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0월 22일 백악관에서 이민 카라반을 언급하면서 남미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줄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0월 22일 백악관에서 이민 카라반을 언급하면서 남미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줄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이탈리아발 뉴스는 극과 극으로 양분된다. 문화·예술에 관한 한 인류가 꿈꾸는 최고 최적의 모델이지만 정치·경제의 경우 정반대다. 인류가 피하고 싶어하는 최악의 반면교사가 지금의 이탈리아다. 그러나 멀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시간의 문제일 뿐, 이탈리아에서 터지면 언젠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내년도 예산안에 관한 논의는 2018년 10월 말 이탈리아발 뉴스의 하이라이트다. 현재 유럽연합(EU)의 예산 조정 요구에 맞서 예산안을 놓고 대치 중이다. 이탈리아 예산안이라 해도, 28개국으로 구성된 EU 멤버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 룰이 있다. EU로서는 간섭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2019년 예산안은 EU의 상식을 넘어선 구조다. 재정적자가 엄청나다. 채권을 마구 발행하고 돈을 빌려야만 버틸 수 있는 예산 체제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국가채무비율만도 무려 130%에 달할 전망이다. 평균 60%대인 EU의 두 배 수준이다.

EU와 예산안으로 맞서는 이탈리아 정권

상황이 이렇고 수입은 뻔한데도 엄청 돈을 많이 풀겠다는 것이 내년도 이탈리아 정부의 방침이다. EU는 대폭적인 수정과 예산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강행할 경우 EU로부터의 각종 경제제재가 가해질 전망이다. EU의 위협이 연일 터져나오면서 주식이 추락하고 장기금리가 상승하는 등 현재 이탈리아 경제는 풍전등화 상태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절충안이 마련되겠지만, EU가 바라는 만큼의 수정예산안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유는 현재의 이탈리아 정국에 있다. 세계사를 통틀어 극히 드문 극좌·극우 연립정권이 이탈리아의 정권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극우 북부동맹과 극좌 5성운동이 손을 맞잡은 연립정권이 현재의 이탈리아 정부다. 북부동맹은 지역주의를 주장하면서 중앙의 개입에 반대하는 정당이다. 5성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난민 반대, 동성애와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극좌 정당이다. 이념상으로 보면, 극좌·극우는 물과 기름의 관계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우 중요한 공통점을 하나 갖고 있다. 포퓰리즘에 기초한 정치라는 점에서 둘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적과 친구의 관계를 확실히나눈 뒤,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하면서 지지표를 확산하는 식이다. EU로부터의 간섭배제, 난민추방은 극우·극좌 정치세력의 대표적 슬로건이다. EU 배제와 지방을 중시하는 북부동맹과, 난민추방과 저소득층 중심의 5성운동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연립정권 수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내년도 이탈리아 예산에서 난민과 외국인에 대한 지원금 대폭 삭감, 저소득층 무상지원 같은 것이 강화된 것은 포퓰리즘에 근거한 정책이다. EU가 추구하는 자유·평등에 기초한 안정적 경제·사회 체제의 반대편에 선 일종의 ‘쿠데타’다. 이탈리아 정부는 EU의 각종 제재 가능성에 대해 정면대응하고 있다. “1㎜도 후퇴하지 않겠다”면서 오히려 EU 내부개혁까지 언급하는 것이 포퓰리즘 연립정권의 결의다. 내년도에 치러질 EU 내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선거를 통해 이탈리아의 생각을 보다 구체화하겠다고 공언하는 중이다.

지난 9월 27일 공공지출 확대를 골자로 한 내년도 예산안 회의를 마친 후 지지자들에게 V자를 그려 보이는 이탈리아 내각 각료들. ⓒphoto 뉴시스
지난 9월 27일 공공지출 확대를 골자로 한 내년도 예산안 회의를 마친 후 지지자들에게 V자를 그려 보이는 이탈리아 내각 각료들. ⓒphoto 뉴시스

이테시트도 현실화하나

이미 유럽 미디어의 관용어 중 하나지만, ‘이테시트(Itexit)’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처럼 이탈리아의 EU 탈퇴를 상징하는 말이다. 아직은 본격화되고 있지 않지만 포퓰리즘 정권의 성격상 가까운 시일 내에 로마발 이테시스 뉴스가 빈발할 것이다. EU만이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론도 그렇게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난민 문제는 물론 지역기구, 나아가 국제기구에 대한 반감은 2018년 국제정치를 규정하는 특징 중 하나다. 극좌와 극우를 잇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정치에 국한되지 않는, 글로벌 차원의 현상이다. 리버럴 미디어의 주장에 묻혀 순간적 ‘일탈현상’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서구유럽 대부분에서 만날 수 있는 큰 흐름이기도 하다. 독일 극우 정당이 주장하는 나토(NATO) 탈퇴론은 이미 위험수위에 이른 상태다.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대명사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이다.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듣기 좋은 ‘폴리티컬리 커렉트(Politically Correct)’의 정반대편에 선 인물이다. 국내 문제에서 글로벌 이슈에 이르기까지, 적과 친구를 확실히 나눠 싸우고 있다. 지구촌 모두가 함께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아닌 ‘아메리카 퍼스트’가 트럼프의 기치다. 10월 말부터 미국발 뉴스의 헤드라인 중 하나가 이른바 ‘카라반(Caravan) 행렬’이다. 온두라스에서부터 걸어서 국경을 돌파해 니카라과와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입국하려는 사람들이다. 남미의 테러와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민 자격으로 미국 국경선을 넘어가려고 한다. 당초 수백 명에서 출발했지만, 10월 24일 현재 7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존의 미국 정치라면 카라반 행렬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았다. 인권대국 체면도 있지만, 미국 내 라틴계 표를 의식해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회피했을 것이다. 트럼프는 다르다. 카라반을 범죄집단, 강간범으로 묘사하면서 한 명도 미국 국경선을 넘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카라반 행렬이 몰고 올 혼란을 강조하면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 미국인들에게 총을 들고 국경선을 수호하자고 독려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라면 최소한 국가적 차원의 논의라도 있을 법한 사안이지만,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큰 흐름 역시 ‘아메리카 퍼스트’다. 중간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민주당조차 침묵이다.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안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시리아 난민들이 터키·그리스를 통해 유럽으로 넘어갈 당시 인권대국 미국이 보여준 ‘특별한 배려’와 너무도 다르다.

닮은꼴 트럼프와 샌더스

미국 포퓰리즘 정치와 관련한 오해 중 하나는 ‘포퓰리즘 정치=극우 전유물’로 대하는 시각이다. 2018년 미국 포퓰리즘 정치는 공화당 중심의 극우세력 전유물이 아니다. 극우의 반대편 정치 노선인 극좌에서도 만날 수 있는 공통분모가 포퓰리즘이다. 미국에서 극좌정치의 대명사는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란 구호의 탄생지 버몬트주 상원의원이다. 바로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맞서 싸운 민주당 후보다. 샌더스는 형식적으로 민주당원이지만, 스스로 민주사회당(Democratic Socialist) 멤버인 무소속 의원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샌더스의 정치이념은 간단하다. ‘경제적·군사적으로 외국과 교류 없이 미국 노동자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자’는 것이다. 환경보호, 전쟁반대는 물론이고 글로벌 경영에 기초한 코퍼레이트 기업과 기업주들까지 공격한다. 각론에서는 다르지만, 총론에서 본다면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비슷한 것이 샌더스의 정책이다. 특히 이념으로서의 세계화(Globalism), 현상으로서의 국제주의(Globalization)에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샌더스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졌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도 소멸됐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극좌는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샌더스의 지지층이 젊은 2030 밀레니얼 세대였다는 점에서 그는 아직 건재하다. 극우·극좌의 동거는 이탈리아만이 아닌 미국에서의 현상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만국우편연합 공격하는 이유

반(反)글로벌 정책과 관련해 최근 트럼프는 두 개의 입장을 공언했다. 먼저 10월 20일 흘러나온 ‘중거리 핵무기 폐기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탈퇴 문제다. 1987년 체결된 사거리 500~5500㎞ 미사일의 생산·시험·발사 금지 협약에서 완전히 탈퇴해 무기 생산을 재개한다는 입장이다. 이미 러시아가 협약을 위반한 이상 미국만 가만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러시아는 물론 중국이 깜짝 놀라면서 반대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 아직 최종 결론은 안 났지만, 트럼프식 정치로 보면 이번 카드도 뭔가 협상의 승기를 잡기 위해 활용하거나 아예 그대로 강행할 공산이 높다.

두 번째는 10월 23일 발표한 미국 우편서비스(USPS)에 대한 대통령 행정명령이다. 개발도상국에서 보내온 국제우편요금 할인제도 폐지다. 개발도상국 우편물에 대한 할인제도는 만국우편연합(UPU) 협의에 의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행정명령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아예 만국우편연합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트럼프 행정명령의 주된 배경은 중국에 있다. 이른바 중국발 직구상품의 경우 미국산 물건에 비해 배달비가 싸다. 미국산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저가의 중국산 직구상품의 경쟁력을 떨어트리겠다는 의도다. 우편비용을 포함해 필자가 최근 구입한 중국산 디지털 시계는 9달러다. 트럼프의 행정명령 발효 이후에는 최저 14달러가 될 전망이다.

기존의 글로벌 체제 가운데 현재 트럼프가 영순위 타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무역기구(WTO)다.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자주 언급되는 기구로, 선진국인 미국보다 개발도상국인 중국에 유리한 체제라는 것이 트럼프의 주장이다. 당연히 WTO 탈퇴론이 끊이지 않는다. 1995년 출범한 WTO는 164개 회원국을 통해 세계 무역의 99%를 담당하고 있다. 2017년 수출·수입을 포함한 세계 무역의 총 규모는 17조7300억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미국은 3조4770억달러로 세계 무역의 19% 정도를 차지한다. 세계 1위 무역대국 중국은 4조2100억달러로 세계 무역량의 28%를 담당하고 있다. 트럼프가 문제시하는 것은 무역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무역적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2017년 미국은 5660억달러의 손해를 봤다. 이 가운데 중국을 통한 적자는 3752억달러다. 대략 전체 적자의 60% 정도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7년 중국은 전부 2880억달러의 흑자를 얻어냈다. 다른 나라들과 무관하게 ‘미국의 적자=중국의 흑자’인 셈이다. 트럼프는 중국의 불공정무역을 통해 미국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WTO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지난 10월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주관 ‘2018 세계무역 보고’ 행사.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주관 ‘2018 세계무역 보고’ 행사. ⓒphoto 뉴시스

WTO 무력화시키는 트럼프

트럼프가 WTO 탈퇴의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분쟁해결 기능에 관한 부분이다. 국영기업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보조금, 지적재산권 침해를 둘러싼 WTO의 해석이 너무도 애매하고, 중국에만 유리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제소를 해도 WTO가 이견 없이 그대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분쟁해결을 담당하는 최고기관인 상급위원회 위원 임명에 제동을 건 상태다. WTO 규정에 따라 상급위원회 정원은 9명이다. 그러나 현재 활동인원은 인도·중국·미국인 3명에 불과하다. 숨지거나 은퇴하면서 계속 줄어들고 있다. 미국이 재임명에 반대하면서 후속인사가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WTO 규정에 의해 회원국 중 한 나라라도 반대할 경우 상급위원 인사가 불가능하다.

국가 간 무역분쟁 해결을 위해서는 최소한 3명의 상급위원을 필요로 한다. 2017년 기준으로 WTO에 제소된 분쟁해결 건수는 한 달 평균 38.5건에 달한다. 폭주하는 업무로 3명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의 결론을 내려면 최소 3년 이상 걸린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나마 내년 12월에는 1명이 또 은퇴할 예정으로, 이후 미국이 신임 인사에 반대할 경우 아예 분쟁해결 기능이 마비될 수도 있다. 미국의 보복관세에 대해 중국이 WTO에 제소했다고 하지만 결론이 나올 수 있을지, 나온다고 해도 언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트럼프에게 있어 WTO 탈퇴는 최후의 카드라고 할 수 있다. 미·중 무역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WTO를 반미·친중의 무대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잠정적 전략이다.

아메리카 퍼스트는 반(反)글로벌에 기초한, 일대일 양자 간 대화에 주목한다. WTO뿐만이 아니라 중거리 핵무기 폐기 조약, 만국우편연합 공격으로 이어지는 트럼프의 국제기구 탈퇴 카드는 앞으로 점점 더 도를 더해갈 것이다. 미국의 나토 탈퇴를 뻥이나 정신 나간 소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상황에 비춰보면 곧 구체화될 공산이 크다. 빌 클린턴과 오바마가 닦아놓은 글로벌 평화주의는 이미 황혼으로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만 사라지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좋은 증거다. 미국의 UN 탈퇴라는 뉴스를 들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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