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기 전 생각에 잠겨 있는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photo 뉴시스
지난 8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기 전 생각에 잠겨 있는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photo 뉴시스

자유한국당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한 뒤, 여야 간에 가치 논쟁에 불이 붙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실장을 지냈던 김 위원장은 당시 같이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국가주의적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고, 여권에서는 그런 김 위원장에 대해 “섣부른 선동”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보수 정당에서 ‘노무현 정신’을 구현하겠다고도 했고, 이에 대해서도 여권은 “노무현 정신을 팔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7월 3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권양숙 여사를 예방했다. 한국당 지도부가 봉하마을을 찾은 것은 2015년 2월 이후 3년6개월여 만이다.

지난 7월 3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김병준 위원장(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photo 뉴시스
지난 7월 3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김병준 위원장(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photo 뉴시스

김 위원장은 방명록에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나라’라고 적었다. 지난 7월 25일 서울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이승만·박정희·김영삼·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을 때와 같은 문장이다. 김 위원장은 권 여사와 20여분간 면담을 했다. 김 위원장은 “정치적인 얘기는 없었고, 열심히 잘해달라고 하셨다”며 “중국 다녀오신 얘기, 손자 키우는 얘기를 주로 하시더라”고 했다.

이곳에서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를 ‘국가주의’라고 다시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취임 직후 가진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비슷한 입장을 반복했었다. 김 위원장은 “국가주의는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고 오랜 문화도 있는데, 권력을 쥐고 나면 권력으로 무엇인가 해보고 싶은 관성도 생긴다”며 “견제 세력이 약할 땐 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어 “이제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 때가 됐다”며 “우리 국민들의 잠재적 역량이나 성장한 시장 규모, 국민의 공동체 정신을 봤을 때 이제 탈국가주의 시대를 열 때가 됐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는 ‘먹방(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송)’ 규제 시도를 예로 들며 자신의 반국가주의론을 역설했다. “국민이 어리석은 백성도 아닌데 현 정부가 ‘먹방’을 규제하겠다는 것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라며 “조선시대도 아니고 왜 국가가 일일이 먹는 데까지 간섭하고 시장에 개입하느냐”고 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7월 18일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국가가 시민사회와 시장에 지나치게 개입해선 안 된다”며 “연방제에 가까운 분권화를 이야기하는 이 정부에서도 국가주의적 방향이 곳곳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현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제, 재정 확대 정책 등을 강행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됐다. 김 위원장은 이날은 초·중·고교에서 고카페인 음료 판매를 금지하는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특별법’ 개정안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 정부 같았으면, 제가 정책실장으로 있었으면 누가 발의했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을 문제”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를 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학교 사정에 맞게 하는 게 맞는데 그런 것까지 국가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 우리 사회를 보면 국가주의적 경향이 곳곳에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사인해 법이 공포됐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대신 ‘자율’을 강조했다. “국가가 주도해서 이끄는 게 아니라 여러 주체가 자율적으로 국가를 만들어가고 혁신해가는 질서를 꿈꾸고 있다”며 “시대정신과 역사가 자율 사회를 향해 흐르고 스스로 자유와 책임의 논리를 갖고 공동체를 이해하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천박한 철학적 빈곤” 여권의 반발

김 위원장이 취임과 함께 문재인 정부를 ‘국가주의’라고 비판하고, 자신이 ‘노무현 정신’을 구현하겠다고 하자, 여권에서 먼저 반발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김 위원장이 앞에선 ‘노무현 정신’을 팔고, 뒤로는 군정 향수와 결별하지 않는다면 그 혁신은 하나마나한 혁신일 것”이라고 했다. 친문 성향의 전재수 의원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배려해준 사람(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 오히려 그 반대 진영에 몸을 담는다는 것은 정치를 떠나서 사람 사는 세상의 인간의 도리가 아니지 않냐”고 했다. 박용진 의원은 “김 위원장의 국가주의 비판은 천박한 철학적 빈곤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의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전후해서는 자유한국당 내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노무현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당 정체성에 맞느냐”는 것이다. 한 지도부 의원은 “우리 당이 고발한 내용도 있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했고, 한 재선 의원은 “위원장이 당을 좌경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국당 소속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지난 7월 27일 페이스북에 “비대위는 노무현 정신을 살리거나, 햇볕정책에 동조하기 위한 ‘김대중, 노무현 2중대 역할’을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바란다”고 썼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며 “결국 우리 사회가 통합을 향해 가야 하고, 힘을 모아 국가를 새롭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국민 모두가 정말 다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여권의 비판에 대해서도 “그건 노무현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다”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계셨다면 나를 칭찬하셨을 것이다. ‘어떻게든 제1야당을 살려서 정책 경쟁을 활발히 하고 우리나라를 서로 손잡고 잘사는 국가로 만들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선 “내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할 때 민정수석을 했는데, 권위적이지 않고 점잖았다”며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정책적 지향에 대한 교감을 갖고 있었다고 보진 않는다”고 했다.

보수는 어떻게 세울 건가?

자유한국당 내부에서는 김 위원장에 대해 일부 반발도 있지만, 3차례 선거 패배 이후 처음으로 담론을 중심으로 여권과 논쟁을 벌이게 된 상황은 바람직하다는 반응이 많다. 한 초선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대선 패배 이후, 홍준표 대표가 거친 언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당 안팎의 토론이 없었는데 김 위원장 체제가 들어선 직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며 “아직 김 위원장의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초·재선 의원들과 적극적 소통을 통해 차츰 자리를 잡아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그런데 보수 정당은 어떻게 세워나간다는 구상인가?’라는 의문도 끊이질 않는다. 김 위원장이 국가 운영의 큰 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여권과 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당의 혁신을 위해선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몇 가지 화두를 던졌다. 김 위원장은 “보수 정당이 인권·평화·환경 등 보편적 가치를 선점하지 못하고 역사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며 “자유로운 시장을 통해 혁신 동력을 살리고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국가가 보살필 수 있도록 당의 기치를 세우겠다”고 했다. 그간 강조해왔던 자율적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기존 진보 진영이 앞세웠던 가치 점유를 위해서도 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 위원장은 “한국 보수는 추구하는 가치가 안 보인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언어가 그대로 남아 있다”며 “박 전 대통령이 많은 일을 하셨지만 조국 근대화, 안보 제일주의 같은 1960~1970년대 언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당 내 고질적 계파 갈등에 대해선 “어느 한쪽을 잘라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새로운 가치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뭉치도록 하겠다”고 했다.

국가ㆍ시장ㆍ공동체 모두 위기

김 위원장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경제다. 비대위 핵심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을 분석해보면 80% 이상이 경제에 관한 이야기”라며 “현 정부의 정책이 경제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에 향후 김 위원장의 대안 제시가 국민들의 관심을 끌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국가·시장·공동체라는 경제의 세 바퀴가 모두 위기에 빠졌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자주 드는 예는 북유럽의 선진국 스웨덴이다. “복지국가로 스웨덴을 많이 얘기하는데 우리나라보다 시장 자유도가 훨씬 높고, 한국이 금기시하는 영리 병원도 여기엔 많다”며 “국가가 세금을 많이 걷어도 관료나 정치 체제가 도둑질해 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전부 반대”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선 “진보정치 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가 성장 이론이 없다는 것인데, 소득주도성장론도 급하게 국제노동기구(ILO)의 임금주도성장론을 (문재인 정부가) 차입하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며 “우리는 선진국들과 고용구조가 다른데, 가장 큰 차이는 자영업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보수 정당 또한 마땅한 성장론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올해 말쯤에는 제1야당이자 보수를 상징하는 정당으로서 우리만의 성장론을 세상에 내놓겠다”며 “국민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성장론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안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발언을 하고 있다. 오히려 김성태 원내대표가 기무사 계엄 문건 논란 등에 관해 전면에 나서는 모양새다. 다만 김 위원장은 “현 정부처럼 안보가 대화만으로 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명확하다. 이와 관련 김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가 과거 정부에 비해 많은 국방비를 편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내년 초 전당대회까지는 당을 이끌겠다는 생각이다. 당의 체질 개선과 새로운 노선 제시를 추진하고 있지만 당장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 위원장은 “혁신비대위 산하 소위원회들이 치열하게 활동을 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들은 다음에 당에 새 가치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며 “당명부터 정강·정책, 공천방식까지 전방위적으로 손을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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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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