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부산 감만부두. ⓒphoto 연합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부산 감만부두. ⓒphoto 연합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의원은 한때 증세 없는 복지는 가능한지 허구인지를 놓고 충돌했다. ‘배신의 정치’는 새누리당 내에서 심판받아 유 의원은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증세 없는 복지는 가능한가, 아니면 허구인가? 누가 틀리고 누가 맞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틀렸다. 틀린 문제를 놓고 답을 구하면 어떤 답인들 맞을 리 없다. 담세수준과 복지수준 간의 연관성이 높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현재의 저(低)부담-저(低)복지를 중(中)부담-중(中)복지 내지 고(高)부담-고(高)복지로 바꾸자는 얘기도 이러한 상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담세수준과 복지수준이라는 두 개의 변수만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답은 ‘아니오’다. 국가부채라는 또 하나의 중대 변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자국채를 발행하면 증세를 하지 않고도 복지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현 정부 들어 적자국채는 2013년 24조3000억원, 2014년 27조7000억원이 발행되었다. 올해는 10월 현재 42조원을 넘어섰다. 이명박정부 5년간 늘어난 92조6000억원보다 많은 수치다. 그러나 현 정부는 ‘국민건강을 위해’ 담뱃값을 올린 것 말고는 특별히 증세한 적이 없다.

적자국채는 증세 없는 복지를 가능케 한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서 적자국채를 빼면 “증세 없는 복지는 가능하다”가 된다. 3차방정식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2차방정식으로 푸는 격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자유다. 하지만 올바른 답은 결코 구해질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2차방정식을 푸느라 분주했다. 현역 세대의 부담(증세)을 미래세대의 부담(적자국채)으로 돌리는 ‘영리한 정치’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내년 국가예산 386조원 중 적자국채 이자로만 13조원이 지출된다. ‘헬조선파’들이 진짜 분노해야 할 대목이다.

2016년 한국 경제를 논함에 있어 다소 장황하게 서두를 꾸민 이유는 이렇다. 경제가 어렵다, 위기라고들 아우성인데, 도대체 우리 앞에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진단이 정확해도 처방은 틀릴 수 있다. 하물며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제대로 된 해법이 구해질 리 만무하다.

현 위기는 급성질환이 아닌 만성질환

먼저 대통령이 버젓이 있는데도 ‘초이노믹스’란 불경(?)스러운 표현을 기획재정부 보도자료에 과감하게 쓴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상황인식을 살펴보자. 그는 지난 11월 10일 세종시 한 식당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출입기자단 송년회에서 경제위기설이 근거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내외 여건을 다 짚어봤지만 위기 가능성은 없다”며 “객관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선방하고 있고, 한국 경제가 위기라면 세계에 위기가 아닌 나라가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위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일단 3685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고와 경상수지의 구조적 흑자, 높지 않은 수준의 단기외채 비율 등으로 IMF 환란과 같은 제2의 외환위기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자금이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역으로 한국이 남아공이나 브라질 같은 신흥국과 달리 외적 충격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저유가와 글로벌 경기침체로 수출이 감소한 것 역시 엄청난 위기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2015년 7월 기준 한국의 수출은 전년 대비 -5.2% 성장하여 주요 국가 중 중국(-0.8%) 다음으로 감소폭이 작았다. 통화 약세의 덕을 본 일본(-8.4%), 독일(-13.1%)과 비교해도 선방했다. 금액 기준 세계 수출국 순위로 보면 프랑스를 제치고 7위에서 6위로 올라섰다. 국제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지난 12월 19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2로 한 단계 올린 것도 동일 등급(Aa3)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탄탄한 대외신용지표 때문이었다. 따라서 최 부총리가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항변한 것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최 부총리는 한국 경제가 당면한 위기의 성격과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외부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초고속·압축 고령화, 성장에 따른 낙수효과의 소멸, 근로정신의 퇴화, ‘민주주의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등 내부요인에 의한 것이다. 외부충격의 경우 자각증세가 뚜렷이 나타나지만, 내부요인의 경우 강렬한 고통을 유발하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는 암세포 확산과 같아 자각증세가 미약하다. 전자가 ‘푹’ 꺼지는 모습이라면, 후자는 ‘스멀스멀’ 오른쪽 밑으로 기어가는 모양새를 띤다. 현 위기는 급성질환이 아닌 만성질환이다.

현재의 위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구구조의 변동(demography)이다. 한국의 고령화는 세계 최단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중이 7%인 고령화사회에서 20%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데 일본이 36년 걸렸는데, 한국은 2026년 불과 26년 만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전망이다. 일본의 버블붕괴 시점인 1990년대 초반은 생산가능인구(15∼64세)의 증가율이 피부양인구(0∼14세, 65세 이상)의 증가율보다 높은 시기인 ‘인구보너스기’의 종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의 경우 2012년에 인구보너스기가 종료되었다. 2016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는 것 아니냐는 논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미 그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가고 있는데 갈 것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한가하기 그지없는 뒷북논쟁이다.

현재 한국 경제는 역대 최저수준의 낮은 금리와 물가에도 불구하고 소비와 투자가 꽁꽁 얼어붙는 저금리·저물가·저투자·저소비의 악순환이라는 4저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 1990년대 초 버블붕괴 이후 1999년 디플레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일본 상황과 흡사하다. 필자는 1994년부터 1999년까지 6년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당시 경험한 일본의 풍경과 너무도 흡사한 한국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최 부총리는 2014년 7월 취임 직후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없었다. 장기복합불황의 늪에 빠지는 줄 모르고 초기대응에 실패했던 1990년대 일본의 교훈으로부터 배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이노믹스는 그 교훈을 살리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4년 11월 4일 ‘한국의 혼란스러운 성장계획(South Korea’s Confused Growth Plan)’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초이노믹스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겠다고 밝혔으나, 정작 일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 역시 2014년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초이노믹스를 ‘정부, 가계, 기업의 부채 증가에 의한 성장정책’이라고 규정하며 “막대한 빚을 내서라도 가계, 기업의 가용재원을 총동원해서 자산시장 활성화와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겠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의원은 “일본식 장기불황을 피상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일본의 잘못된 정책마저 답습하고 있다”며 “일본식 장기불황의 핵심은 엔고 상황에서 경제체질을 개선해 경쟁력을 높이려는 정공법을 택하는 대신 재정을 확대하고 금리를 인하해 손쉽게 경기를 부양하려 하다 위기를 자초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3차 총파업결의대회에서 총파업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민주노총 집행부. ⓒphoto 연합
지난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3차 총파업결의대회에서 총파업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민주노총 집행부. ⓒphoto 연합

초이노믹스는 부채 증가로 귀결

지방을 줄이고 근육을 늘리는 체질개선과 체력강화는 운동요법과 식이요법의 병행 실천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저 링거 주사를 맞고 수혈을 자주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초이노믹스의 최대 문제점은 ‘과녁의 불명확성’에 있었다. 초이노믹스는 초기에 내수활성화를 강조하다가 나중에는 엔저와 글로벌 경기둔화로 인한 수출부진을 걱정하였으며, 과감한 규제개혁을 외치다가도 재정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나섰다. 초점이 명확지 않은 일관성 없는 정책을 구사하고 여러 곳을 조준함으로써 힘을 분산시키고 말았다.

최 부총리는 소득주도성장을 내걸며 가계소득 증대방안으로 기업소득 환류세제(기업이 임금·투자·배당에 쓰지 않고 남긴 이익에 대해 10% 과세하는 제도)를 야심차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2015년 3월 동 제도 실시 이후 가계소득 증대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통계청 가계 동향에 따르면 2015년 3분기 가계소득 증가율은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0.7%(전년 동기 대비)에 그쳤다.

결국 1년 반에 걸친 초이노믹스는 부채증가로 귀결되고 말았다. 1년 반 동안 가계부채는 1035조원에서 1200조원으로 170조원가량 증가했다. 한 달에 10조원씩 불어난 셈이다. 2014년 말 164%를 기록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최고 수준이던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2015년 말 170%에 육박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금융위기가 발발했던 2008년 미국의 130%보다 높다. 미국은 이 수치를 2012년 115%로 낮추었다. 정부의 재정건전성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2016년 국가채무(645조원)는 올해보다 50조원 넘게 늘어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사상 처음으로 돌파한다. 박근혜정부 5년간의 국가채무 증가 속도(249조원, 56%)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이명박정부 5년의 증가 속도(143조원, 48%)를 뛰어넘을 전망이다. 한국은 가계부채와 기업부채 등 민간부채에 정부와 공공기관, 지방공기업 부채까지 합치면 총 부채가 GDP 대비 286%나 되는 ‘부채 공화국’이다. 중국의 282%보다 높다.

미국과 일본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스러운 부채축소(deleveraging) 과정을 거친 것과 정반대로, 초이노믹스는 부채로 경기를 부양해 왔다. 가계부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경기부양을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완화로 대출을 늘려 부동산 시장에 군불을 지핀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는 한국 경제의 뉴 노멀(new normal)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한국의 도시화는 이미 종료되었으며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다. 최대 인구집단인 베이비부머들의 은퇴도 시작되었다. 수급관계상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과거와 같은 대세상승기로 반전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다. 가계부채 중 40% 정도가 주택 관련 대출이다. 주택담보대출 중 70% 이상이 원금상환 없이 이자만 내고 있다. 그런데 중산층과 서민을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주택구입 행렬에 동참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정책일까?

최 부총리는 여의도로 돌아가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2015년 주택인허가 물량은 분당, 일산 등 수도권 1기 신도시가 건설된 1990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70만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인허가를 받은 주택은 보통 2~3년 뒤 입주가 이뤄지므로 2017년 입주 물량은 2006년 이후 최대치인 32만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공급량이 과도하게 늘면 부동산 시세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2017년 이후 대출금과 전세금을 빼면 남는 게 없는 ‘깡통 주택’이 속출할 것이라는 경고가 들리는 이유다.

주택 가격만 하락하는 것이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2257조원을 기록했던 기업 매출이 2014년 2231조원으로 26조원(1.2%) 줄었다고 한다. 기업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제조업(-1.4%)은 물론 도·소매업(-5.1%), 숙박·음식점업(-3.0%), 부동산·임대업(-10.2%) 매출도 줄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2015년 기업 매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좀비기업도 전체 기업의 15%를 넘어섰다.

무상복지가 아닌 일하는 복지를 지표로

기업의 매출 감소는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돌이키기 힘든 내리막길에 들어섰다는 경고음이다. 뼈를 깎는 기업 구조조정과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새 살이 돋게 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도 축소지향이라는 일본화(Japanification)의 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1200조원에 도달한 가계부채와 8만개에 달하는 좀비기업을 수술대에 올리지 않고는 경제회생을 기대할 수 없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현 단계 한국 경제의 최우선과제가 구조개혁이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최경환 경제팀의 정책기조를 이어가겠다고 하면서 가계부채는 관리가능한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정부는 4대 개혁의 지향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핵심은 고용·복지·교육이 삼위일체가 되는 행정개혁을 통해 근로복지문화를 일대 혁신하는 것이다. 무상복지가 아니라 일하는 복지를 지표로 삼아야 한다. 한국의 워킹 스피릿(working spirit)은 퇴화하고 있다. 표의 노예가 된 여의도정치는 무상복지를 남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학진학률은 청년고용시장의 미스매치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보다 잘사는 독일, 스위스보다 두 배 높은 대학진학률을 어떻게 졸업생들의 기대수준에 맞는 취업으로 연결시킬지 답해야 한다. 그건 손오공의 요술방망이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위선을 거두어야 한다. 반값 등록금 같은 허황된 공약으로 젊은이들을 오도할 것이 아니라 마이스터고를 대대적으로 육성하여 가방끈 길지 않아도 웬만큼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

워킹맘 울리는 무상보육정책을 시행하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을 극복하겠다는 이율배반 또한 부끄러워해야 한다. 재정건전성 강화를 이야기하면서 무상복지를 남발하는 낯 뜨거운 행위도 그만두어야 한다. 각 분야가 따로 노는 분절적(分節的) 정책으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 재정, 산업, 고용, 복지, 교육 등 분야는 다르더라도 모든 정책의 방향성이 일치해야 한다.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실기를 하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거나 처방이 가능하더라도 훨씬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최대위기는 처방전을 만들어야 할 정책 담당자들이 위기의 성격과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않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경기회복과 구조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2016년 경제정책 방향은 파란불과 빨간불을 동시에 켜놓은 신호등처럼 다가온다.

설상가상으로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치의 계절에는 경제가 정치의 종속물이 된다. “가계부채 대책이 주택시장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의 최근 발언은 정치의 계절에 부동산 경기를 급랭시킬 수 없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그러나 폭탄은 돌릴수록 파괴력이 커진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신지호

연세대 객원교수·18대 국회의원

키워드

#포커스
신지호 연세대 객원교수·18대 국회의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