 미국과의 무역전쟁, 이란 핵 협정 같은 국제사회의 큰 화두를 놓고 가장 선명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EU 공동예산제와 EU 재무장관 도입과 같은 EU 개혁안도 제시하며 대외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키우고 있다.

마크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브로맨스(남자들 간의 우정)’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끈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통상 문제 등에 있어서 트럼프에게 할 말은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도 호평이 많다. 프랑스 언론은 마크롱이 국민들이 느끼는 개혁에 대한 피로감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느냐가 남은 임기 4년 동안 가장 큰 과제라고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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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석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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