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의봉앙성’ 1742년. 종이에 연한색. 30.2×51cm.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의봉앙성’ 1742년. 종이에 연한색. 30.2×51cm.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이 전시 중이다. 오랜만에 만난 내실 있는 기획전이라 한걸음에 달려갔다. 전시 작품은 도교와 관련된 그림과 도자기, 공예품 등 다양했는데 유교를 상징하는 ‘공자성적도’가 전시된 것이 눈에 띄었다.

도교와 유교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지향점이 다르다. 그렇게 색깔이 다른 철학(혹은 종교)이 허심탄회하게 딱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을 때다. 두 거인의 만남은 ‘문례노담(問禮老聃)’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졌고 그 내용은 지난번 글에서 살펴봤다. 공자성적도는 현재 필사본(筆寫本), 목각본(木刻本), 인쇄본(印刷本) 등 여러 종류가 전한다. 이번에 전시된 ‘공자성적도’는 김진여(金振汝)가 1700년에 비단 위에 손으로 그린 필사본이다. 교묘한 붓질과 인물 비례, 선명한 색채 등이 현전하는 공자성적도 중 가장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제작 시기가 가장 올라가는 작품으로 원래는 화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10폭의 그림만이 두루마리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 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작자 미상의 ‘공자성적도’가 한 권 더 소장돼 있다. 역시 필사본인데 작품성에 있어서는 김진여의 ‘공자성적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상하 두 권으로 제작되었을 것 같은데 현재는 하권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공자성적도’에는 여느 공자성적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 숨어있다. ‘孔夫子聖蹟圖(공부자성적도)’라고 적힌 화첩을 넘기자마자 ‘木鐸(목탁)’이란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다. 목탁은 나무를 둥글넓적하게 깎아 속을 파내 만든 물건으로 불교에서는 승려가 독경이나 염불할 때 두드려 소리를 내는 도구다. 불교 이외의 의미로는 ‘세상 사람을 깨우쳐 인도할 만한 사람이나 기관’을 비유할 때 소용된다. 그러니 ‘공부자성적도’에서는 공자를 일컫는다.

‘의봉앙성(儀封仰聖·봉지를 담당한 관리가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하다)’은 바로 이 ‘목탁’의 유래를 담은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공자가 위나라에 이르렀을 때 국가에서 내린 땅을 관리하는 관원이 와서 공자를 뵙기를 청했다. 그는 ‘군자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을 때 제가 일찍이 뵙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는 말로 방문 이유를 밝혔다. 그는 제자들의 안내로 공자를 만나 천하의 올바른 도리에 대해 배움을 얻었다. 여러 빛깔의 군자를 만나 본 경험이 많았던 그는 공자를 한 번 만나는 것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단박에 알아봤다. 공자를 만나고 나온 관원은 공자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선생님께서 세상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떠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하늘이 선생님을 세상의 목탁으로 삼아 참된 도를 전파하고 세상을 교화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논어’ ‘팔일’에 나오는 내용이다. 목탁 이야기를 그린 ‘의봉앙성’은 두 장면으로 분리된다. 오른쪽은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액자 같은 병풍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왼쪽은 공자를 만나고 나온 관원이 공자의 제자들에게 덕담을 하는 모습이다. 공자가 세상의 목탁이라는 내용을 강조하는 덕담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 찾아온 손님에게 예의상 덕담 한 마디를 건넸을 수도 있다. “당신 스승은 괜찮은 분이시군요.” 그러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단순한 인사치레를 넘어 그들의 이상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받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들은 몇 년째 불러주는 이 없는 막막한 유랑길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작자미상, ‘공부자성적도’ 표지와 펼쳤을 때 첫 번째 면
작자미상, ‘공부자성적도’ 표지와 펼쳤을 때 첫 번째 면

한때 공자는 “나를 등용한다면 1년이면 기초를 닦고 3년이면 성공을 이루리라”는 자신감으로 당당하게 군주를 찾아다녔다. 맹자의 표현처럼 ‘출사할 수 있으면 출사하고, 숨을 수 있으면 숨는’ 신념에 찬 철학자였다. 그러나 유랑생활이 장기화됨에 따라 신념은 흐려졌고 확신은 불투명해졌다. 그럴 때 지나가는 말 한마디라도 격려해 주면 그 의미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직장에서 내몰려 구직활동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느 곳에 소속되지 않은 채 지내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 일인가를. 그때 필요한 것이 강한 자기 확신과 누군가의 따뜻한 격려다. 자신이 영영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언제든 재취업할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하물며 공자는 14년이란 세월을 떠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주문과도 같은 신념과 의지는 모든 구직자에게 필수다. 생계로서의 구직이나 이상으로서의 구직을 희망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이다.

‘논어’에는 공자가 스스로에게 다짐한 듯한 내용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학이’)는 내용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이인’에도 보인다.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근심하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줄 만하도록 되는 것을 추구하라.” 어쩌면 이 말은 공자가 제자들을 향해 훈육용으로 언급했다기보다는 오랜 좌절과 불운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자기 길에 대한 명분과 확신을 다잡기 위한 독백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공자의 지칠 줄 모르는 자기 확신과 도의 실현을 향한 의지는 어디서 에너지를 끌어오는 걸까. 바로 공부다. 공자는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위정’)고 했듯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공자에 따르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과 배워서 아는 사람, 곤란을 겪고 나서 배우는 사람과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 등이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다행히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을 즐겼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얘기했듯(‘위정’) 공자의 공부는 알고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즐기는 수준이었다. 그의 공부는 단지 옛 문헌과 사료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보이는 사건과 만나는 사람 모두가 전부 공부의 대상이었고 스승이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공자의 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았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위정’)고 했듯 지식을 곱씹어 자기화하는 것을 강조했다. 공부를 의미하는 ‘학문(學問)’이 ‘배우다(學)’와 ‘묻다(問)’가 결합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배움의 차원에 머무르지 말고 계속 물어야 한다. 아는 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면 말이다. 이런 내공이 있었기에 공자는 오랜 유랑생활에서도 항상 느긋할 수 있었다. 거친 밥을 먹고 차가운 물을 마시면서도 팔을 굽혀 그것을 베개로 삼을 줄 아는 여유를 누렸다. 그래서 공자는 ‘의롭지 못하면서 잘살고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만 같은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유랑자 공자가 ‘만세의 사표’가 되고 ‘목탁’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공부에 있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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