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싱가포르 1차 미·북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는 김정은과 트럼프. ⓒphoto 뉴시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1차 미·북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는 김정은과 트럼프. ⓒphoto 뉴시스

1901년부터 시작된 노벨평화상 역사에서 수상자가 상을 거부한 사례는 1973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공동 수상자로 발표됐던 파리평화협정의 북베트남(월맹) 협상 대표인 레둑토가 유일하다. 당시 레둑토는 “조국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상을 받지 않았다. 레둑토가 말했던 ‘평화’가 무엇인지는 1975년 4월 30일 밝혀졌다. 파리평화협정은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월남), 미국,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베트콩의 정치조직)가 서명한 베트남전쟁 종전을 약속한 조약을 말한다.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3년 1월 29일 베트남전쟁의 종전을 선언했고, 미군은 같은해 3월 29일에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자 북베트남군은 파리평화협정을 무시하고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공세를 강화했고,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항복했다. 레둑토가 말한 ‘평화’의 진짜 의미는 ‘적화(赤化)통일’이었다.

가짜 평화 보증서였던 파리협정의 교훈

이런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던 것은 무엇보다 파리평화협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평화협정은 남베트남에 침투해 있던 북베트남군 14만명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미군을 비롯해 외국 군대만 일방적으로 철군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미국 정부는 참전의 명분이었던 북베트남군의 남베트남에 대한 실제적 위협을 외면해버린 것이었다. 물론 북베트남이 철저하게 기만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장관의 오판이었다. 그들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공격할 경우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북베트남을 격퇴할 수 있기 때문에 북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을 깨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 닉슨 대통령은 재선 승리를 위해 ‘베트남전쟁 종전’이라는 외교적 성과가 필요했다. 공식 명칭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파리협정(The 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이라는 파리평화협정(The Paris Peace Accords)이 말 그대로 ‘가짜 평화’의 보증서가 된 셈이었다.

제2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미국 정부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 등에 대한 상응조치로 종전선언을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나오고 있다. 종전선언은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입구’ 차원의 조치로 지난해 4·27 남북 정상 간에 합의한 판문점선언에도 명시된 바 있다. 북한은 지난해 미국에 종전선언 채택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먼저 핵 리스트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며 호응하지 않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그동안 “종전선언은 이제 전쟁을 끝내고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라며 종전선언의 ‘전도사’ 역을 자임해왔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과 종전선언에 합의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도 “종전선언이 비핵화에 상응하는 미국의 조치에 해당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애당초 종전선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던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과 김정은의 친서 외교 등에 마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제1차 미·북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거센 비판에 직면했던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김정은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 어떻게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는 종전선언을 통해 북한의 체제 불안을 덜어줌으로써 북한 비핵화를 진전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전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일종의 ‘준(準)평화협정’이라고 볼 수 있다. 종전선언은 전 세계에서 최후의 냉전지역인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종료시킬 정치·외교·군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종전선언에 따른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종전선언은 주한미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종전선언→유엔사령부(유엔사) 해체→평화협정→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는 전략을 추진해왔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조국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제시해왔다. 자주는 외세의 배격, 즉 미군 철수를 말한다. 평화는 전쟁 당사국인 북한과 미국의 평화협정 체결을 의미한다. 민족대단결엔 국가보안법 철폐와 공산당 합법화 등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도 할아버지 김일성과 똑같은 전략을 추진해왔다. 판문점선언은 제1조 1항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다고 강조했다. 판문점선언은 또 제3조에서 군축을 강조하면서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적시했다. 남북 정상이 지난해 9월 19일 합의한 평양선언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의 대변인’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면서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임을 강조해왔다.

지난 1월 워싱턴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이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가운데), 미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사진을 찍었다. ⓒphoto 뉴시스
지난 1월 워싱턴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이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가운데), 미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사진을 찍었다. ⓒphoto 뉴시스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압박 수순

만약 2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에 합의할 경우 북한 정권은 앞으로 종전선언을 빌미 삼아 정전체제의 소멸을 공식화하면서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권은 이미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소속 김인철 서기관은 지난해 10월 12일 열린 유엔총회 제6위원회(법률문제 담당)에서 유엔사가 ‘괴물과 같은(monster-like)’ 조직이라며 가능한 가까운 시일 내에 해체할 것을 요구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도 지난해 9월 29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유엔사는 유엔의 통제 밖에서 미국의 지휘에만 복종하고 있는 연합군사령부에 불과하다”면서 해체를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은 종전선언이 채택되면 6·25전쟁이 종결됐기 때문에 유엔사가 없어져야 한다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종전선언이 되면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와 유엔사 창설의 이유가 사라진다는 논리다.

그런데 한국의 국책 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지난해 12월 12일 발표한 정전협정을 차후 대체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협정’ 초안에서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감축 등을 제시하면서 북한 정권의 주장에 사실상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통일연구원은 초안에서 평화협정 발효 이후 90일 안에 유엔사를 해체하고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관리위’를 설치하자고 제의했다. 통일연구원은 또 주한미군과 관련해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완료 이후 한반도의 구조적 군비 통제에 착수한다’는 원칙론과 함께 ‘비핵화가 완료되는 2020년 이내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에 관한 협의에 착수한다’는 내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런 내용들은 문 대통령이 “주한미군은 한·미 동맹의 문제다. 평화협정 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언급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 주한미군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고 있어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과는 무관하다. 유엔 안보리 결의로 탄생한 유엔사 해체도 안보리 결의가 필요하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해제할 수 없다. 유엔사는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에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넘겨줬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유엔사는 전작권을 가진 한미연합사에 병력을 인계하는 역할이지만, 상황에 따라 한미연합사의 전작권을 가져와 전시 지휘부로 활동할 수도 있다. 특히 유엔사는 전시에 중요하다. 그 이유는 유엔사가 운영하는 일본 내 후방기지 7곳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종전선언을 하면 주한미군과 유엔사의 존속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종전선언을 하면 한·미 연합훈련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한·미 연합훈련을 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한국군과 훈련을 하지 않으면 주둔 자체가 어렵게 된다. 게다가 북한의 선전·선동과 반미 여론까지 확산되면 한·미동맹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없는 한·미동맹은 별 의미가 없다. 동·서독이 통일됐는데도 미군이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주한미군의 존재는 한국의 국가 안보에서 ‘최후의 보루’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보장하지 않고 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허점을 주한미군이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한미군의 철수나 감축은 한국 경제에 상당한 리스크를 줄 수 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에는 거대한 힘의 공백이 생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 과정을 지원할 세력 없이 한국이 단독으로 주도할 역량은 없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이 있었던 것처럼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남북한의 무력충돌을 방지할 국제기구와 이를 지원할 군사력이 없다면 자칫하면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

1973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베트남전쟁 종전을 선언하고 있다. ⓒphoto 닉슨재단
1973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베트남전쟁 종전을 선언하고 있다. ⓒphoto 닉슨재단

북한의 주한미군 주둔 용인설의 진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의도인지는 몰라도 북한발(發) 주한미군 주둔 용인설(說)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해 9월 5일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김정은이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주둔은 별개 문제로 보고 있다”고 밝힌 것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미국과 비핵화 협상의 북한 실무책임자인 김영철이 수장으로 있는 통일전선사업부 소속의 반제민족민주전선중앙위원회 선전국은 지난해 9월 7일 ‘침략과 분단의 원흉, 불행과 고통의 화근인 주한미군을 단죄한다’는 제목의 주한미군 성토문을 발표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다음날인 9월 8일자에 그 내용을 그대로 게재했다. 성토문은 “미군은 해방자의 탈을 쓰고 한반도에 들어왔고, 6·25 북침 전쟁을 일으켰으며 오늘도 야수적인 살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성토문은 또 한국 국민에게 10여개에 달하는 주한미군 철수 투쟁 구호도 함께 제시했다. 이들 구호 중 “통일의 길 가로막는 분단의 원흉, 판문점 선언 이행의 기본 걸림돌인 미군을 하루빨리 몰아내자” “주한미군 기지들을 통째로 매몰하자” 등이었다. 북한 정권의 주한미군에 대한 기존 입장에 변함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외세와의 합동군사연습 중단’ 등을 요구한 것도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북한 정권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바라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정은이 지난해부터 4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혈맹관계를 재확인한 점을 볼 때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시 주석은 지난 1월 8일 4번째 방중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조선 동지들의 믿음직한 후방이며 견결한 동지, 벗으로서 쌍방의 근본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정세 안정을 위해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그동안 자국을 겨냥한 군사력인 주한미군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해왔다.

주한미군 철수와 감축 문제에 가장 큰 위험요소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미국 조야의 반대 여론 때문인지는 몰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2월 3일 CBS 방송 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 다른 얘기는 한 번도 안 했다”라고 대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아마도 언젠가는 (철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면서 “그곳(한국)에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시리아 철군 결정에 이어 아프가니스탄 철군도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해외 주둔 미군의 비용과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을 증액할 것을 주장해왔다. 특히 내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는 아니더라도 감축을 한반도 평화 정착의 상징이자 외교적 업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데이비드 맥스웰 미국 민주주의수호재단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 카드를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처럼 독단적인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 일정 규모의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제임스 밀러 전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도 “북한이 더 이상 위협이 아니거나 통일된 한국이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주한미군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현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할 경우 요란하게 헤드라인을 장식하겠지만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정당성을 손상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리평화협정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고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 요소만 제거하고 김정은과 종전선언에 합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닉슨 전 대통령처럼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축을 단행할 수도 있다. 올해는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라는 ‘닉슨독트린’이 나온 지 50주년이 된다. 미국 정부는 ‘닉슨독트린’ 발표 2년 후인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병력 2만명을 철수시켰다. 종전선언의 덫을 간과해선 안 된다.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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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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