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내내 워싱턴을 뒤덮은 화제는 ‘워터게이트 스캔들’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가 쓴 책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였다.

우드워드가 취재한 내용이 모두 맞다면, 지난 2년 동안 트럼프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면 한국은 지금의 한국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트럼프는 한국을 싫어했다고 한다. 북한, 이라크, 시리아보다 더 한국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잘살면서도 국방은 미국에 맡기고 무역으로 미국 돈이나 뜯어내는 나라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참모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파기될 뻔했고, 무역 관계도 망가질 뻔했다. 무엇보다 전쟁 같은 위기가 올 수도 있었다. 트럼프는 트위터에 주한미군 가족이 철수한다는 내용을 날릴 뻔했다. 만일 그랬다면 북한은 이를 공격신호로 받아들일 뻔했고 그랬다면 어떤 위기가 왔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온갖 논리를 갖다대 트럼프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뜯어말렸다고 한다.

‘백악관의 트럼프’는 한국에 가장 큰 ‘공포’였던 셈이다. ‘미국 우선주의’ 앞에 한국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었던 것이다. 지나간 일은 어찌 막았다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만일 트럼프 외교정책의 실체가 이런 것이라면 한국이 가까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트럼프의 백악관에서 한국의 운명이 어떤 위기의 파고를 넘었는지 알려준 우드워드는 마치 워싱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언론인이다. 닉슨 전 대통령을 하야로 몰고 간 ‘워터게이트 스캔들’ 취재에 나섰던 1972년, 그는 막 기자생활을 시작한 초년병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엄청난 특종으로 젊은 날 거물이 된 우드워드는 이후 워싱턴포스트에서 계속 묵직한 책들을 쏟아냈다. 권력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능력으로 치면 경쟁자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발매 첫날 75만부가 팔렸다는 ‘공포’는 첫장부터 생생하다. 트럼프와 그 참모들이 백악관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결정을 하는지를 옆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드워드는 ‘딥 백그라운드(deep background)’ 기준으로 취재를 했다고 밝혔다. 이는 기자들이 쓰는 취재 준칙 같은 것으로, 취재원과 나눈 이야기와 정보를 다 쓸 수 있지만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책은 어디를 펴도 트럼프의 단면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참모들은 각종 브리핑 자료와 서류, 다음 날 일정을 건네준다. 트럼프는 다음 날 아침 10시쯤 아래층으로 내려와 오늘 일정이 뭐냐고 묻는다. 들고 올라간 서류는 안 봤거나 봐도 기억을 못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즉흥성이 자신의 강점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게 우드워드의 생각이다. 어쩌면 사전준비가 즉흥적인 대응능력을 떨어뜨린다고까지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사숙고나 계획 같은 것도 그의 즉흥적인 ‘육감’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외교정책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신중함’이다. 트럼프는 정반대 쪽에서 외교정책 결정을 내린다. 지금까지는 참모들이 그의 즉흥성을 견제해왔지만 그 시스템이 과연 언제까지 작동할까. 책을 읽으면서 그런 공포를 느꼈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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