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워싱턴에 있는 평화연구소(USIP)에서 열린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와의 대화’를 들으러 갔다. ‘워싱턴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남자’라 불리는 지적인 군인 매티스는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안정’과 ‘듬직함’을 맡고 있다.

트럼프 시대는 하루하루가 바람 잘 날 없는 예측불허의 연속이기에 매티스의 존재감은 더 크다. 많은 사람들이 ‘국방부는 매티스가 맡고 있으니 잘하고 있겠지’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 매티스 사임설이 끈질기게 돌고 있다. 중간선거가 끝나면 장관들이 일부 교체될 것이라는데, 매티스와 세션스 법무장관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어쩌면 워싱턴에서 매티스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매티스가 외국 출장 중이라면 몰라도 미국 내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이날 행사는 더 더욱 가보고 싶었다.

매티스가 트럼프 대통령과 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날 매티스는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는 ‘미국 홀로’라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마치 비행기 안에서 위험이 닥쳐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 먼저 자기 마스크를 쓰고 그 다음에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하는 것처럼, 미국도 우선 내부 사정을 먼저 추스르고 외국을 도와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또 다른 고립주의라는 지적에 대해, 미국이 국제사회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돌리고 충전을 하는 중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 말에 쉽게 설득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 안고 있는 자기 문제가 너무 커서 국제사회에 눈돌릴 여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요즘 미국의 주요 뉴스 중 하나가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등 중미 국가들에서 ‘캐러밴’이라 불리는 거대한 이민자의 행렬이 미국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작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 규모이다. 살기 어려운 자신들의 나라를 떠나 무리 지어 미국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미국의 골칫거리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인 약 1만5000명을 국경지역에 파견하기로 했다. 캐러밴들은 어떻게든 미국으로 들어와 살 기회를 찾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막기 위해’ 일단 군대부터 보낸다고?

매티스 대화 행사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느닷없이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 쪽으로 군인을 수천 명 보낸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상하다고 했더니 그가 픽 웃었다. “그 캐러밴들은 늘 있었다. 트럼프가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민자 문제를 부각시켜 지지자들을 모으려고 강조하는 바람에 규모가 늘어났을 뿐이지.” 그러더니 “미국인은 여기 원래 살던 인디언만 빼고는 알고 보면 다 이민자들인데 저렇게 반(反)이민 정책을 쓰면 우리도 다 나가라는 건가?”라고 했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국제사회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투자할 수 있었던 경제적·군사적 여력 덕분이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이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어쩌면 지금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저 끝에는 미국이 더 이상 유일한 초강대국이 아니라, 그저 몇몇 강대국 중의 한 나라로 쪼그라든 새로운 세계질서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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