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일 문재인 대통령이 손경식 경영자총연합회 회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재계 총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월 2일 문재인 대통령이 손경식 경영자총연합회 회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재계 총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경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부의 2019년 경제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경제’라는 단어를 25번 언급하면서 기존의 소득주도성장 대신 ‘가치를 창조하는 혁신’과 ‘저성장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산업정책’을 앞세웠다.

지난 1월 2일 문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신년회에서 새해인사를 통해 “경제정책의 기조와 큰 틀을 바꾸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가보지 못한 길이어서 불안할 수도 있다. 정부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살펴보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라며 “왜 또 내일을 기다려야 하느냐는 뼈아픈 목소리도 들리지만, 우리 경제를 바꾸는 이 길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그 모든 중심에 ‘공정’과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다짐한다”고도 했다. 소득주도성장을 전면에 내놓은 지난해 신년사와 달리 이날 신년사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단어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8일 폴 로머 뉴욕대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뒤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photo 로이터·연합
지난해 10월 8일 폴 로머 뉴욕대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뒤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photo 로이터·연합

기술진보의 중요성

문재인 정부가 새해 벽두부터 앞세운 ‘제조업 혁신’은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로머 미국 뉴욕대 교수가 제시한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과 연관돼 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난해 ‘고용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한 보수 언론·경제지와 달리, 여당과 진보 측 인사들은 저성장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경기의 구조적 추세를 ‘고용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해왔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1월 2일 JTBC 토론회에서 “만성적인 불황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내수 부진이고, 중산층이 빈약하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처한 일자리 등의 위기는 구조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들은 세계적인 저성장이라는 글로벌 추세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해 10월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교수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된 로머 교수는 ‘기술진보’를 거시경제학의 연구 분야에 포함시키면서 거시경제이론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는 평을 받았다. 노드하우스 교수 역시 기후변화를 거시경제학의 연구 분야에 포함시킨 공로로 상을 받았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두 학자를 수상자로 정한 이유에 대해 “세계 경제에서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에 관해 연구해왔다”며 “거시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하는 틀을 개발해 경제 분석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고 설명했다.

로머 교수가 이번에 상을 받은 분야는 경제성장이론이다. 기존의 경제성장이론에서 대가로 꼽히는 인물은 로버트 솔로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로, 1987년 이미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가 만든 ‘솔로모형’은 대부분의 거시경제학 교과서에서 경제성장이론의 대표적 모형으로 소개된다. 반면 로머 교수는 1980년대 중반 내생적 성장이론을 제시한 뒤 20년 이상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거론돼왔지만 실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노벨상 수상은 언제 받느냐의 문제였을 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내생적 성장이론은 이미 정립된 이론”이라며 “그가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는 데에는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의 공적이 폭넓게 인정받아왔다는 설명이다. 내생적 성장이론 역시 국내 여러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소개돼 있다.

내생적 성장이론은 기존 솔로모형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제시됐다. 솔로모형은 자본 등 요소의 축적이라는 거시경제의 장기 성장동력을 찾았다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하지만 이 모형은 어떤 나라에서는 1인당 GDP가 빨리 증가하는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느리게 증가하냐는 현실적 의문을 설명하지 못했다.

내생적 성장이론은 솔로모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진보를 자본과 노동에 의해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내생변수로 본다. 한 경제의 기술 수준을 외생변수(알 수 없는 외부요인)로 본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투입에 의해 결정되는 변수로 본 것이다. 이 모형에 따르면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자본투자만이 아니라 기술 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노동과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기술진보의 속도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로머 교수는 ‘R&D모형’이라고도 불리는 내생적 성장이론에 따른 모형을 가장 먼저 도입했고, 이후 이 모형은 프랑스 출신의 필립 아기온 하버드대 교수, 캐나다 출신의 피터 하윗 브라운대 교수 등에 의해 뒷받침됐다. 로머 교수는 시카고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6년 10월부터 2018년 1월까지는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다.

내생적 성장이론은 완전경쟁이라는 가정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서 연구동기를 얻었다. 내생적 성장이론에 따르면, 많은 기업과 개인들이 시장장악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독점적인 기술 발명을 한 이들은 독점적 지대(rent)를 얻는다. 더 많은 이들이 연구·개발에 전념할 만한 유인이 있는 곳에서 더 많은 발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생적 성장이론의 핵심인 기술진보의 내생성이다.

기초과학 약하면 장기 경제성장 저해

로머 교수는 제1차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에서 장기적 경제성장의 주 동력이 되어온 기술진보와 생산성 증가의 결정 요인들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기술 수준과 생산성은 경제여건의 변화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기술진보는 동일한 자본과 노동을 투입하더라도 종전보다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의 축적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지식 축적은 기업 부문의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 가계 부문의 교육과 실행학습 등 인적자본 투자의 결과로 나타난다.

특히 로머 교수는 내생적 성장이론을 통해 ‘기술이 발전한다면 장기적으로 경제의 지속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이전의 성장론도 요소의 축적과 혁신을 성장의 변수로 뒀지만, 자본은 투입량이 증가할수록 생산에 추가로 기여하는 한계생산성이 떨어지는 요소로 지적됐다. 하지만 내생적 성장이론에 따르면 지식은 축적될수록 자본과 노동의 생산성을 동시에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R&D 및 인적자본 투자와 관련된 정부 정책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지속가능한 성장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로머 교수의 이론은 한국 경제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로머 교수의 R&D모형에 의하면 장기 경제성장을 가져오는 기술진보율은 연구인력의 증가율과 연구생산성이 높을수록, 기존 지식과 기술 수준의 긍정적 파급효과가 클수록 증가한다.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R&D) 지출은 세계 수위권이다. 한국의 R&D 지출은 절대적 수치로는 세계 5~6위권이고, GDP 규모를 감안하면 세계 1위로 꼽힌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의 R&D 지출은 한계도 뚜렷하다. 이미 개발된 기술을 실용적으로 응용하는 개발(Development)에만 치중한 결과 긍정적 파급효과가 큰 첨단·핵심 기술로 연결되는 기초과학 연구(Research) 분야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다. 로머 교수가 강조한 ‘연구개발을 통한 지식 축적’과 비교하면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로머 교수는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 취재진의 “소득주도성장의 경제적 효과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싱가포르도 소득주도성장을 시도했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며 “소득 증가가 더 많은 기술 습득으로 이어지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늘어난 소득으로 지식을 채우고 필요한 기술을 교육받을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성장에 보탬이 되지만, 단순소비만 늘릴 경우에는 경제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다시 조명받는 ‘축적의 시간’

최근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혁신성장도 이 점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정수 교수는 “내생적 성장이론은 우리가 벤치마킹할 만한 이론이지만 이 이론이 혁신을 어떻게 이뤄내는지까지는 설명하지 않는다”며 “문제는 혁신이 쉽게 일어날 만한 환경적 요인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가치를 만들어내는 혁신은 금융·재정 정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에 더해 혁신가를 위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제공하고, 기업의 자유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며, 규제를 줄이는 등 민간에 활력을 주는 정책이 복합적으로 실행돼야 따라온다. 이와 관련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역시 “내생적 경제성장이론의 시사점은 혁신은 우연이 아닌 노력과 열정의 결과로 경제주체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진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도 결국 제대로 된 지식축적을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제조업 르네상스’는 지난 50년간 지속된 제조업 정책의 대전환을 목표로 하는데, 2015년 26명의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모여 쓴 책 ‘축적의 시간’이 지침서가 됐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은 부가가치 사슬의 맨 위에 있는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이 매우 취약하다. 우리 경제는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압축성장은 했지만 이제 뚜렷한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이다. 선진국 기술경쟁력의 결정체인 개념설계 역량은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을 겪어야만 축적되는데 이 ‘축적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프로젝트를 총괄한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축적의 시간’에서 “미시적 산업경쟁력이 거시경제적 안정성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국제적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없는 상태에서는 거시경제지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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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경제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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