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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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재계 서열 1위였던 현대그룹은 현재 외형 2조7000억원의 중견기업으로 전락했다. 고 정몽헌 회장이 부친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았던 현대상선(2016년 매각), 현대증권(2016), 현대로지스틱스(2014) 등이 지금은 모두 남의 손 아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분류한 대기업에서도 빠진 지 오래다. 현재 현대그룹의 지주사이자 주력계열사는 현대상선에서 현대엘리베이터로 바뀌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과거 재계 1위 현대그룹으로 입사해 지난날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40대 중후반의 직원들은 종종 상실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룹이 쪼그라들면서까지 지킨 것은 결국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이다. 현 회장은 2003년 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범현대가 기업들과 계속해서 경영권 분쟁을 벌여왔다. 주력계열사를 내주면서 반대급부로 경영권을 지켰지만, 15년간 직원들의 상실감은 커져갔다. 아직까지 현 회장의 배임 논란이 나오는 것도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얻은 것이 결국 현 회장 개인의 이익 때문이란 시각이 존재해서다. 현 회장은 현재 현대상선으로부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를 당한 상황이다. 현대상선은 2014년 현대로지스틱스 발행 주식과 신주인수권 등을 공동매각하는 과정에서 현 회장 등이 현대상선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구조를 설계하고 실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정은이 끝까지 지키려고 한 것

이런저런 비난 가운데 현 회장이 끝까지 지키고 싶어했던 것은 경영권뿐만은 아니다. 현대그룹이 현대가의 적통성을 이어받은 기업이란 점도 대내외에서 인정받고 싶어했다는 것이 그룹 안팎의 일반적 시각이다. 2003년 이후 현 회장의 행보는 이런 시각에서 해석하면 대체적으로 일관성이 있다. 현 회장은 2004년 KCC, 2014년 현대중공업 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고, 2009년에는 현대건설을 놓고 현대그룹과 인수전을 벌였다. 현대건설은 고 정주영 회장이 현대 계열사 중 1950년 가장 먼저 설립한 주식회사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결국 현대차그룹에 넘겼고, 2014년에는 현대중공업그룹과 현대상선을 놓고 경영권 분쟁을 벌이다 결국 매각했다.

현 회장이 그룹 외형을 유지시켜줄 회사를 모두 팔면서도 놓지 않았던 것은 또 있다. 바로 대북사업이다. 정주영 회장의 호를 딴 현대아산이 여전히 현대그룹 계열사로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아산은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면 진즉 문을 닫았어야 하는 기업이다. 건설과 남한 내 관광사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란 이름을 붙이기에는 초라한 수준이다. 현대아산은 설립된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총 1조5000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아산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2008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부터다. 게다가 현대그룹이 사업권을 가졌던 개성공단 역시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의 전면 가동중단 조치로 폐쇄됐다. 하지만 현 회장은 2008년 이후 지금까지 ‘불확실한 미래’란 이름의 ‘밑 빠진 독’에 계속 돈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현대그룹 내에서는 대북사업이 멈춰선 기간 10년을 일컬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영업정지 10년’. 멈췄지만 언젠가는 재개될 것이란 믿음 때문에 ‘철수’란 표현 대신 ‘영업정지’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던 대북사업의 영업정지 기간이 드디어 종료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현 회장의 8월 3일 방북이 그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현대그룹과 통일부는 이번 방북이 고 정몽헌 회장의 추도식 때문이라며 선을 긋고 있지만, 재계에서는 남북경협 재개의 ‘시그널’로 보는 시선이 많다. 현대그룹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방북 당일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재단에서 아태평화위원회 관계자들과 만나 금강산과 원산을 관광한 뒤 경협 관련 논의를 할 것”이며 “여기에는 발전소 건설이나 통신망 구축 등 비교적 구체적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장 시장이 방북 소식에 반응하고 있다. 7월 19일 현 회장의 방북소식이 ‘인포스탁데일리’라는 증권 전문 매체의 단독보도로 처음 알려지자 이날 현대건설을 비롯한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로템 등 남북경협주의 주가가 크게 상승했다. 통일부가 방북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8월 1일에도 같은 종목이 또 한 번 상승했다.

남북경협 시그널?

북한 측도 남북경협 재개를 부추기는 분위기다. 북한 관영매체인 노동신문은 7월 31일 ‘무엇이 북남관계의 새로운 여정을 가로막고 있는가’라는 논평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도 마찬가지다. 금강산은 민족의 자랑이고 겨레의 긍지로서 다른 그 누구보다 우리 겨레가 마음껏 경치를 향유하고 기쁨을 누려야 한다”라고 했다.

현 회장의 방북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기업들의 대북 사업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히 높아져 있다. SK텔레콤과 KT가 북한 통신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경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 북한의 이동통신 사용자는 최소 300만에서 최대 500만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이집트 이동통신사 오라스콤이 북한 회사와 함께 고려링크를 설립해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됐다. 하지만 지난해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 이후 오라스콤은 철수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라스콤이 철수하면 북한의 제2이통사 ‘강성네트’와, 제3이통사 ‘별’이 오라스콤을 대체할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이들 회사는 3G 통신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SK텔레콤과 KT 등은 오라스콤이 차지했던 이동통신시장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위해 KT는 4·27 남북 정상회담 일주일 후 남북협력사업개발TF를 만들었고, SKT는 자사 및 계열사의 대관조직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과포화 시장인 이동통신사가 어디에서 한 번에 수백만 명의 가입자를 만들 수 있겠냐”며 “이통사같이 내수시장 위주의 회사에서는 북한은 분명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 회장의 방북은 우리 기업들의 기대감을 더욱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소식이다.

문제는 국내 기업들이 대북 경협사업에 아무리 관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기는 어렵다는 데 있다. 일단 국내 기업들이 북한 쪽 네트워크가 갖춰져 있지 않은 데다, 북한은 이미 지난 2000년 3월 현대그룹 쪽에 7대 사회간접자본(SOC) 사업권을 넘겨줬다. 전력, 통신, 철도, 통천비행장, 임진강댐, 금강산 수자원, 백두산·묘향산·칠보산 등 명승지 관광사업권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분야에 진출하고자 하는 민간기업과 공기업들은 현대그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현대그룹 쪽에 손을 내미는 기업들이 부쩍 늘어났다.

현대그룹 직원들부터가 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대북사업이란 특성 때문에 해당 기업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국내외 기업들, 특히 공기업 쪽에서 현대아산이나 그룹 쪽으로 문의가 많이 오는 것이 사실이다”라며 “대북사업 경험이 전무한 기업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우리와 대북사업 관련 양해각서라도 맺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한 10대 기업은 어떻게든 대북사업을 통해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 현대그룹 쪽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 회장에게 개인적으로 접촉하려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현대그룹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현 회장이 참석하는 조찬모임에 국내 기업 관계자들이 와서 현 회장에게 인사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난 10년간의 상황을 비추어보면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 회장이 대기업 회장이긴 하지만 사별한 남편의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재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북한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상 현대가 아닌 다른 기업들에 독자사업권을 내줄 리가 만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 회장의 위상은 앞으로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외부의 변화가 곧 경협이 본격화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협이 실제적으로 이뤄지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일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우선적으로 풀려야 하지만 이것이 언제 해제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 정부도 독자적으로 이를 풀 위치에 있지 않다. 현대그룹 관계자의 말이다.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하려면 행사장을 개보수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먼저 인력과 장비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기름도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인도적 차원의 행사에 필요한 유류를 가져가는 것도 대북제재로 인해 통일부에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외부에서 먼저 언론 보도가 앞서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시각이 현대그룹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현대그룹 한 관계자는 “실제로 경협이 재개되기 위해서는 대북제재 해제가 우선적으로 되어야 하는데 언제 이것이 될 지 알 수 없다”며 “마치 우리가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도 (우리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오히려 우리는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들떠 있지 않다”며 “대북사업은 변수가 많기 때문에 몇 년이 걸려 재개될지 알 수 없고 정치적 변수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대북제재가 길어지면서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진 북한이 먼저 경협 재개를 이야기하는 것도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변수가 될 수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앞서 언급한 논평을 통해 “자기 민족의 명산을 부감(높은 곳에서 경치를 내려다보는 것)하는 데 외세의 제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다분히 국제사회의 제재를 염두에 둔 말이다. 북한이 이런 논평을 낼수록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의 순수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마지막 방북이었던 2014년 12월 24일 도라산CIQ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입경한 현 회장이 방북 성과를 발표하고 있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마지막 방북이었던 2014년 12월 24일 도라산CIQ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입경한 현 회장이 방북 성과를 발표하고 있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남북경협사업 TFT’ 구성

여러 변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대그룹의 분위기가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15년간 볼 수 없었던 기업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 회장이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을 지키기 위해, 현대건설을 인수하기 위해 무리하게 유동성을 확보하려 했던 리스크가 사라진 것도 지금의 현대그룹에는 전화위복이 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현재 현대엘리베이터가 매년 수천억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내고 있고, 현대상선과 증권 매각을 통한 유동성이 남아 있는 만큼 그룹 투자 여력도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일단 주변 상황과 관계없이 차분하게 대북사업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현대그룹은 지난 6월 8일 ‘남북경협사업 TFT’를 구성하고 현 회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이영하 현대아산 대표와 이백훈 그룹전략기획본부장이 실무를 지휘하는 것을 알려졌다. TFT는 매주 1회 정기회의를 열고 사안 발생 시 수시 회의를 소집하는 등 탄력적으로 운영 중이다. 우선적으로 금강산·개성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등 기존 사업의 분야별 준비사항과 예상 이슈를 점검할 계획이다. 특히 7대 SOC 사업권을 토대로 앞으로 전개할 다양한 남북경협사업을 검토하고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는 최고의사 결정기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현 회장의 방북과 관련해 주목할 포인트는 그가 북한으로부터 들고 올 메시지다. 현 회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사실 현 회장이 과거 몇 차례 방북했을 때 우리 정부 쪽에 전달하는 메시지를 들고 내려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개설된 상황에서 이번에도 그 역할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북측 인사 중 누가 금강산으로 와서 현 회장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현 회장이 방북 후 돌아올 때면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현 회장의 일정과 북이 전달한 메시지들을 상세히 체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1일 만난 현대그룹 측 인사는 “북에서 누가 나올지 우리로서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 회장은 지난해 1월 매각했던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의 현대그룹 사옥을 7월 재매입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금 대북사업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현 회장이 과연 15년 만의 기회를 살릴 수 있을지 재계 안팎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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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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