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현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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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이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위원은 정신과 의사이고 신경과학자이다.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는 카이스트 내 클리닉에서 주 1회 정신과 진료를 한다. ‘정신과 의사’와 ‘신경과학자’란 두 일의 접점은 낯설었다. 두 개의 직함은 이 박사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 5월 24일 KAIST 교내 생명과학동 2층으로 그를 찾아갔다. 이 박사는 IBS 시냅스뇌질환연구단 연구위원. 그를 IBS 본원이 아니라 카이스트에서 만난 건 그가 속한 연구단의 김은준 단장이 카이스트 교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사무실 자리를 보고 놀랐다. 방이 비좁아 독서실 같았다. 칸막이가 나란히 있는데 한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이 독서실보다 작게 보였다. IBS 연구위원이 일하는 공간으로서는 열악했다. 이 박사는 “고생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장소도 마땅치 않아 시냅스뇌질환연구단의 실험실이 있는 카이스트 문지캠퍼스로 차를 타고 갔다. 인터뷰는 이 박사의 차 안에서 시작됐다.

“대덕초·중·고교를 나왔다. 아버지가 카이스트 교수였다. 과학을 공부하고 교수가 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랐다. 연세대 화학과에 진학했고, 4년 마치고 연세대 의대에 본과 1학년으로 옮겼다. 화학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아서 의대로 갔다.”

의대로 옮긴 후에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했다. 정신과 수업이 재밌었다. 남편이 정신과 레지던트 1년 선배였다. 남편을 피해 아주대 의대로 갔다. “아주대병원, 참 좋았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 많았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 스스로 환자가 돼 정신 분석을 받았다. 이은이 박사는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이재승 선생이 해줬다. 정신과 의사가 되려면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이재승 선생으로부터 생각지 못한 얘기를 들었다. “당신이 만약 정신과 환자를 보면 공감 정도가 지나쳐 힘들어한다.” 이재승 선생은 삶의 무게가 좀 가벼워지는 걸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딴 뒤 생물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카이스트 문지캠퍼스는 자동차로 약 10분 거리. 이은이 박사 얘기를 듣다 보니, 캠퍼스 내 한 건물에 들어와 있었다. 실험실은 건물 2개 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박사가 2013~2014년 2년간 실험실을 구축했다고 했다. 김은준 카이스트 교수가 기초과학연구원이 생기면서 시냅스뇌질환연구단 단장으로 선임되었고, 김 단장은 이 연구위원에게 ‘In Vivo(생체 내) 전기생리학 실험실’ 구축을 지시했다고 한다.

뇌 수술 실험한 쥐 수천 마리

실험실에서 악취 같은 게 났다. 이 박사는 “쥐 냄새”라고 했다. 쥐 케이지(cage)가 2000개 있다고 했다. 한 케이지당 5마리가 있으니 모두 1만마리다. 한 층 아래에는 4000개 케이지가 있다. 한국에서 쥐를 가장 많이 키우는 실험실이다. 생쥐를 갖고 사회성 실험, 공포조건 자극 실험과 같은 행동실험을 한다. ‘In Vivo 전기생리학실’이라는 실험실 이름도, 살아있는 쥐의 ‘생체 내(In Vivo)’ 신경활성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해서 붙였다.

쥐 실험하는 방에 들어갔다. 어두컴컴했다. 이곳에서 쥐를 대상으로 한 사회성 실험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라면상자보다 작은 상자가 있다. 생쥐 한 마리를 안에 넣는다. 이 쥐는 자기가 편한 곳에 있으려 한다. 상자의 한 모퉁이에 다른 생쥐 한 마리를 놓아둔다. 창살이 있는 좁은 공간 안이다. 상자의 다른 쪽 모퉁이에는 사물을 놓아둔다. 그런데 관찰 대상인 생쥐는 자폐 유전자를 갖고 있다. 자폐 쥐는 다른 쥐와 사물 중 무엇에 관심이 더 있을까 확인하는 게 실험 목적이다. 관찰 대상 쥐가 어느 쪽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지 관찰하면 된다.

일부 생쥐는 머리 수술을 받아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 왕관을 뒤집어놓은 모양의 아이 손톱만 한 장치를 머리 위에 쓰고 있다. 쥐의 신경세포에서 실시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확인하는 도구다. 생쥐 체중은 20~30g밖에 안 된다. 머리 위 장치가 무거우면 안 된다. 그래서 생쥐 머리에 헬륨 풍선을 달아주기도 한다. 공기보다 가벼워 하늘로 날아가는 헬륨 풍선이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이 박사에게 쥐 머리에 장치를 삽입하는 수술을 해봤느냐고 물었다. “도사죠. 쥐 수술 도사. 남편이 나보고 쥐 신경외과 의사 같다고 말해요. 지금까지 몇천 마리는 했죠.”

이 박사는 정신분석학으로 시작해서 ‘정신의 생물학’으로 연구를 넓혔다. 정신분석은 심리치료를 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찾아 해석함으로써 그 이유를 없앤다. 또 잘한 행동은 보상하고 잘못한 행동은 벌을 줘서 치료하기도 한다. 반면 정신의 생물학자는 환자를 약물로 치료하거나, 저주파자극 혹은 뇌심부전기자극 등 뇌를 자극해서 치료한다. “두 개가 별개 같지만 그렇지 않다. 상보적(相補的)이다. 하나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고 이 박사는 말했다.

뇌질환 동물 모델 만드는 것이 관건

이 박사는 ‘정신생물학자’의 길을 걷기로 하면서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에 들어갔다. 이 대학원 1기생으로 2006년 입학했다. 임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기초과학을 연구해서 의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게 의과학대학원 개설 이유였다. “과학자는 임상을 모르고, 의사는 과학을 모른다. 의사 출신 과학자인 MD-PhD가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기생이 9명이었다.” 당시 정신과 의사로서 생물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국내외에 거의 없었다. 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에릭 캔델 교수(미국 컬럼비아대학)가 정신과 의사인 MD-PhD이다.

이 박사에 따르면 항우울제를 쓰면 90% 가까이 우울증이 치료된다. 조울증을 가라앉히는 데는 리튬이 특효약이다. 그런데 왜 약이 듣는지 모른다. 병이 왜 생겼는지도 모른다. 이 박사는 “여기에 블랙홀이 있다. 이걸 공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학원에 늦게 들어가다 보니 동료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다. 지도교수(김대수 교수)와 다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연구 분야를 놓고서도 지도교수와 생각이 달랐다. 김 교수는 분자생물학을 바탕으로 파킨슨병을 연구했다. 반면 이은이 박사는 관심이 정신과밖에 없었다. 정신질환인 우울증을 연구했다. 그런데 입학 7년 만에 박사논문이 없이 학교를 나섰다. 이런저런 사유가 있었지만 논문이 없으니 갈 데가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병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이언스를 그만두고 내가 살 수 있을까를 끝없이 내게 물었다.”

어느 날 ‘외상’으로 박사가 되었다. 2013년 4월 박사논문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김은준 카이스트 교수가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할 기회를 준 것이다. 김 교수가 IBS 시냅스뇌질환연구단 단장으로 선임된 게 이 박사과정 수료자에게는 천행이었다. 이 박사는 IBS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폐라는 새로운 정신질환에 도전했다. 자폐증의 대표적인 두 증상 중 하나인 사회성 결핍을 파고들었다.

정신과는 연구하기가 힘들다. 우울증 연구 초기에는 동물 모델도 없었다. 이 연구위원은 “우울증, 자폐, 조울증, 정신분열증을 가진 쥐를 만들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정신과 연구는 동물 모델을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 얼마나 진짜 같은 모델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던 중 돌파구가 생겼다. 에릭 네슬러라는 미국 연구자가 우울증 동물 모델을 내놓은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박사과정 때 ‘에릭 네슬러 동물 모델’을 갖고 우울증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왼쪽 뇌의 피질 활동이 사회적 행동의 스트레스 효과를 조절한다는 걸 알아냈다. 왼쪽 뇌에 빛을 쪼이면 신경세포가 활성화되고 우울증이 완화됐다. 곡절 끝에 2015년 한 학술지에 논문이 실렸고, 이게 나중에 그의 박사논문이 되었다.

2016년에는 자폐 관련 논문을 썼다. 분자생물학 관점으로 자폐를 이해하는데, In Vivo 전기생리학적 접근법을 사용한 드문 연구였다. IBS 시냅스뇌질환연구단 부연구단장인 정민환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자폐 연구 이야기도 길다”고 이은이 박사는 운을 뗐다. 출발은 칼 다이서로스라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교수다. 그는 광유전학을 만들었다. 유전자의 활동을 빛으로 추적하는 게 광유전학이다. 정신과 의사는 뇌의 내측전전두엽에 뇌의 활성도를 높이는 신경세포와 활성도를 억제하는 신경세포가 있으며, 이 두 신경세포 간 균형이 깨지면 자폐가 나타난다고 믿어왔다. 칼 다이서로스는 이 오래된 생각을 광유전학으로 입증했다. 정상적인 쥐에서 이 균형을 깨뜨리자 사회성 결핍이 나타났다.

학계 거장 반박하는 논문 준비 중

이 박사는 2016년 미국 보스턴 인근에서 열린 골든 리서치 컨퍼런스에서 칼 다이서로스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이 박사 논문을 보고 좋아하면서 학술지에 자신의 논문과 두 편을 동시에 내자고 제안했다. 두 논문의 접근법이 달라 상보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한 제안이었다. 두 개 다 실릴 수 있다고 봤다. 권위 있는 학술지 한 곳에 같이 제출했다. 그런데 이 박사 논문만 거절됐다.

“논문이 왜 거절됐는지 알아야 했다. 실험을 계속했다. 1년 내내 힘들었다.”

학계 거장을 상대로 한 반론 제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주위에서는 “지명도 낮은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연구를 마무리하자”고 압박했다. 지난 2월에 실험이 잘 끝났다. 현재 이 박사는 다이서로스 연구에 동의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를 위한 데이터도 확보한 상태로, 논문이 나오면 학계에서 큰 이슈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박사는 “이번 논문을 쓰고 일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자신의 의과대 동기들은 대부분 의대 부교수로 일하고 있는데, CNS(‘Cell’ ‘Nature’ ‘Science’란 3개의 과학학술지를 가리키는 말)에 논문 1~2편이 실려야 주요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박사는 이를 두고 “미친 경쟁”이라고 했다. 의사로서 기초과학자가 된, 즉 MD-PhD가 된 동기들 일부는 대학으로 가기도 했고, 제주도에 내려가 개업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대학에 간 MD-PhD들은 공간과 장비가 없어 실험을 하지 못한다. 당초 의과학대학원에 들어간 것이 빛이 바래는 셈이다. 이 박사는 “연구 전담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연구 90%, 임상 10%로 일하는 게 연구 전담 의사이다. 그러려면 연구병원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는 이런 시스템이 전무하다.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이 그런 연구병원 중 하나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MD-PhD에 연구기금도 몰린다.

정신과 의사이고, 박사학위를 가진 기초과학자여서 그가 남 부럽지 않다고 지레짐작하고 갔던 취재였다. 하지만 그가 공부한 과정을 듣는 내내 나도 힘들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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