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photo 뉴시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photo 뉴시스

“‘한 지붕 두 가족’을 대비하기 위해 지역으로 내려간다. 당분간 서울에는 못 올라온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9월 20일 한 중진 국회의원의 보좌관은 기자와 통화 도중 이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말한 ‘한 지붕 두 가족’이란 곧 있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 교체 과정에서 현직 국회의원이 아닌 새 인물로 당협위원장이 교체될 것을 예상한 발언이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전국 253개 지역구는 당협위원장이 당원과 조직을 관리하는 권한을 갖는다. 통상 현직 국회의원이 당협위원장을 맡는 게 관례다.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는 그러나 지난 9월 20일 당협위원장이 공석인 이른바 ‘사고 당협’ 22곳을 제외한 전국 231곳의 당협위원장에 대해 일괄 사퇴 안건을 처리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인적청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셈이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올해 연말까지 전국 253개 지역 당협위원장의 유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당무감사를 실시하는 한편 조직강화특별위원회(위원장 김용태 사무총장)를 구성해 당협위원장 인선작업에 돌입한다.

앞서 언급한 중진 국회의원의 경우 영남권 다선(多選)인 데다 고령임을 감안하면 이번 인적쇄신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만약 새로운 인물이 해당 지역 당협위원장에 임명된다면 1년7개월 뒤에 있을 차기 총선에서 현역 국회의원이 한국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앞서 언급한 중진 의원은 추석 연휴와 국정감사를 앞두고 보좌진 인력을 지역관리 중심으로 재편했다. 만약 해당 지역의 당협위원장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기존 조직과 당원을 관리함으로써 중앙당 차원의 인적쇄신을 피해가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렇게 되면 해당 지역구는 현역 국회의원과 중앙당에서 새로 임명한 당협위원장이 공존하는 이른바 ‘한 지붕 두 가족’의 비정상적 조직운영이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해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은 “당무감사도 하지 않고 당협위원장을 일괄 사퇴시킨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런 방식으로 김병준 비대위의 인적쇄신을 대비하는 영남권 중진 국회의원은 한둘이 아니다.

“인적청산은 선택 아닌 필수”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자의 반, 타의 반’의 심정으로 이번 인적쇄신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 7월 말 비대위를 맡은 직후부터 줄곧 인적청산 요구를 받아왔다. 한국당은 지난해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과, 같은 해 5월 대선 패배 이후에도 떠나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한 이렇다 할 혁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완패했다. 이후 비대위라는 비상체제가 구성됐고 김병준 위원장이 그 지휘봉을 잡았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보수진영에서는 “한국당의 인적청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시각이 팽배해졌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은 “사람 잘라서 한국당이 잘될 것 같았으면 벌써 됐을 것”이라며 “사람 자르는 게 먼저가 아니라 철학과 비전 그리고 가치가 바뀌어야 한다”면서 인적쇄신를 뒤로 미뤘다.

비대위가 들어선 지 2달이 훌쩍 지난 지금 한국당은 과연 철학과 비전이 달라졌다거나,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유권자의 평가를 받고 있을까. 여론조사기관의 정당지지율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현 비대위 체제가 철학과 비전을 새로 정립함으로써 유권자의 지지와 기대치를 높인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실시한 다수 여론조사 결과 한국당 지지율은 정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당 지지율이 지난 6월 지방선거 때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한국당은 김병준 비대위 초반 정당지지율이 반짝 상승하며 20%를 상회하기도 했으나 지난 9월 18~20일 사이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 여파로 인해 최근 조사에서는 다시 18%대로 하락했다. 일부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평화 공세가 위력을 발휘한 추석 민심까지 반영되면 한국당 지지율은 추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한국당 주요 당직자들 사이에서 집권여당의 평화 공세를 막을 ‘맞불 작전’이 필요하다는 의견 제시가 계속 있었다고 한다. 김병준 위원장이 인적쇄신안을 전격 수용한 것은 추석 민심을 달랠 나름의 노력 없이는 향후 비대위의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차기 당권을 노린 정치인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도 인적쇄신을 거부할 수 없는 배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정치 재개를 공공연하게 언급해온 홍준표 전 대표는 지난 9월 15일 미국에서 돌아왔다. 홍 전 대표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공항을 찾은 지지자는 예상보다 줄었으나 당내에서 그의 입지는 아직 건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내 일각에서는 인적쇄신이 없는 한 홍 전 대표가 다시 전당대회에 나올 경우 당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내 친박 성향의 인사들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차기 당권주자로 영입하기 위한 물밑 움직임을 시작했다. 황 전 총리는 현재 보수진영에서 차기 지도자로 유력하게 부상한 인물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김무성 의원 등 차기 당권 또는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도 최근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 보수진영의 유력한 정치인들이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일수록 김병준 비대위는 원심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추석 민심을 얻기 위한 여야 간 이슈 경쟁도 여당이 압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북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진 문재인 정부의 ‘평화 프레임’으로 인해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50%대 초반에서 70%대로 단박에 치고 올라갔다. 한국당 원로급 한 인사는 “김병준에게 외교안보 참모가 없으니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인적청산의 타이밍마저 놓친 듯하다”면서 “가치와 철학이라는 학문적 접근 말고 현역 국회의원 전원 물갈이 같은 현실적 파격을 추진하지 않고는 비대위가 성공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한국당 쇄신이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음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9월 23일 데일리안이 여론조사기관 알앤써치에 의뢰해 실시한 차기 지도자 선호도 조사는 한국당에 뼈아픈 결과였다.

한국당 지지층이 선택한 여권 인사는?

한국당 지지층을 상대로 실시한 차기 정치지도자 적합도 조사에서 민주당 소속 이재명 경기지사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상위에 오르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 알앤써치 조사 결과 한국당 지지층에서 차기 정치지도자로 1위에 오른 인물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42%)였다. 그 뒤를 이어 홍준표 전 대표(17%), 이재명 경기지사(4%), 유승민 의원(4%),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3%) 순으로 조사됐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만약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정치에 뛰어들지 않거나 내년 2월로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는 데 실패한다면 한국당 지지자들이 비주류이자, TK(대구경북)가 고향인 민주당 인사들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재명 지사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고 김부겸 장관의 정치적 고향은 대구다.

이처럼 한국당 비대위는 더욱 강력한 인적쇄신을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중도보수 유권자를 상대로 쇄신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는 향후 당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내 일각에서는 사고 당협을 제외한 전국 231개 당협위원장 가운데 절반가량은 바뀌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나오지만 중도보수층 민심은 당협 전체를 젊고 참신한 인재로 교체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협위원장 교체를 주도하게 될 김용태 사무총장은 전체 당협의 절반 이상을 만 49세 이하의 젊은층으로 교체하고 여성 분포 또한 5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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