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닭은 230억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구상에서 닭은 230억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금은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에 진입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인류가 지질학적 행위자’로 생태계 파괴와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해 새로운 지질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류세를 규정짓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닭’이라는 논문도 발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12월 12일 학술지 ‘영국 왕립 오픈 사이언스(Royal Society Open Science)’에는 식육용 닭이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의 도래를 알리는 가장 충격적인 증거일 수 있다는 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팀의 논문이 실렸다. 인류세란 지구사(史)의 한 시기로, 인류가 중요한 지질학적 세력으로 등장한 때를 말한다. 지질학적인 대사건을 인간이 일으켰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닭이 인류세의 증거가 되는 것일까.

인류세는 199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이 2000년 지질학회의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2002년에는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인류세에 대한 논문도 게재했다. 인류세의 영어단어인 Anthropocene는 인류를 뜻하는 Anthropo와 시대 혹은 시기를 뜻하는 cene의 합성어다. 세(世)는 지구의 지질시대를 구분할 때 쓰는 용어로, 보통 퇴적암에 남아 있는 화석의 변화로 구분한다.

인류세, 고생대 말기 기후와 비슷

지구의 지질시대는 크게 선캄브리아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구분된다. 각 지질시대는 지질학적 변동이나 생물학적인 변화 등에 따라 세분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중생대 백악기와 신생대 제3기는 공룡 멸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인류가 살고 있는 현재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Holocene Epoch)이며 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부른다. 홀로세가 시작한 것은 마지막 빙하기(플라이스토세 빙하기)가 끝난 약 1만1700년 전부터다.

그런데 홀로세를 끝내고 새 지질시대인 ‘인류세’ 진입을 공식화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충적세와 지금의 지구는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는 것. 크루첸은 퇴적층 이동, 해수면 상승, 오존층 파괴, 바닷물의 산성화 등 인류가 영향을 끼친 수많은 지질학적 규모의 변화를 언급하며 우리가 더는 홀로세가 아닌 새로운 지질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대기 중 온실가스가 증가한 고생대 페름기 말기의 기후 상황이 현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지질시대에는 각 시대를 구분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는 ‘골든스파이크(golden spike·황금못)’가 있다. 이를테면 신종 유기체의 출현이라든가 기존 생물의 소멸 같은 것이다. 이번에 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팀이 현세와 인류세를 가르는 골든스파이크로 가장 유력하게 꼽는 후보는 닭의 폭발적 번식이다. 닭은 20세기 중반부터 가장 흔한 조류가 되었다.

닭은 세계적으로 매년 500억~600억마리가 도축되고 있다. 닭의 용도는 단순히 식재료에 국한되지 않는다. 매년 수백만 마리의 닭이 독감 백신 제조를 위해 희생된다. 이와 상관없이 매년 약 230억마리의 닭이 사육되고 있다. 이 정도의 개체 수는 항상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15억마리의 개체 수로 2위를 차지하는 홍엽새(쿠엘레아)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수다.

인류가 소비한 수많은 닭뼈는 세계 도처의 쓰레기 매립지로 향한다.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닭뼈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석으로 남을 수 있다. 지질학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특정 종의 뼈가 발견되는 지층을 기준으로 시대를 나누는데, 연구팀은 삼엽충이나 공룡과 같은 기준으로 볼 때 먼 훗날 인류세를 대표할 화석으로 닭뼈가 무더기로 출토될 것이라고 한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영국 레스터대학 고생물자인 얀 잘라시에비치 교수는 “지구상 수많은 매립지와 길거리 구석에서 이미 닭뼈가 화석화하고 있다”며 “이는 미래 지질학자들이 정의할 ‘인류세 화석’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나 전염병, 핵전쟁 등으로 지금의 인류가 멸망한 후 새로운 문명이 쓰레기 매립장에서 화석화된 수많은 닭뼈를 발견한다면 오늘날을 ‘인류의 시대’가 아닌 ‘닭의 전성시대’로 분석할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결론이다.

한편 세계 과학자들로 구성된 ‘인류세 워킹그룹(AWG)’은 닭 이외에도 1940년대 후반 원자폭탄 실험으로 생긴 방사성물질, 지구를 뒤덮고 있는 플라스틱 확산, 대기에 축적된 메탄과 이산화탄소 등의 온실가스도 인류세의 근거로 들고 있다.

낙진과 플라스틱도 인류세의 표지

우리가 인류세에 진입한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을까. 어떤 과학자들은 인류세의 시발점을 20세기 중반으로 보는 데 반해, 어떤 과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오래된 시기를 인류세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인류세의 개념을 제시한 크루첸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봤다. 빙하의 핵을 분석한 결과 이 시기부터 인류는 대기 중의 메탄가스 양을 2배로 늘렸고, 이산화탄소 농도를 무려 30%씩 증가시켰으며, 남극 상공의 오존층에 구멍을 뚫었다는 것이다.

잘라시에비치 교수의 주장은 20세기 중반이다. 핵실험이 가장 활발해 인공 방사성물질이 포함된 낙진이 20세기 중반 들어 절정에 달해 퇴적층에 가시적 증거를 남겼다는 것. 일부 과학자들이 이 낙진을 인류세의 시발점을 알리는 표지로 삼자고 주장한다. 영국 런던대학의 닐 로스 교수는 최초의 원자탄 투하 실험이 있었던 1945년 7월 16일이라는 날짜까지 제시했다.

인류세워킹그룹(AWG)은 세계 인구와 자원의 소비가 급증하기 시작한 1950년을 인류세 시작으로 제안했다. 이 시점은 인공 방사성물질 외에도 플라스틱이 전 지구에 걸쳐 인류의 흔적을 또렷이 새겼다는 게 이유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은 지구를 천천히 덮어가며 지구 환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플라스틱 양을 랩으로 만들면 지구를 한 바퀴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이라는 것. ‘기술 화석’이라고 불리는 물질이 유례없는 속도로 퇴적층에 쌓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과학계는 진지하게 인류세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이 훨씬 더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인류세가 지질시대로 자리 잡으려면 학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최종 결정은 국제층서위원회(ICS)와 상부기관인 국제 지질학연맹이 투표를 통해 내리게 된다. 이 과정은 수년이 걸릴 것이다. 새 지질시대의 기준이 닭뼈 화석이 됐든, 플라스틱 돌이 됐든 ‘인류세’의 골든스파이크는 징표이자 지구 파괴라는 낯부끄러운 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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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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