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빅히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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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의 아빠라는 표현은 좀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아티스트는 누가 만드는 게 아닌데, 아빠라고 불리면 제가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건 제 철학과도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빠라고 불리면 사람들이 제가 결혼한 줄 압니다. 저 총각이에요.”

지난 12월 10일 서울 고척스카이돔. 7인조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이 연말 콘서트를 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 참석한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방시혁(46) 대표의 말에 회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다소 딱딱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가수의 콘서트 전에 열리는 기자회견에 소속사 대표가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날 방시혁 대표가 기자회견에 나선 것은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언론의 요청이 쏟아진 탓이다. 2017년 11월 방탄소년단이 미국의 3대 대중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아메리칸뮤직어워즈’를 통해 인상적인 미국 데뷔전을 치르자 자연스럽게 방 대표에게도 관심이 쏟아졌다. 국내외에서 200여건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고 한다. 결국 소속사에서 나서 이례적으로 방 대표가 언론 앞에 서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농담을 섞어 항변했지만, 방 대표가 아니었다면 방탄소년단이 큰 성공을 거두긴 어려웠을 것이란 게 가요계의 중론이다. 방탄소년단은 지금 모든 한국 가수를 통틀어 가장 많은 해외 팬을 거느리고 있는 팀이다. 방탄소년단 트위터 계정 팔로어 수는 2017년 12월 27일 현재, 약 1140만명에 달한다.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나 공연 실황 등 관련 영상 조회수는 34억회를 넘겼다. 미국 빌보드는 2017년 세계 대중음악계를 결산하면서 방탄소년단을 ‘올해의 아티스트’ 10위에 올렸다. 2012년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를 휘저었던 싸이조차 ‘올해의 아티스트’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단 사실을 떠올리면 방탄소년단의 현재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방탄소년단은 한국 아이돌 가수 중 최초로 세계적 팝스타의 길을 밟고 있는 팀이다.

세계 음악시장의 변방인 한국에서, SM이나 YG 같은 대형기획사 소속도 아닌 방탄소년단이 어떻게 이 모든 성공을 이룰 수 있었을까. 방 대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요계에서 흔히 3대 기획사로 꼽히는 SM·YG·JYP엔터테인먼트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수만·양현석·박진영 등 회사의 창업자이자 대표가 모두 아티스트 출신이라는 점이다. 방 대표 역시 가수는 아니었지만 비슷하게 작곡가로 먼저 성공한 뒤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됐다.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방 대표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다른 경기고·서울대 출신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중학교 때 밴드 활동을 하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단 것이다. 고등학교 때 입시 공부를 하면서 잠시 음악과 멀어졌지만, 대학의 자유로운 공기는 다시금 그의 음악적 열정에 불을 붙였다.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하던 것도 이때부터다. 그의 대학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혁이가 가끔 자신의 집에 초대해 술을 마실 때가 있었는데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키보드 앞에 앉아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고 회상한다.

방시혁 대표(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방탄소년단. ⓒphoto 방시혁 트위터
방시혁 대표(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방탄소년단. ⓒphoto 방시혁 트위터

인생을 바꿔놓은 박진영과의 만남

방 대표가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4년 ‘유재하가요제’에 출전해 동상을 받으면서부터다. 감성적인 포크뮤지션을 주로 배출한 이 가요제에 그가 출전해 상을 받은 게 다소 의외 같다. 그는 “(내가 추구하는 음악과 거리가 있는) 유재하가요제에 나가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며 “결국 상업적 색이 강한 알앤비(R&B) 음악으로 상을 받았다”고 했다. 유재하가요제 수상을 시작으로 ‘프로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됐지만, 모든 일이 마법처럼 술술 풀린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남은 그의 공식적인 가요계 데뷔 작품은 1995년 남성듀오 ‘체크’의 ‘인어아가씨’라는 곡이다. 생소한 곡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방 대표는 “한동안 내가 만든 노래의 데모테이프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한번 들어봐달라’고 하는 게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가요계에 막 발을 들여 놓은 신인 작곡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일종의 영업(?) 활동이었다. 그 영업에 걸려든 사람이 있었다. 당시 파격적인 댄스·의상·무대 매너를 내세워 스타 가수로 떠오른 박진영이었다. 1997년 박진영은 당시 자신이 설립한 연예기획사(현재 JYP엔터테인먼트의 전신)에 방시혁을 영입한다. 방 대표는 “어릴 때부터 주로 팝음악을 듣고 자라서 가요는 잘 몰랐다”며 “진영이 형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비닐바지 입고 춤추는 가수’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 만남이 방 대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박진영의 세 번째 앨범 수록곡 ‘이별탈출’을 시작으로 아이돌그룹 지오디(GOD)의 ‘하늘색풍선’, 비의 ‘나쁜남자’ 등 히트곡을 연이어 내놓았다. 이때부터 방 대표는 단순히 작곡가가 아니라 가수의 음악 작업 전체를 관장하는 프로듀서 일까지 영역을 넓힌다. 특유의 상업적 감각을 가진 박진영과 함께 협업한 경험 덕분이다. 방 대표 스스로는 “프로듀싱의 모든 것을 진영이 형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한다.

2003년 박진영이 미국 진출을 모색할 때 함께한 것도 방 대표였다. 당시 두 사람은 지오디와 비의 성공에 고무돼 더 넓은 시장으로 나가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무작정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갔다. 작은 아파트에 함께 살면서 온갖 음반사를 돌아다니며 음반을 돌렸다. 하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한국에서 온 이들에게 미국 시장의 벽은 높았다. 결국 방 대표는 몇 달 뒤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 당시의 일을 두고 훗날 박진영은 “같이 살 때 빨래는 시혁이 담당이었는데 내가 뒤집힌 양말을 그대로 세탁기에 넣으니 화를 내더라”며 “그래서 크게 싸운 뒤 의리 없이 혼자 돌아가더라”고 농담한 적 있다.

방 대표는 2005년 JYP엔터테인먼트에서 독립해 자신의 회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세운다. 독립했어도 박진영과의 파트너십은 여전했다. 박진영이 키운 아이돌그룹 2AM의 매니지먼트를 빅히트에서 맡거나 자신이 만든 곡을 JYP 소속 가수들에게 주면서 교류를 이어갔다.

가요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던 방 대표가 대중 앞에 나선 것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설립 이후다. 특히 2010년 MBC에서 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출연해 큰 인상을 남겼다. 방송을 의식하지 않고 “싱어송라이터는 노래뿐 아니라 사람 자체가 캐릭터인데 외모도 신경 좀 써라”는 등 가감없이 직언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이 방송 때문에 ‘독설가’라는 이미지를 얻었지만, 주변인들은 “방 대표는 필요한 조언을 돌려 말하지 않는 스타일일 뿐 실제로 성격이 강한 편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방 대표는 “내 정체성은 상업 작곡가”라고 단언하는 사람이다. 그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상대하는 가수라면 음악성뿐 아니라 외모나 스타일 등 다양한 요소를 갖추어야만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경험이 제대로 꽃피운 게 바로 방탄소년단이다.

방탄소년단이 ‘2017 SBS 가요대전’ 레드카펫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연합
방탄소년단이 ‘2017 SBS 가요대전’ 레드카펫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연합

방탄소년단의 시작

방탄소년단의 시작은 팀의 리더 RM(본명 김남준·23)이었다. 방 대표는 “2010년 ‘일산에 랩을 끝내주게 하는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서 만나봤더니 진짜로 끝내주더라”고 했다. RM은 곧바로 빅히트 연습생으로 스카우트됐다. 처음 방 대표는 RM을 중심으로 ‘힙합 크루(힙합 음악을 하는 일종의 팀)’를 결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 아이돌그룹을 제작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 대중음악시장에서 주류가 아이돌 가수 위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긴 어려웠다. 대신 방탄소년단의 방향을 처음부터 ‘힙합 아이돌’로 정했다. 또한 단순히 사랑 노래가 아니라 또래의 실제 고민과 삶을 노래에 녹이자는 발상 역시 방 대표의 것이었다.

그는 “지금 아이돌 가수들의 음악은 너무 ‘즐기는’ 데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방탄소년단은 반대로 갔다”고 설명한다. 일부러 즐겁고 행복한 음악보다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현실과 그에 대한 고민을 노래하는 데 포인트를 맞췄다는 것이다. 멤버들이 스스로 작사·작곡을 하도록 트레이닝한 것도 방 대표다. 그래야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에 녹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방 대표의 초창기가 그랬듯, 방탄소년단 역시 처음부터 성공 가도를 달린 건 아니었다. 방탄소년단이란 이름이 ‘방시혁이 탄생시킨 소년단’이란 비아냥까지 들었다. 청춘이나 학교폭력 같은 문제를 노래하는 것이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HOT 같은 초창기 아이돌을 떠올리게 하는 복고풍이란 지적도 나왔다.

방탄소년단이 다른 아이돌과 달랐던 건 음악 스타일뿐만 아니었다. 이들은 데뷔 초부터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거의 매일 자체 제작한 영상들을 트위터와 유튜브에 올렸다. 뮤직비디오나 음악 관련 콘텐츠만 올린 게 아니라 멤버 개인의 일상이나 연습실에서 춤 연습하는 모습, 심지어 요리하는 장면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또한 멤버 개인의 계정이 아니라 오직 팀 계정 하나만 운영하도록 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다. 이런 전략은 오래 걸렸지만 확실하게 통했다. 특히 싸이의 성공 이후 K팝에 관심이 부쩍 높아진 해외 팬들에게 방탄소년단은 단비 같은 존재였다. 한국의 TV를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들이라도 유튜브나 트위터에 접속하기만 하면 쉽게 방탄소년단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년간 서서히 팬층이 두꺼워졌다. 그리고 그 두꺼운 팬층을 주목한 미국 빌보드어워드에서 방탄소년단에게 ‘톱소셜아티스트’상을 주는 파격을 택했다. 이전에는 팝스타 저스틴 비버가 6년간 독식했던 상을 방탄소년단이 받았다는 것 자체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그리고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대로, 방탄소년단의 성공 가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방 대표는 이 모든 성공에 대해 “계획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 말이 겸손만은 아니다. 그는 그저 그 자신의 철학대로 일을 했을 뿐, 성공을 미리 계획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 대표가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 성공의 복기다. 지난 11월 조선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관심은 앞으로 제2, 제3의 방탄소년단을 위해서라도 방탄소년단이 걸어온 길을 분석해 ‘성공 공식’을 만드는 거다. SM의 이수만 선생님이 보아를 일본 시장에 진출시키면서 만든 성공 공식을 따라 많은 한류 그룹이 생긴 것처럼 방탄소년단이 미국과 다른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공식을 만들 거다.”

이런 걸 보면 그는 천상 엘리트 기질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권승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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