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위안 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정치위원 ⓒphoto 로이터
류위안 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정치위원 ⓒphoto 로이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 한 해 전인 2011년, 류위안(劉源·67) 당시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정치위원(상장·우리의 대장급)은 구쥔산(谷俊山) 총후근부 부부장(중장·차관급)의 부패 혐의를 조사 중이었다. 군용 토지 횡령과 토지 매각 리베이트 수수 등을 통해 거부를 쌓고, 이 중 상당액을 당시 군부 실세인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수뇌부에 상납한 혐의였다. 구쥔산은 베이징 도심에 수십 건의 토지와 수십 채의 대형 아파트를 소유하고, 고향인 허난성 푸양엔 베이징 자금성을 본뜬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중국군 총후근부는 중국군의 군수와 복리·후생 등을 총괄하는 곳이다. 군용 토지 관리도 이 부서 관할하에 있다. 구소련 군대에서 유래한 정치위원은 일정 규모 이상 부대의 당 위원회를 책임지는 자리로, 부대 지휘관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류사오치 전 주석 아들, 군 내 반부패 선봉

구쥔산 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부장 ⓒphoto 뉴시스
구쥔산 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부장 ⓒphoto 뉴시스

“누가 누구를 먼저 쓰러뜨리게 될지 모른다. 당신이 구쥔산을 고발한다면, 반대로 구쥔산이 너를 타도할지도 모른다.” 류위안은 지난 8월 18일 관영 신경보(新京報) 인터뷰에서 이 즈음 쉬차이허우 부주석으로부터 이런 경고를 들었다고 했다. 시진핑 시대 군부 부패척결 과정의 막전막후는 그동안 중화권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적이 있지만, 이 숙청 작업을 주도한 류위안이 직접 관영 매체 인터뷰를 통해 그 내막을 털어놓은 것은 처음이다. 구쥔산도 다른 사람을 통해 “나는 다음에 총참모부 제1 부총참모장(상장)으로 진급하면서 중앙군사위원이 된다. 당신이 내 길을 막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 길을 막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조사 중단을 압박했다고 류위안은 공개했다. 류위안이 ‘군 내 부패 호랑이(부패한 군 수뇌부)’ 조사를 본격화하자 이들이 직접 류위안을 위협하며 대응에 나섰다는 것이다.

류위안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일등공신이면서 마오쩌둥에 이어 2대 국가주석을 지낸 류사오치의 아들로 군 내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나 당 고위 인사의 자제로 구성된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시진핑 주석보다는 나이가 두 살 많지만 어린 시절부터 알고 친구처럼 지냈다. 그의 아버지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장칭 등 사인방의 모함을 받아 투옥돼 있다 병사했다. 한때 퍼스트레이디였던 어머니 왕광메이도 12년 투옥생활을 했고, 그 역시 산시(山西)성 농촌으로 쫓겨가 7년 동안 생활하다 1975년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날 신경보 인터뷰는 올해 류사오치 탄생 120주년을 맞아 그가 아버지의 군 경력에 대해 쓴 책을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인터뷰 말미에 신경보 기자가 군 부패척결 과정에 대해 묻자 그는 막힘없이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 류위안은 “지금은 군 내 부패 방지가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부패는 여전히 숨은 뒤에서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반부패 투쟁은 지구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 내용은 시진핑 주석이 지난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열린 중앙군사위 당건설회의에서 “반부패 투쟁을 흔들림 없이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시점에서 나와 류위안이 최근 정치적으로 흔들리는 시 주석에 대한 지원 사격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번 회의에서 “반부패 투쟁은 반드시 흔들림 없이 계속해나갈 것이며, ‘바람이 바뀌거나 방향이 전환되는 일(變風轉向)’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시 주석은 올해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를 전후해 당 내외에서 강경 일변도 통치와 리더십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시 주석의 이날 발언은 이런 비판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장쩌민계 군부 실세와 군 내 태자당 충돌

시 주석 집권 전후에 이뤄졌던 류위안 주도의 군부 숙청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중국 당국은 공산당의 체면과 군 사기 등을 고려해 자세한 내막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중화권 언론에서는 쉬차이허우·궈보슝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장쩌민 전 주석 계열의 군 실세들이 대놓고 부패 조사를 방해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쥔산 부패 사건이 처음 불거진 것은 2011년 연초 군 내 정기감사 때였다. 류위안은 내부 조사를 거쳐 구쥔산의 부패 혐의를 확인하고 총후근부 정치위원과 당 위원회 명의로 중앙군사위에 이 사건을 보고했다. 하지만 구쥔산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내 뒤를 봐주는 이가 있다”며 오히려 반발을 하고 나왔다. 류위안도 “내가 군복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이 탐관은 반드시 끌어내리겠다”고 맞섰다. 홍콩 시사잡지 쟁명(爭鳴)에 따르면 구쥔산은 이 시기 류위안을 무고하는 273건의 투서를 넣었다. 또 류위안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까지 고용해 류위안이 항상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류위안은 지난 3월 장쑤성 화이안에서 열린 저우언라이 탄신 120주년에 참석했을 때 “당시 사건을 처리하면서 생명의 위험에 직면했다. 후 주석과 시 주석을 비롯한 선배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홍콩 명경망이 보도했다.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이 장악하고 있던 당 중앙군사위는 류위안으로부터 구쥔산의 부패 혐의를 보고받고도 조사에 소극적이었다. 이 사건은 총정치부와 군사기율검사위에 넘겨졌는데, 두 부서가 관할권 등을 이유로 들면서 조사를 차일피일 미뤘다. 그 뒤에는 군부 실세인 두 부주석의 입김이 있었다는 게 홍콩 매체들의 분석이다.

류위안은 이날 신경보 인터뷰에서 “2011년 11월 당 중앙에 이 사건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중앙군사위가 조사를 머뭇거리자 당시 후진타오 주석과 시진핑 부주석에게 이 사안을 직접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해 12월 말에 열린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서는 류위안이 후 주석과 시 부주석을 앞에 두고 쉬차이허우와 궈보슝 부주석과 량광례 국방부장 등을 겨냥해 “이런 군 내의 엄중한 부패와 관련해 군을 이끌어오신 세 분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조카로 태자당 내에서 발언권이 큰 저우빙더(周秉德·81) 여사도 공개적으로 류위안의 군 내 반부패 운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군 내 태자당의 일원인 뤄위안(羅援·62) 소장도 힘을 보탰다.

시진핑은 중앙군사위 확대회의 이후 여러 차례 구쥔산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지만, 쉬차이허우·궈보슝 등은 이 지시에 불응하면서 버텼다. 이들은 장쩌민 전 주석의 군 내 대리인으로, 장 전 주석의 힘을 믿고 버틴 것이다. 구쥔산 사건에 대한 조사는 장 전 주석계 군부 실세와 시진핑을 지지하는 군 내 태자당 세력 간 정면 충돌 양상으로 번졌다.

구쥔산은 결국 이듬해인 2012년 1월 총후근부 부부장에서 물러나면서 정식으로 조사 대상이 됐다. 류위안 측 조사관들이 “구쥔산 조사에 동의하지 않으면, 쉬차이허우·궈보슝 부주석이 이번 사건에 연루된 증거를 후진타오 주석과 시진핑 부주석에게 직접 설명하겠다”고 압박하자, 두 부주석이 마지못해 조사 절차 개시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쥔산이 부패 혐의로 정식으로 기소된 것은 이로부터 2년여가 지난 2014년3월이었다. 시진핑이 2012년 18차 당대회를 통해 집권한 이후에도 두 부주석은 장쩌민 전 주석의 힘을 믿고 시 주석의 구쥔산 사건 철저 조사 지시를 10여차례나 뭉갰다고 한다.

쉬차이허우는 구쥔산이 기소될 즈음에 당 기율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2014년 6월 당적 박탈 처분을 받았다. 이후 사법 처리 절차가 진행 중이던 2015년 3월 방광암으로 사망했다. 궈보슝도 쉬차이허우 사망 직후인 2015년 4월 당 기율 위반 혐의로 체포됐고, 이듬해인 2016년 기소돼 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장양 등 잔존세력 제거가 더 컸다”

류위안은 쉬차이허우 숙청보다 더 컸던 일로 장양(張陽)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제거를 들었다. 그는 작년 8월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중국 당국의 조사를 받다가 3개월 뒤인 1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쉬차이허우의 엄호 속에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매관매직으로 유명해 ‘장마대’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승진을 원하면 돈을 마대자루에 담아가야 했다고 한다. 류위안은 신경보 인터뷰에서 “장양의 문제는 쉬차이허우, 궈보슝보다 더 엄중했고 수뢰액수도 더 많았다”면서 “총정치부 주임으로서 모든 문제를 다 갖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했다. 또 “장양은 (시진핑 주석이 집권한) 18차 당대회 이후 쉬차이허우, 궈보슝의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전군교육개혁영도소조 조장까지 맡았다”며 “장양에 대한 조치는 엄청나게 크고 좋은 일”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쉬차이허우 세력이면서도 정체를 숨기고 있던 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시 주석의 군 개혁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구금돼 조사를 받은 팡펑후이 전 중앙군사위 연합참모부 참모장도 대표적인 잔존세력으로 거론했다. 그는 궈보슝 부주석의 산시(陝西)성 인맥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류위안은 “쉬차이허우가 군 정치 공작을 총괄한 20년간 인재 선발과 용인(用人) 등에서 저지른 잘못과 그것이 당과 군에 미친 손실은 전면적이고 치명적이었다”고 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중국인민해방군

군 내 반발로 군사위 진입은 실패

중국 내에서는 류위안을 ‘군 내 왕치산’이라고 부른다. 왕치산 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등 거물들을 부패 혐의로 쳐냈듯이 쉬차이허우·궈보슝 등 후진타오 집권기 10년 동안 장쩌민 전 주석을 대리해 중국 군을 호령해온 부패 호랑이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런 공로를 감안할 때 시 주석이 그를 군사위 부주석이나 군기율검사위 서기(군사위원)로 영전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류위안은 2015년 말에 있었던 군사위원 충원 과정에서 75% 득표에 실패하자 은퇴를 택했다. 군사위 제1부주석인 판창룽이 “류위안은 군 내 고위층과 장기간 긴장관계였다”는 점을 들어 반대표를 던진 것이 컸다고 한다. 시 주석도 류사오치 전 주석의 아들로 발언에 거리낌이 없고, 반부패 과정에서 군 내에 적잖은 적을 만든 그를 더 이상 중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위안은 이런 결과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퇴역 후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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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식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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