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최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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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박성익(42) 박사는 지난 2월에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Raleigh)시를 세 번이나 찾았다. 당시 평창 올림픽 공식 TV중계 방송사인 NBC가 롤리 지역에서 미국 사상 처음으로 UHD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롤리 소재 지역방송인 CBC가 차세대 UHD 방송을 성공적으로 시범 방송했다.

지난 11월 2일 대전에서 만난 박성익 박사가 롤리까지 날아간 건, 자신이 제안하고 개발한 UHD 방송의 성공적인 데뷔를 기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UHD 방송은 기존 방송(HD)보다 화면 질이 4배나 좋다. 선명한 UHD TV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팀이 목에 금메달을 거는 걸 미국 시청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박성익 박사는 방송과 통신 분야에서 효율적인 데이터 전송 기술을 연구하는 공학자이다. ETRI의 방송미디어연구소 미디어전송연구그룹 소속이다. 박 박사에 따르면 ETRI가 개발한 UHD 방송의 핵심 기술은 2016년 1월에 차세대 북미 TV방송 표준으로 채택됐다. ATSC 3.0이라고 불리는 디지털 방송 표준이다. ATSC(Advanced Television Systems Committee)는 북미방송 표준 기구이며 이 기구가 채택한 표준에 따라 북미 세 나라(미국·캐나다·멕시코)가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한국도 북미방송 표준을 따르고 있다. 박성익 박사에게 ‘과거 NTSC, PAL 방식이 있었는데, 그건 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날로그 TV 표준”이라고 했다. 유럽과 일본, 중국은 ATSC와는 각각 다른 디지털 방송 표준을 갖고 있다.

현재 북미 대륙의 국가들은 ATSC 1.0과 2.0에 따라 디지털 방송을 송출한다. HD(High Definition) TV가 ATSC 1.0 기술이다. ATSC 2.0 기술은 1.0보다 개선된 기술이나, 다른 용어로 표현할 만큼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한국은 ETRI가 개발한 차세대 방송 기술이 ATSC 3.0으로 채택된 이후인 지난해 5월 31일 UHD 방송을 시작한 바 있다.

박성익 박사는 “UHD 방송에 여러 가지 기술이 들어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LDM(다중분할부호) 기술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LDM은 전혀 새로운 기술이다. 이전에는 시간분할다중화(TDM) 기술과 주파수분할다중화(FDM) 기술이 많이 쓰였다. 박 박사가 UHD 방송용으로 개발한 방법은 파워(Power)를 분할한다는 것인데, 좀 내용이 복잡하다고 말했다. 이 원리는 1970년대부터 얘기되어왔으나 그동안 기술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 박성익 박사 역시 “LDM 기술 개발 때 좀 힘들었다”면서 원리를 설명했다.

박성익 박사(오른쪽)와 그의 상사인 김흥묵 미디어전송연구그룹 그룹장(왼쪽)이 지난 4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NAB(국제방송장비전시회)에서 멀티채널 HD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ETRI
박성익 박사(오른쪽)와 그의 상사인 김흥묵 미디어전송연구그룹 그룹장(왼쪽)이 지난 4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NAB(국제방송장비전시회)에서 멀티채널 HD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ETRI

차세대 북미 TV 방송 표준 채택

LDM 전송기술은 두 개 이상의 방송 신호, 예컨대 DMB와 디지털 TV를 하나의 방송신호로 보낸다. 기존에는 DMB용 주파수, 디지털 TV용 주파수를 필요로 했으나, LDA 전송기술은 하나의 주파수만 사용한다. 그런 만큼 주파수 사용량이 줄어들었고, 귀한 주파수 자원을 아껴 쓸 수 있게 되었다. ETRI가 차세대 UHD 방송 기술 개발에 나선 건 2008년. 박성익 박사는 초기 연구 성과가 나오는 걸 보고 2013년 국제 표준화 작업에 들어갔다. 신기술을 북미 차세대 방송 표준으로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ATSC에는 방송사, 가전업체, 연구소 등 150개 기관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그리고 캐나다의 ETRI인 CRC, 스페인 발렌시아공대와 빌바오공대 등과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기술 개발을 마친 뒤에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소니에 수학적인 배경도 보여주고 실업실에서의 동작도 직접 보여줬다. 산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데이터를 수신해서 받는 작업까지 했다. 4~5배 화질이 좋아졌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가전업체는 신기술에 부정적이었다. 성능이 좋아지면 제품에 들어간 기술의 복잡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존 TV를 그냥 팔고 싶은 게 제조업체의 심리라는 얘기다.

“1년에 8번 워싱턴의 ATSC 본부를 찾기도 했다. 처음에는 발표해도 회원들이 귀담아들어주질 않았다. 100명 중 10명이 제대로 들어줬을까. 방송사, 가전업체, 학계 인사를 접촉하며 그렇게 3년을 다녔다. 점차 친구가 늘어났고 우리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표준 채택을 앞두고 거의 매일 국제 화상 컨퍼런스 콜이 있었다. 미국 기준으로 화상통화가 진행되다 보니 밤 11시에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회의가 이어지는 날이 많았다. 박성익 박사와 그의 팀은 매일 3~4시간밖에 못 자며 일해야 했다. 2016년 1월 컨퍼런스 콜을 하며 표준 채택을 위한 표결이 있었다. 미국 방송사 20곳과, 삼성·LG·소니와 같은 TV 생산업체가 참여했다. 반대 진영은 기존의 TDM과 FDM 기준을 계속 쓰자고 했다. “마음 졸인 순간이었다. 미국의 NBC가 맨 처음 ‘찬성’이라고 말했고, 이후 거의 모든 미국 방송사가 ETRI가 주축이 된 LDM기술 표준 채택에 동의했다. 만세를 불렀다.”

ATSC 3.0 표준은 북미 지역에서는 강제사항이다. UHD 방송을 하거나, 이 방송용 TV를 생산하려면 ATSC 3.0 표준, 즉 ETRI의 LDM 기술을 써야 한다. ETRI는 이와 관련 원천기술 특허를 다수 확보해놓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상반기에 UHD 방송을 시작했고, 미국은 2020년에 UHD 방송을 시작한다. 미국에서 UHD 방송을 시작하면 상당한 액수의 특허 수입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ETRI 특허팀은 연간 40억~50억원의 특허 수입을 예상한다. 이는 보수적으로 잡은 규모다. 특허료는 UHD TV를 생산하는 가전업체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박성익 박사는 이와 같은 공로 등을 인정받아 지난 4월 ETRI 창립 42주년 행사 때 ‘올해의 ETRI 연구자’로 선임됐다.

박성익 박사는 경남 김해 진영 출신. “노무현 대통령이 초등학교(대창) 선배”라고 박 박사는 웃으며 말했다. 창원고 재학 시절에는 김해 진영에서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창원으로 통학했다. 아침 5시50분에 열차를 타면 창원역에 6시30분에 도착했다. 고생길이다. 전자공학과 인연을 맺은 건 한양대 전자정보통신공학과에 들어가면서다. 포항공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전자통신연구원에 2002년 2월 병역특례로 입사했다.

공학자로서 전환점은 2009년 IEEE (국제전자전기공학회) 방송저널이 주는 최우수논문상을 받았을 때다. “한국인 최초이고, 아시아에 사는 아시아 거주인으로는 최초라고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이때를 포함해 박성익 박사는 모두 4번의 IEEE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당시 논문은 UHD 방송의 핵심기술인 LDM의 전전 버전인 TXID 관련이었다. 박성익 박사는 2013년에는 IEEE 방송저널의 편집위원 및 특임강사(distinguished lecturer)가 되었다. 이 모두 당시 한국 언론에 빠지지 않고 보도됐다.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걸로 풀이된다.

하루 14시간 연구

박성익 박사는 IEEE의 시니어 회원이다. IEEE는 전 세계에 40만~50만명의 회원이 있고, 이들은 일반 회원, 시니어 회원, 펠로로 구분된다. 회원 중 7%가 시니어 회원이고, 펠로는 극소수인 0.5%에 불과하다. 박 박사는 펠로가 되고 싶어한다. “펠로가 되는 건 영광이다. 이 분야에서 기여를 정말 많이 한 대가라고 인정받는 거다. ETRI에 들어올 때부터 펠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구를 많이 했으니, 인정받고 싶다.” 펠로는 통상 50대 중반 이후 연령자들이다. 박 박사는 40대 초반이다. 앞으로 박성익 박사의 펠로 도전이 주목된다. 한국에는 20~30명의 IEEE 펠로가 있다고 한다. 박 박사는 논문을 많이 썼고, 특히 우수한 논문으로 평가받는 SCI에 실린 논문은 66건이다. 그는 “SCI 논문 게재 건수가 ETRI 내 최고 기록”이라고 말했다.

박성익 박사는 성공 비결에 대해 “머리는 좋지 않다. 그런데 노력을 많이 한다. 남보다 1.5배 이상 시간을 투자한다”고 말했다. “하루 14시간 이상 연구하고 공부한다. 주말에도 토요일만 쉬고 일요일 오후부터는 일한다.” 그는 엉덩이가 커서 한 번 앉았다 하면 3~4시간은 연구한다고 했다. 박 박사는 “그간 쉼 없이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곧 북미방송표준기구인 ATSC 이사회의 마크 리처 의장을 포함해 이사들 8명을 손님으로 맞는다”고 했다. 새로 개발한 ‘하이브리드 브로드캐스트/브로드밴드 망’ 시연을 보러 온다고 했다. ATSC 이사회 의장이 직접 찾아올 정도면 놀라운 기술이라는 의미다. 박 박사에 따르면 ‘하이브리드 브로드캐스트/브로드밴드 망’은 디지털 기기가 영상을 잡아내는 새로운 기술이다. 영상을 볼 때 LTE, 와이파이, 방송망을 자유자재로 찾아 잡아낸다. 방송망과 브로드밴드 망을 자유롭게 오가기 때문에 시청자는 망이 바뀌는지 모를 정도다. 얼마 전에는 일본 NHK, 미국 공영방송 PBS, 중국의 연구기관인 NERC-DTV가 ETRI에 찾아와 ‘하이브리드 브로드캐스트/브로드밴드 망’ 기술을 보고 갔다.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LDM 기술을 계속 연구해서 5G, 6G 통신에서는 물론 산업현장에서 기계 간 통신에도 사용되도록 하는 게 향후 목표 중 하나다. 40대 초반까지 그가 거둔 성공이 커 보인다. 그 이후에 그가 뭘 이뤄낼지 궁금하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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