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유세 시절 멕시코와의 국경에 ‘만리장성’을 쌓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이게 웬 황당한 얘기인가 싶었다. 미국·멕시코 국경의 길이는 3144㎞에 달한다. 우리나라 휴전선이 약 240㎞이다. 그 13배쯤 되는 길이의 국경을 따라 장벽을 세우겠다는 트럼프의 말은 기이한 대선후보의 과대망상과 피해의식으로 들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지난해 중간선거 때는 중남미의 이민 행렬이 멕시코 국경지역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결국 미국의 새해는 멕시코 장벽 예산 지원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부가 일부 문을 닫은 채 시작하고 말았다. 이른바 ‘셧다운’이다.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국경장벽 건설 예산을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예산을 승인하라며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9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한 대국민 연설에서 “남쪽 국경에서의 통제되지 않는 불법 이민으로 인해 모든 미국민이 상처받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 대통령의 반응이 재미있다.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국경장벽은 미국 국내 정치 문제”라며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인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트럼프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이 이런 식으로 미국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멕시코 국경지역 상황이 위기라는 트럼프의 주장은 과장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는 배경에 대해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멕시코 국경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이슈가 아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멕시코와 중남미에서 치받쳐 올라오는 인구적·경제적 압력을 흡수해왔다. 로버트 카플란의 책 ‘지리의 복수’를 보면,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멕시코의 약 9배에 달한다. 인접한 두 나라 간의 소득 격차로는 거의 세계 최고라고 한다. 멕시코와 중남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으로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이다. 지금 미국 영토인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등은 19세기 텍사스 독립전쟁과 멕시칸·아메리칸전쟁에서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빼앗은 땅이다. 이 지역에 정착하는 멕시코계 이민자들은 조상이 살던 땅에 돌아와 산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역사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책 ‘미국’에서 “적어도 2080년에는 미국의 남서부 주들과 멕시코의 북부 주들이 한데 합쳐 새로운 나라를 형성할 것”이라고 썼다. “북쪽으로 향하는 멕시칸들의 급증과 국경을 사이에 둔 공동체들의 경제적 유대 증가”를 그 변화의 바탕으로 들었다. 그리고 미국·멕시코 국경이 흐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헌팅턴은 이민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민은 동화를 더디게 하고 때로는 방해한다”고 썼다.

이 부분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 문화에 분산·동화되지 않고 언어와 문화를 지키면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멕시코인에 대한 일부 미국인들의 우려가 이렇게까지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80년이 되면 정말로 미국과 멕시코 일부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나라가 태어날까. 이미 미국은 내가 알던 예전의 미국은 아닌 것 같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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